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결혼하자
(86/181)
86. 결혼하자
(86/181)
#86. 결혼하자
2022.07.26.
조한신문의 보도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해 (주)한국에듀에 지분 49프로를 매각하여 자회사가 되면서 IT 업계에 화제를 일으켰던 유니온TA 윤태하 대표가 결혼을 앞두고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일곱 살 연상의 예비 신부는 윤 대표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그를 가르친 과외교사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얼핏 보면 단순히 한 기업가의 결혼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논란의 씨앗이 곳곳에 악의적으로 심겨 있었다.
역시나 기사가 불러온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회사명인 유니온TA의 TA는 틴에이저의 준말이었다.
처음부터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급식 메뉴를 알려주는 앱으로 서비스를 시작해서 지금은 여러 청소년용 앱을 서비스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과외교사 알선 앱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대형 교육 회사의 자회사이기도 했다.
그런 회사 대표가, 중학교 시절부터 자신을 가르친 과외교사와 결혼을 하다니!
제일 먼저 발칵 뒤집어진 것은 학부모들이었다.
- 미친 거 아니에요? 공부 가르치라고 불러놨더니 아들을 꼬신 거잖아요!
- 저렇게 능력 있는 아들인데, 부모 속이 말이 아니겠네요.
- 앞으로 무서워서 과외도 함부로 못 시키겠네.
학부모들 외의 네티즌들은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 중학교 때부터면 이건 연애가 아니라 미성년자 가스라이팅 아님?
- 어른이 돼서 사귄 걸 수도 있잖아. 그럼 문제없지 않나?
- 맞아.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랑 결혼하는 케이스들도 가끔 있는데 뭐가 문제야?
- 그래도 중학교 때 선생님은 잘 없지 않음?
갑론을박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한 커뮤니티에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십몇 년 전에 유행하던 스타일의 스티커 사진이었다.
- [펑예] 제가 예비신부 K랑 대학교 동창이거든요. 그때 걔가 자기가 가르치는 애가 아이돌처럼 생겼다고 자랑하면서 친구들한테 스티커 사진 한 장씩 나눠줬었어요. 그때 제 다이어리에 붙여놨었던 게 생각나서 찾아보니까 있길래 올려요.
교복을 입은 남학생의 뺨에, 누가 봐도 성인인 여자가 뽀뽀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정말 대놓고 어린아이였으면 그냥 순수하게 보였을 텐데, 중학생치고는 키도 크고 상당히 성숙한 외모여서 더 미묘한 사이로 보였다.
이 사진이 온갖 커뮤니티로 퍼지면서, 결국 네티즌들도 한쪽으로 의견이 확 쏠리고 말았다.
- 헐 이거 **중학교 교복인데? 내가 거기 졸업생임.
- 그럼 중학교 때부터 사귄 거 맞네!
- 딱 봐도 애가 크게 될 거 같으니까 일찍부터 자기만 보게 길들인 거네.
기사 내용 중 예비 신부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부분 역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수천억 대 자산가인 젊은 기업가가, 일곱 살이나 많은 평범한 여자와 제정신으로 결혼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가스라이팅의 결과가 분명하다는 논리였다.
사태는 점점 커져만 갔다. 처음 기사를 냈던 조한신문 외의 다른 언론들도 신이 나서 보도를 쏟아냈다.
- 윤태하 대표, 미성년자 가스라이팅 의혹 증폭
- 10여 개 학부모 단체, 유니온TA 서비스 앱 불매운동 예고
- 모기업인 한국에듀 주가 하루만에 10프로 하락
야심 덩어리, 음흉한 여자, 미성년자를 건드린 파렴치범.
시현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
미래은행 사원들은 아침부터 모여서 입방아를 찧어 댔다. 어제도 하루 종일 떠들었지만 물리지도 않았다. 마치 씹어도, 씹어도 단물이 빠지지 않는 마법의 껌 같았다.
“어제 강시현 과장 출근 안 했다며?”
“연차 냈다더라고요. 며칠은 안 보이지 않겠어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요.”
신이 나서 떠드는 사람들 중에는 시현과 직접 아는 사이인 직원들도 있었다.
처음에 시현이 윤태하 본부장과 사귄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축하한다, 청첩장은 언제 주느냐고 너스레를 떨어놓고, 결국은 속으로 배가 아팠던 것이다.
“어쩐지, 본부장님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고 물어도 입 딱 다물고 절대 얘기 안 하더니.”
“찔리는 게 있었던 거죠.”
“강시현 과장 그렇게 안 봤는데. 이래서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는 거구나.”
그 와중에 조심스럽게 시현의 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전 강 과장님이 설마 그랬을 것 같지 않아요. 중학생 때 만났더라도 지금은 어엿한 성인끼리인데 뭐 어때요?”
“뭐래. 어제 인터넷에 뜬 사진은 보고 말하는 거야?”
개중 한 직원이 면박을 주고는 휴대폰을 꺼내서 보란 듯이 내밀었다. 어제 온갖 커뮤니티에 퍼진 바로 그 사진이었다.
“어머, 본부장님 중학생 때도 지금 얼굴이 그대로 있었네.”
“그러니까 어린애를 남자로 봤겠지.”
“강시현 씨가 자랑하면서 친구들한테 나눠줬다잖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분개하는 와중에, 뒤늦게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있었다.
“저도 같이 좀 봐요.”
시현을 본 직원이 소스라치게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어머!”
시현은 휴대폰을 주워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기억한다. 태하가 중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반에서 처음으로 1등 한 기념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 갖고 싶다고 해서, 둘이 처음으로 스티커 사진을 찍었었다.
여러 컷을 다양한 포즈로 찍다 보니 장난으로 뽀뽀하는 시늉도 했었던 것이다.
다이어리에 끼워 놓은 스티커 사진을 보고, 대학교 친구들이 얘는 누구냐, 너무 잘생겼다며 앞다투어 빼앗아 가는 바람에 정작 시현에게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도 여러 명이어서 그게 누구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와, 얘는 진짜 얼굴만으로도 데뷔 각이다. 언제 우리한테도 보여주라, 응?]
[꿈도 꾸지 마. 얘 중1이거든?]
면박을 줬던 기억까지 생생한데, 내가 자랑을 하면서 나눠줬다니. 심지어 이 사진이 중학교 때부터 사귄 증거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마 이게 올라와서 다행이네요. 그때 꿀밤 때리는 포즈랑 멱살 잡는 포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자칫 미성년자 폭행범 될 뻔했어요.”
“……!”
“그럼 하던 말씀들 계속 나누세요.”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시현은 얼음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복도에서 시현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움찔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뒤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그래서 시현은 일부러 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활짝 폈다.
원앱팀 사무실에 도착하자 팀원들끼리 모여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 씨 불쌍해서 어떡해요?”
“그러게요. 자기들이 강 과장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들 떠드는지!”
“이것들 싹 다 고소를 먹여버려야 된다니까. 글쎄 우리 강시현이가 어딜 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이냔 말이야, 응?”
팀장까지도 침을 튀기며 분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시현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도 모두가 돌팔매질하는 건 아니었구나. 내가 인생을 아주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심호흡을 하고, 시현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활짝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원들은 불장난 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화들짝 놀라 우르르 흩어졌다. 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 저기, 강 과장. 몸살은 좀 괜찮은가?”
어찌나 당황했는지 ‘강시현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이 우스웠다.
“네, 팀장님. 걱정해주신 덕분에 싹 나았습니다. 오늘은 어제 못 한 만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고 자리에 가서 앉자 옆자리 미주가 물었다.
“시현 씨, 괜찮아?”
회사에서 유일하게 태하와의 과거 사연을 알고 있는 미주는, 제가 더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에, 밥도 못 먹는 애를 뼈가 빠져라 키워놨더니 이제 와서 뭐? 부잣집 도련님한테 꼬리쳐서 팔자 고친 과외선생? 기가 막혀서, 내가!”
미주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현을 위로했다.
“아무 걱정 마, 시현 씨. 내가 어떻게 된 사연인지 회사에 쫙 퍼트려줄게. 인터넷에도 올려서……!”
“됐으니까 놔둬, 멋대로들 떠들게.”
미주는 울화통이 터졌다. 이보라 사건 때도 끝까지 입 다물고 있어서 사람 복장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도 가만히 얻어만 맞을 셈인가!
“왜 그렇게 맨날 속으로만 삭이는 거야? 시현 씨는 억울하지도 않아? 제발 좀,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러나 시현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나 괜찮으니까 얼른 일이나 하자. 어제 회의 내용 좀 정리해서 줄래?”
*
태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에 기사가 뜨고 나서, 시현과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 미안해, 태하야. 나 오늘은 혼자 집에서 생각 좀 할게.
그런 메시지가 온 것이 전부였다. 아예 휴대폰을 꺼 버렸는지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유니온TA의 모기업인 한국에듀 측에서는 어떻게든 빨리 사태를 수습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윤 대표, 이 난리가 났는데 설마 계속 결혼 진행할 건 아니죠?]
[할 겁니다만.]
그러자 모기업에서는 보유 중인 유니온TA의 지분 재매각까지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왔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언제든 제가 도로 매입하겠습니다.]
태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사업을 시작한 것도, 하루빨리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서 시현 앞에 남자로 서고 싶었기 때문인데 시현을 잃고 사업을 지킨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사태는 시시각각 커져만 갔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한 불쌍한 아이 취급을 받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시현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태하는 결심했다. 직접 언론과 인터뷰를 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기로.
그전에 시현과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정작 본인이 연락도 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큰일이었다.
대체 지금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걱정스럽게 생각하다 문득 태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헤어지려는 건가?’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집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태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무실을 뛰쳐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바람에 태하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들어온 사람은 바로 시현이었다.
“출근한 거야?”
“세상이 뒤집어져도 일은 해야지.”
뭔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에 태하의 불안감이 확 부풀었다.
생각해 보면 시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워했었다.
[만약에 내가 너하고 사귀든 결혼하든, 한다고 쳐. 대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니?]
[좋아한 건 나야. 처음부터 당신을 원한 건 내 쪽이라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남들은 다 그런 눈으로 볼 텐데. 아, 저러려고 어릴 때부터 키웠구나. 다 꿍꿍이가 있었네. 잠깐, 혹시 미성년자일 때부터 건드렸던 거 아냐?]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돋도록 정확한 예측이었다. 태하는 새삼 자신이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물불 안 가리고 사랑에만 미쳐 있던 자신과 달리, 시현은 벌써 여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나, 너 키우면서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을 정도로 깨끗한 마음이었어. 그 마음에 더러운 손가락질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
결국 그녀가 걱정했던 그대로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분명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아서, 태하는 벌써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어렵게 얻은 마음인데!
그녀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 태하는 다급히 말했다.
“아무 걱정 마. 내가 직접 인터뷰든 뭐든 해서 다 밝힐 테니까. 당신은 내 과외선생이 아니라고, 부모 없는 날 키워준 거라고.”
“그러면 뭐가 달라지니?”
시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잖아. 나는 어릴 때부터 널 세뇌시킨 사람이고. 그런데 네가 기자회견을 해봐야 뭐가 달라지겠어? 사실은 부모도 없는 애였다, 중학교 때부터가 아니라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고 말하면 더 나쁜 년이라고 난리나 나겠지.”
이미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조급해진 태하는 매달리다시피 말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잖아!”
“헤어지고 싶어?”
시현이 되묻는 바람에 태하는 조금 당황했다.
“나는 죽어도 그럴 생각 없어.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 거야.”
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져야 하나, 생각은 했지. 네 회사에까지 피해를 끼치게 됐는데, 내가 물러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이러다 자칫 내가 네 앞길을 가로막는 건 아닐까.”
“당신이 없는데 회사가, 내 앞길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헤어져서 평판을 지키면 네가 행복할까. 나하고 헤어져서 사업을 지키면, 네가 과연 행복해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 같더라고.”
태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헤어지고 싶은 건가, 아닌 건가. 마치 사형대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좀 뻔뻔하지만, 결심했어.”
시현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것을, 태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하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현은 반지를 건넸다.
“우리 결혼하자, 윤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