소설리스트

75. 오랜 세월을 지나 마침내 (75/181)


#75. 오랜 세월을 지나 마침내
2022.06.17.



 


‘로즈.’

레온은 소리 내어 그녀를 부르려 했다.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왠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발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이윽고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차가 움직이는 순간, 그제야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로즈!”

 

*

호화로운 레스토랑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수연은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음악도, 웨이터의 친절마저도 부담스러웠다. 다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저런 사람이 왜 이런 델 왔지’ 하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초대장 없이 무도회에 온 아가씨의 기분이 이럴까. 오면 안 되는 곳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져 갈 무렵, 저만치서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태하였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태하가 수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모님. 아버지가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으신가 봅니다.”

수연의 심장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 좋아하는 분이 있는 건 아닐까?”

태하는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나 그랬구나.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이 같은 사람이 여태 혼자일 리 없었던 건데.

그를 만나기 위해 새 옷을 입고, 몇 시간이나 단장하고 나온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대체 뭘 기대하고 여기까지…….

수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태하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예, 이모님.”

“앞으로 아버지한테 두 번 다시 내 얘기 꺼내지 말아줘.”

태하는 수연이 마음이 상해서 그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그만, 아버지 의사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태하 아버지가 부담스러워하실까 봐 그래.”

수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태하가 저렇게 미안해하는 것이 싫었다.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것은 이쪽인데.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레온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는 그저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니 태하에게 내가 네 엄마라고 이야기할 일도 없을 것이다.

영원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아들을 향해, 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가끔씩, 시현이하고 같이 만나러 와줄 수 있을까?”

난 그거면 된단다. 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끔씩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


“예, 이모님.”

태하가 같이 식사하자고 했지만 수연은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그럼 하다못해 이 앞에까지라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미안해, 태하야. 내가 지금은 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데, 아들 앞에서 한심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안타깝게 바라보는 태하를 뒤로 하고, 수연은 혼자서 호텔을 나왔다. 마침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려는데, 문득 저만치 혼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실루엣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연은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

레온을 만나러 오는 길에 그녀는 내내 궁금해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 그는 무슨 표정을 할까. 반가워할까. 곤란해할까. 아니면 아예 알아보지 못할까.

실제로는 셋 다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반가워하지도, 곤란해하지도, 하다못해 다가와서 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자신을 알아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레온을 보고, 수연은 마음 깊이 깨달았다.

아, 우리는 정말로 남남이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택시 기사가 재촉했다.


“손님, 안 타실 겁니까?”

수연은 택시에 탔다.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로즈!”

어디선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조차도 바보 같은 미련이 만들어낸 환청이라 생각했다.

*

수연을 보내고, 태하는 혼자서 방으로 올라왔다. 레온은 그새 밖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은 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수연은 집에 데려다주는 것은 물론 배웅하는 것도 거절하고 혼자 가버렸다. 마음이 단단히 상한 것 같았다.

늘 식당에서 보던 수수한 모습이 아닌, 예쁘게 화장하고 차려입은 수연의 모습에 더욱더 씁쓸했다.

시현의 말에 의하면 이모님은 아버지와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얼굴도 못 본 채로 바람을 맞은 꼴이니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괜한 짓을 해서 두 분 다 불편하게 만들어버렸구나.’

태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었다.

문득 시현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마침 객실 문이 열렸다.


“아버지.”

들어오던 레온이 갑자기 크게 휘청거리는 바람에 태하는 깜짝 놀라 달려가서 부축했다.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그러세요, 아버지? 괜찮으세요?”

“……네 엄마.”

레온이 정신이 달아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예?”

“네 엄마를 봤어.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바보같이 나는, 붙잡지도 못하고……!”

두서없이 말하다 기어이 왈칵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고 태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번처럼 술에 취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술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겁이 났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사람을 잘못 보신 걸 거예요.”

“난 잘못 보지 않았어, 네 어머니가……!”

격정 어린 얼굴로 외치던 레온이, 이윽고 아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렴.”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만나게 해줄 테니.”

 

*

집에 돌아온 수연은 작은 방에 불을 켰다. 답답한 구두와 높은 신발을 벗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새어나왔다.

수연이 사는 곳은 가게 뒤에 딸린 살림집이었다. 기껏해야 다섯 평밖에 안 되는 작은 방이지만, 그동안 모텔방이나 여인숙 따위를 전전하며 살아온 수연에게는 과분하게까지 느껴지는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방금까지 특급호텔에 있다 온 눈에는 새삼스레 초라하게 느껴졌다. 견딜 수가 없어서, 수연은 불을 도로 꺼버렸다.

단순히 호텔에 묵고 있는 게 아니라, 레온이 그 호텔의 오너라고 아까 미용실에서 시현이 살짝 귀띔해주었다.


[혹시 직원들이 회장님이라고 불러도 놀라지 마시라고요.]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 그는 가진 거라고는 오로지 젊음뿐인 가난한 화가였다. 돈이 없어서 며칠씩 밥도 굶을 정도였다. 자기 부모님이 무척 완고하다고는 했지만, 어떤 집안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수연은 그와 사귀면서도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게 왜 하필 그런 집안 도련님을 만나서.]

나중에 태하를 낳고 난 후, 그의 부모가 보낸 사람들이 안됐다는 듯이 말했었다. 그때서야 수연은 깨달았다.

아, 내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던 거구나.

스무 살 때는 철이 없었으니까, 몰랐으니까 겁도 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이제는 알아야 할 나이였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스무 살에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일의 대가를 평생을 두고 치르고 있었다. 자신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 죄도 없는 자식까지도 그 대가를 함께 치러야 했다.

그러면 거기서 반드시 뭔가 배워야 했는데.

또 똑같은 짓을 해버릴 뻔한 자신을, 수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레온을 만나러 가면서 스스로에게 댄 핑계는 그랬다. 어쨌든 그는 태하의 친아버지고, 나는 친엄마다. 그러니까 다른 감정 없이, 한 번쯤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정말 편하게 얘기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라면, 다른 기대가 전혀 없었다면, 왜 그가 아직도 혼자라는 걸 알고 나서야 만날 결심이 섰을까.


‘그 사람이 혼자면 뭐? 이제 와서 연애라도 할 생각이었어?’

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알아보고도 다가와서 인사조차 하지 않던 남자를 떠올리자,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살 돈이 없어서, 대신 그림으로 그려주던 다정하고 가난한 화가는 이미 세상에 없다. 지금의 레온은 그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가 사랑한다는 여자 역시 그의 세계에 속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사는 이 작은 방과, 그가 있는 호텔이 두 사람의 격차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25년이 지났다. 사람이 변해도 몇 번은 변해야 마땅할 세월이었다.

바보 같은 자신만이 여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인 채로.

어느덧 혼자서 울 때조차도 소리죽여 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수연은 조금 울었다.

*

레온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걸 분명히 봤는데, 이번에도 찾지 못하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당장 직접 찾으러 뛰어나가지 않는 것은 오로지 태하 때문이었다. 아들은 내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잘 때까지도 곁을 지켰다. 그야 죽은 사람을 봤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침에 태하가 출근하자마자 그는 비서를 불러들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택시는 찾았어요?”

“예, 회장님. 어디 내렸는지까지 알아냈습니다.”

밤새 비서들이 호텔에 설치된 CCTV 영상을 뒤져 그녀가 탔던 택시를 찾아냈다. 고객 정보를 유출할 수 없다고 버티는 택시기사를 매수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했다.

그러나 알아낸 것은 겨우 그녀가 어디에 내렸다는 것뿐이었다. 카드 결제 내역이라도 있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하필 그녀는 요금도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레온은 무작정 택시 기사가 말해준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내렸다는 곳은 도심의 오피스 거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한적한 주택가였다.

가진 거라고는 예전에 비서가 가져다 준 사진 한 장뿐.

레온은 하루 종일 근처를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사진을 들이밀며 물었다.


“혹시 이 여자분을 본 적 없습니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부분은 사진도 보지 않고 그를 피해 갔다. 간혹 사진을 봐 준 사람들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7월 초, 서울의 햇볕은 무섭도록 뜨거웠다. 하루 종일 굶은 채 온 동네를 쏘다녔지만, 결국 아무 성과도 없이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갔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자고 하얗게 밤을 새운 몸이었다. 실망과 피로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을, 레온은 억지로 추슬렀다.


‘내일은 전단지라도 만들어서 뿌려 봐야겠다.’

사례금을 많이 걸면 제보가 올 것이다. 반드시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카레 냄새가 났다. ‘엄마손 카레’라고 쓰인 노란 간판을 단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종일 잊고 있었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레온은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가게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리운 느낌에 휩싸였다.

밝은 색깔의 원목으로 된 벽.

새하얀 커튼이 달린 창.

창가에 조르르 놓인 작은 화분들.

그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테이블을 닦고 있는 여자.


“어서 오세요.”

반갑게 맞이하던 여자가, 레온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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