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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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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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2022.06.21.
“어서 오세요.”
반갑게 맞이하던 여자가, 레온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쳤다.
레온은 넋을 잃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까, 여태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그와 같은 나이 또래인 친구들이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모습을 겹쳐서 그려 보았다.
대부분 나이를 먹을수록 살이 붙었다. 눈가에 하나둘씩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일찍 희끗희끗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레온이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도 대충 그 정도였지만, 물론 다른 모습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살이 쪄서 풍선처럼 부풀어 있더라도, 혹 사고를 당해서 불편한 몸이더라도, 그 어떤 모습이라도 그는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제발, 차디찬 땅 아래 묻혀 있지만 않다면.
하지만 그 모든 상상이 헛되게도, 눈앞의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마치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었다.
데리러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죽도록 보고 싶었다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나 정작 얼굴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하얘진 것만 같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식사하시겠어요?]
유창한 영어 발음에 레온은 흠칫 놀랐다.
[일행이 없으시면 저쪽 바에 앉으세요. 메뉴판은 벽에 있으니까, 결정하시면 불러주시고요.]
분명 옛날에 그녀의 영어는 겨우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는데. 놀란 나머지 레온은 정작 그녀가 자신을 손님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로즈!”
돌아서는 그녀를, 레온은 허둥지둥 붙잡았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이유일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한국말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식사하실 거 아니면 나가 주세요. 손님이 많이 올 시간이어서요.”
그때 마침 손님이 들어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녀는 레온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
다음 날 시현은 태하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어쩐지 어제 저녁부터 계속 연락이 안 되더라니. 이모한테 미안해서 어쩌면 좋아?”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몇 번이나 전화했었는데, 수연의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
“내 잘못이야. 먼저 아버지 의사부터 제대로 확인했어야 되는데.”
“아니야. 내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너무 신이 나서 그만…….”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시현은 이거다, 하고 생각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두 분한테 다 죄송해서 어쩌면 좋아.”
풀죽은 시현을, 태하가 위로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래도 아저씨, 이모 아들 찾는 건 도와주시겠지?”
“아버지는 한입으로 두 말 하시는 분 아니야. 그건 걱정 마.”
그 말에 시현은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태하는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걱정이야.”
태하의 얘기를 듣고 시현도 놀랐다. 겉으로는 늘 밝아 보였는데, 속으로 곪아 가고 있었던 건가.
“정말 술 드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란 말이야?”
“전혀. 그럴 겨를도 없었고.”
“맨 정신에 헛것이 보이는 건 더 큰일이잖아.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하자 태하가 불쑥 중얼거렸다.
“만약에,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응?”
시현은 영문을 몰라 태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 대신에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수연 이모님 말이야. 법적으로 사망자 상태라고 했지?”
“응. 그래서 가게도 내 명의로 바꿨잖아.”
“그럼 이름은? 본명이 한수연이야?”
“글쎄,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가명이려나?”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그건 왜?”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저녁때 테이블이 모두 차는 바람에 남자는 결국 가게에서 쫓겨났다.
수연이 일하는 내내 레온은 유리벽 밖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내내 모른 체하고 일을 했지만 신경은 온통 다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을까.
분명 어제 그는 자신을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아홉 시가 넘어서야 수연은 뒷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잠그고 나서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그녀의 팔을, 레온이 붙잡았다.
“당신이 낳은 우리 아들, 이제 다 컸어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만나보고 싶지 않아요?”
수연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만약에 태하를 진작 만나지 않았다면, 이 말에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제 와서 내가 그 애를 만나서 뭐하겠어요?”
“희선!”
수십 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평소에 늘 그녀를 로즈라고 부르다가, 심각할 때만 본명을 부르곤 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한 버릇에 가슴 한쪽이 몰래 욱신거렸다.
“내 이름은 한수연이에요.”
레온의 손을 뿌리치고, 수연은 차갑게 말했다.
“나한테도 내 인생이란 게 있어요. 이제 와서 다 지난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고요.”
“잠깐만.”
순간 레온은 심장을 칼로 찔린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당신 설마…… 결혼한 거예요?”
수연은 흠칫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금세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여태 혼자였을 줄 알았어요?”
다음 순간, 그가 크게 휘청거렸다. 수연은 놀라서 그를 받아 안았지만, 결국은 무게에 못 이겨 덩달아 주저앉고 말았다.
“회장님!”
어디선가 사람들이 외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처음에는 태하도 아버지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안색을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버지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정말 어머니가 살아 계신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수연이었다. 그날, 마침 수연도 호텔에 왔었으니까.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갑이라고 했다. 즉 살아있다면 수연과 같은 나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 역시 자신과 같은 미국인 혼혈이라고 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 가지가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수연은 그를 처음 본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었다.
[미안해요.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그만.]
만약에 그게 아버지와 닮았다는 말이었다면?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수연이 술에 취해 찾아와서 울며 했던 말도 떠올랐다.
[엄마는 단 한순간도 널 잊어 본 적이 없어. 언젠가 널 만나겠다는 희망 하나로 여태 살았어. 절대로, 절대로 널 버린 게 아니야.]
그게 술에 취해서 한 말이 아니라면?
정말로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한 말이었다면?
태하가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자신을 낳고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그리고 이름뿐이었다.
정희선. 아버지가 가르쳐 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수연은 사망신고가 되어 있다고 했으니, 한수연이라는 이름은 가명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수연의 진짜 이름이, 정희선이라면……?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레온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결국 확인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태하는 호텔을 나왔다.
*
레온이 쓰러지자마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비서들이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온은 그대로 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겨졌다. 죽은 사람처럼 파리한 안색에 놀라서 수연도 엉겁결에 따라서 차에 타기는 했지만, 다행히 의사의 진단은 단순한 과로라고 했다.
링거 줄을 팔에 꽂은 남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레온을, 수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멀리서 봤을 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역시 세월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지친 듯 감긴 눈가에는 살짝 주름이 보이고, 팽팽했던 뺨도 약간은 느슨해 보였다.
오히려 그게 백배는 더 사랑스러워서,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다 욱신거렸다.
도저히 더는 곁에 있을 수가 없어서 수연은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 있던 그의 비서들이 안에서 나오는 수연을 보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른 고개를 돌리고 종종걸음을 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따라와서 수연을 붙잡았다.
“장 비서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부터 케네디 회장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다.
“회장님께서 정희선 씨를 오랫동안 찾으셨습니다.”
“저를 왜요?”
“9년 전에 선대 회장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회장님께서는 처음으로 아드님과 정희선 씨가 살아 있다는 걸 아셨고,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별별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당시 수연에게서 아기를 빼앗아가면서, 그들은 의뢰인의 명령을 어기고 살려주는 거라고 강조했다.
[죽은 듯이 살아요. 한 번만 더 의뢰인 눈에 띄면 그때는 우리도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녀를 대신할 젊은 여자의 시신을 어디선가 구해 와서 눈앞에 들이밀며 했던 말이, 여태 생생하게 기억난다.
[만약에 의뢰인한테 들키면, 당신도 이 꼴이 되는 거라고.]
그때부터 수연은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살았다. 여러 가명을 돌려가며 사용했고, 어딜 가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 레온이 찾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제 호텔에서 정희선 씨를 보시고는 한숨도 못 주무신 것 같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오늘도 하루 종일 굶은 채로 찾아 헤매다 그만 쓰러지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창백한 얼굴이었구나. 수연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고 고개를 돌렸다.
“깨어나셨을 때 곁에 안 계시면 무척 슬퍼하실 겁니다. 그러니 부디 정희선 씨가 곁에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정희선이 아니에요!”
목소리를 높이자 비서가 안타까운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깨어나거든 전해주세요. 저는 그분이 찾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달라고요.”
*
수연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병원에 두고 온 사람과 똑같은 커다란 뒷모습이 가게 앞을 서성거리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상대는 아들이었다.
“어, 태하 왔니?”
얼른 표정을 아무렇지 않게 가다듬고, 수연은 태하를 반갑게 맞았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어디 갔다 오세요?”
“어, 저기…… 일이 좀 있어서. 저녁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습니다.”
눈치로 보아 태하는 레온이 자신을 찾았다는 것도, 병원에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어쩌지, 하고 수연은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태하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내가 친엄마라는 걸 알면 태하는 뭐라고 할까. 왜 나를 버렸느냐고 원망하겠지. 이제 와서 왜 나타난 거냐고 화를 내지나 않을까.
닫힌 가게 문을 여는 수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만 기다리렴. 얼른 밥 해줄게.”
태하를 바에 앉히고, 수연은 서둘러 앞치마를 둘렀다. 그런 수연을, 태하는 왠지 오늘따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신경 쓰인 나머지, 수연은 그만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접시는 산산조각이 났다. 얼른 허리를 굽혀 깨진 접시 조각을 줍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만지지 마, 위험해.”
그러나 태하는 들은 체도 않고 접시 조각을 주웠다.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수연은 애가 탔다.
“글쎄 만지지 말라니까…….”
문득 태하가 읏,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쳐다보니 태하의 손가락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태하야!”
자식의 피를 보는 순간, 마치 제 심장을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내 손가락이 잘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울먹였다.
“괜찮니? 응? 많이 아파?”
급한 대로 티슈를 가져다 감싸는데, 문득 태하가 중얼거렸다.
“……어머니.”
수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
두 번째 부르는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제야 수연은 깨달았다. 태하가 알고 있다는 것을.
“태하야.”
차마 얼굴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정신없이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 와서 너한테 엄마라고 할 자격 없다는 거 알아. 앞으로 절대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끌어 안겼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