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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또 예비 시어머니? (77/181)


#77. 또 예비 시어머니?
2022.06.24.



 


“너무 보고 싶었어요.”

태하의 품 안에서, 수연은 정신없이 변명했다.


“엄마는 너를 버린 게 아니야. 널 보내고 하루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어. 네가 미국에서 잘살고 있을 거라고만…….”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수연의 가녀린 어깨를 꼭 껴안고, 태하는 말했다.


“어릴 때 수도 없이 생각했었어요. 나한테도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딱 한 번만 보고 싶다. 아니, 엄마 사진 한 장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

“그런데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서 제 곁에 있잖아요. 뭐가 미안하세요?”

늘 차분했던 낮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태하야……!”

울음을 터뜨리는 수연을 안고, 태하도 결국은 눈물을 흘렸다.


“이젠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전 그거면 됐어요.”

 

*

어느덧 밤이 깊었다. 간판 불마저도 꺼진 가게 안에 나란히 앉아, 두 모자는 오래도록 서로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수십 년간 쌓였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사망신고는 어쩌다 하시게 된 거예요?”

수연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네가 태어났다고 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주소로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 답장도 없었어. 그렇게 한 달쯤 됐나,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와서는 널 내놓으라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태하는 몇 번이나 분노를 참기 위해 애써 긴 숨을 내뱉어야 했다.


“그러니까, 어머니한테는 저를 미국에 데려간다고 해놓고 한국에다 버리고 간 거였군요.”

“너를 나한테서 떼어놓아야 했을 거야. 안 그랬으면 언제든 너를 앞세워서 네 아버지를 찾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수연이 눈물을 훔쳤다.


“또다시 눈에 띄면 그땐 정말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해서, 죽은 듯이 숨어 살았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싶었거든. 그러면 언젠가는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아버지가 여태 어머니를 못 찾으셨던 거군요.”

수연의 거친 손과 작은 어깨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태하는 목멘 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이젠 아무 걱정 마세요. 절대로 어머니 고생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다짐하듯 말하고, 태하는 새삼 물었다.


“제 얼굴 처음 봤을 때, 아버지 닮았다고 생각 안 하셨어요?”

“했었지.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

태하를 처음 마주하던 날을 떠올리고, 수연은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진짜 내 아들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넌 미국에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네가 혼혈이라 닮아 보이는 거라고만 생각했었어. 내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눈앞에 두고도 몰라봤다니, 하면서 수연은 새삼스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많이 닮았구나.”

단정하고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물론, 짙은 갈색 눈동자에 담긴 다정한 빛마저도 꼭 젊은 시절의 레온을 보는 것 같았다.

태하의 외모에서 레온과 조금씩 다른 부분들은 바로 수연 자신을 닮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검은 머리칼이라든가, 고운 턱선이라든가.

나에게서 태어난, 나의 분신.

사랑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수연은 뒤늦게 흠칫하며 얼른 손을 거뒀다. 이제 다 큰 아들인데, 함부로 만지면 싫어하지 않을까.

그러나 태하는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수연의 손목을 잡아서 가만히 제 얼굴에 가져다댔다. 아기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뺨을 쓰다듬자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얼마 전에, 밤중에 시현 씨 집에 찾아오셨잖아요. ……그땐 이미 알고 계셨던 거죠?”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태하가 진짜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날 밤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보고 싶고, 품에 안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일부러 술을 마시고 찾아갔다. 그러면 그냥 취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왜 그때 저한테 사실대로 말씀 안 하셨어요?”

아들이 뒤늦게 서운한 얼굴을 해서, 수연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내가 엄마라고 나서겠니? 낳아서 여태 너한테 해준 거라고는 고생시킨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지만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고생한 거,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시현 씨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태하는 드물게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시현 씨가 절 좋아해줘서, 저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요. 이게 혹시 꿈이 아닐까, 매일매일 생각할 정도로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제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시현을 떠올리자 수연도 덩달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들을 빼앗기고 밑바닥을 헤매고 있던 나를 살게 해줬던 아이.

내 아들마저도 이토록 환히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준 아이.

어쩌면 시현의 존재 자체가 기적 같았다. 시현에게 제 심장을 떼어 줘도 모자란 것이 수연의 마음이었다.


“아버지하고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매일 밤 잘 자렴, 하시면서 손수 이불까지 덮어주시는 분이에요.”

수연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비록 자신과 레온은 좋은 인연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그가 그토록 아낀다는 말을 들으니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절 아끼시는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에요.”

“무슨 소리니? 내가 뭘 했다고…….”

민망해서 손을 내젓는 수연에게, 태하는 조용히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만났어요. 아버지는 그때까지 제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하셔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

“그럼 그냥 계속 모른 척하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왜 일부러 찾아와서 이렇게 미안하다고 우는 걸까. 왜 처음 보는 나를 이렇게 덮어놓고 무작정 사랑하는 걸까. 그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

“나중에 가서 깨달았어요. ……저를 낳은 사람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라는 걸요.”

지금쯤 병원에 누워 있을 남자의 핏기 가신 얼굴이 떠올라, 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수연에게, 태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어요.”

나도 그랬단다.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

병실에 누워 있던 레온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깼다.


“로즈!”

누군가가 곁에서 손을 잡아 오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지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태하였다.


“아버지.”

그러나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조차 이 순간은 저만치 뒷전이었다. 로즈, 로즈가 어디 갔지. 분명히 곁에 있었는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레온에게, 태하가 넌지시 말했다.


“어머니는 가게에 계실 거예요.”

레온은 깜짝 놀라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나 못 찾게 되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까 봐, 여태 아들에게는 제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자 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제가 소개팅시켜 드릴 때 순순히 만나셨으면 좋았잖아요.”

이게 무슨 소린가. 레온은 황급히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소개팅 상대는 미국에 있는 아들을 찾고 있는 여성이라고 했었는데…….

미국에 있는 아들?

순간 레온은 벼락에 맞은 듯이 깨달았다.


“그럼, 그게, 네 어머니였다고……?”

“저도 어젯밤에야 알게 됐어요.”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라는 걸 알고 만나러 나오셨던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돌려보내셨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하셨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날 호텔에서 마주친 그녀는 어제 식당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예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게 나를 만나러 왔던 거였구나.’

뒤늦게 알고 레온은 안절부절못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상상하자 제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내 말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럼, 결혼했다는 건? 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던데.”

매달리듯 묻자 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가 어지간히 귀찮게 하셨나 보네요. 어머니가 그런 거짓말도 하시고.”

그녀는 혼자다. 결혼하지 않았다!

레온은 미칠 듯한 기쁨에 휩싸였다. 기쁨이 조금 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마음이 급해졌다. 한가하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가서 매달려야지.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받아 주지 않으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태하가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아침 드시고 가셔야죠.”

“지금 밥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야.”

태하가 한숨을 지었다.


“또 가게 앞에서 쓰러지시면 어머니가 퍽이나 좋아하시겠어요.”

그제야 레온은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허약한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세상에 없다.


“어서 식사부터 하시고, 힘내서 어머니한테 가세요.”

쟁반을 침대 위에 올려 주면서 아들은 아버지를 격려했다.

*

복도를 지나는 태하에게, 여기저기서 인사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오늘도 멋지시네요!”

평소 같았으면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태하는 하나하나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새하얀 와이셔츠만큼이나 미소가 눈부셨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본부장님 오늘따라 되게 기분 좋아 보이시네.”

미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넌지시 시현에게 물었다.


“뭐 이따 저녁에 데이트라도 있어?”

“아니, 없는데.”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하는데 점심시간에 태하가 시현을 슬쩍 불러냈다.


“오늘 퇴근 후에 뭐 스케줄 없지?”

“응.”

“잘됐네. 저녁에 우리 어머니한테 인사하러 가자.”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레 쳐다보자 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어머니가 살아 계셔.”

“뭐?”

“그동안 아버지는 계속 어머니를 찾고 계셨던 모양이야. 혹시 못 찾으면 실망할까 봐 나한테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말씀을 못 하셨던 거고.”

시현은 레온이 술에 취해 누군가를 애타게 찾던 것을 떠올렸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잖아. 언제까지라도, 날 기다리겠다고……!]

그게 태하의 어머니였다니.

도저히 믿기 힘들어서 태하의 표정을 살펴봐도, 농담을 하는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농담을 할 성격도 아니고.


“그럼 진짜로 찾았단 말이야? 어머니를?”

“응. 나도 어젯밤에 만나 뵈었어.”

한참 말을 잃고 있던 시현은, 잠시 후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찾은 거야? 대체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거래? 아저씨도 만나신 거야? 응?”

숨넘어가게 물었지만 왠지 태하는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 만나 뵙고 당신이 직접 여쭤봐.”

“응?”

깜짝 놀라는 시현의 손을 잡고, 태하는 기쁜 듯이 말했다.


“어머니한테 당신을 소개해드리고 싶어. 그러니까 이따가 퇴근하고 같이 뵈러 가자.”

시현의 심장이 쿵, 하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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