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회장님의 브이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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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회장님의 브이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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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회장님의 브이 사인
2022.07.29.
태하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현은 반지를 건넸다.
“우리 결혼하자, 윤태하.”
태하는 차마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아주 옛날부터, 이런 순간을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상상은 늘 자신이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었지, 그 반대가 될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얀 몸통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단순한 모양의 반지였다.
이 여자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가서 이 반지를 샀을까. 온 세상이 자신을 욕하고 있는 걸 알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태하는 이를 악물었다.
“…….”
태하가 반지를 선뜻 받지 않자 시현은 조금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태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 때문에 손가락질 받은 만큼, 결혼해서 내가 너한테 잘할게. 응?”
태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그게 당신 때문이야.”
눈앞이 흐려졌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나랑은 절대 안 되는 거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내가 고집을 부리고 쫓아다녀서, 결국은 당신을 나쁜 여자로 만들어버리고……!”
태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껏 시현이 얼마나 열심히, 착하게 살아왔는데. 아무 죄도 없는 여자가 자신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나쁜 여자 맞지 뭐.”
다정하게 태하의 등을 토닥이는 시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어려 있었다.
“원래 너 같은 남자는 공공재로 남겨둬야 하는데, 나 혼자 차지해버렸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욕먹는 건 감수해야지.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데.”
태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파혼할 때도 그러더니, 왜 이 여자는 가장 힘들 때 이렇게 괜찮다면서 웃는 것일까.
“제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마.”
제 품에 숨기듯 껴안으며, 태하는 호소하듯 말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나한테 기대면 되잖아.”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너랑 헤어지는 것보단 낫잖아.”
결국 시현의 목소리도 떨리고 말았다.
“손가락질하라고 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욕하면 뭐 어때. 욕 좀 먹는다고 죽어?”
“…….”
“뭐라고 떠들어도 나는 너하고 안 헤어져. 아니, 못 헤어져.”
아까 그녀는 제게 청혼하면서 좀 뻔뻔하지만, 이라고 말했다. 태하는 자신이야말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 나란 놈은 어떻게 이토록 행복할 수가 있을까.
떨리는 손을 내밀자 시현이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마치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만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좋은 남편이 될게.”
눈물로 더욱더 반짝이는 반지를 들여다보며, 태하는 맹세했다.
“평생 당신만 바라볼게. 나 때문에 당신이 짊어지게 된 것들,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이 이상 말했다가는 정말로 소리 내어 울어버릴 것 같아서, 태하는 말을 포기했다.
대신에 얼굴을 가까이하자 시현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본부장님!”
갑자기 떠나갈 듯한 고함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키스를 방해하고 만 태하의 비서가 뒤늦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그런데 잠깐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비서가 황급히 달려와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라이브 뉴스 화면이었다.
[반 더 린드 LLC 케네디 회장 기자회견]
화면에 비친 레온의 얼굴을 보고 태하와 시현은 동시에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
기사가 났던 날 오전, 수연은 레온과 함께 가게에서 점심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
카레 소스를 젓다가 갑자기 레온이 낮은 신음을 흘리는 바람에 수연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덴 것 같아요.”
레온이 이마를 찡그리고 대답했다.
“어디 좀 봐요.”
얼른 들여다보았지만 레온의 손은 어디 한 군데 빨개진 데조차 없었다.
“멀쩡한데 왜 호들갑이에요?”
수연이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자 레온이 항의했다.
“태하가 손가락 베었을 때는 울었다고 하던데, 나한테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에요?”
“당신이 태하랑 같아요?”
“나도 아파요!”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레온의 비서가 황급히 들어와서 말했다.
“회장님, 잠깐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지금 한창 바쁜데.”
방해하지 말라는 듯, 레온이 못마땅한 말투로 대꾸했다.
“저, 아드님께서…….”
그제야 레온은 주방에서 나갔다. 비서가 뭐라고 귀엣말을 하며 휴대폰을 건넸다. 화면을 들여다보던 레온의 표정이 확 변했다.
“왜 그래요? 우리 태하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뭔가 심상치 않다 싶어서 수연도 주방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휴대폰을 감추려는 레온의 손에서, 그녀는 강제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여다보았다.
기사를 본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 유니온TA 윤태하 대표, 미성년자 가스라이팅 의혹 증폭
유니온TA 윤태하 대표가 7세 연상의 신부와 결혼한다는 보도 이후로 네티즌들의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예비 신부와 사귄 것이 미성년자 때부터가 아니냐는 것. ‘조한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예비 신부는 윤태하 대표가 중학교 시절부터 가르친 과외교사로……
기사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댓글들은 훨씬 더했다.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예비 신부라는 여자를 비난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한참 넋을 잃고 있다가, 수연은 정신없이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레온이 놀라서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요?”
“내가 신문사에 찾아가서 다 이야기할 거예요. 우리 시현이 그런 아이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이에요.”
“일단 진정해요. 기사가 난 게 이 신문사 하나도 아닐 거고…….”
“이걸 보고 어떻게 진정을 하라고요!”
말리는 레온을 향해, 수연은 소리쳤다.
“시현이 내 딸이에요! 내 딸이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더러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미도 아비도 돌보지 못한 아이를, 어린 시현이가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면서 여기까지 키워놨는데 뭐라고?
이걸 시현이 고스란히 봤을 생각을 하니 수연은 억장이 무너졌다. 그 애 심정이 지금쯤 어떨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기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라도 하고 싶은데, 레온이 팔을 붙들고 말리니 수연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거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날뛰는 수연을, 결국 레온이 품에 끌어안았다.
“나도 시현이를 내 딸이라 생각해요.”
수연을 옴짝달싹 못 하게 꼭 껴안고, 레온은 맹세하듯 말했다.
“날 믿고 딱 하루만 기다려요. 내가 해결할 테니까.”
*
퇴사한 보라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하루 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문기사나 커뮤니티에 달린 댓글만 읽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사태는 도대체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윤태하의 현재 사진이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고 나서는 한층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 와 진짜 대존잘이네.
- 어릴 때 사진은 아이돌 같았는데, 지금은 무슨 배우 같네.
- 보유주식 평가액만 3천억이 넘는다잖아.
- 이런 사람이 일곱 살 많은 회사원이랑 결혼을 왜 함?
- 그러니까 가스라이팅이 무서운 거지.
사실 그들이 언제부터 사귀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진짜 죄는 미성년자를 건드렸네, 어쨌네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마음 편하게 한 사람을 물어뜯고 짓밟을 수 있는 핑계에 불과할 뿐, 사람들이 진짜로 화가 난 이유는 평범한 여자가 재력가인 미모의 연하남과 결혼한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질투를 정의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거리낌 없이 표출했다. 진짜 미성년자 성범죄자조차도 이 정도의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짧은 기사로 사실만 슬쩍 흘려줬을 뿐인데, 그 후로 자기들끼리 알아서 소설을 써대고 알아서 퍼뜨리고 알아서 증거 사진이니 뭐니 내놓으며 피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수천, 수만 개나 되는 분노의 댓글 하나하나가 보라에게는 사이다 그 자체였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태하의 아버지, 케네디 회장의 반응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다고? 그게 사실이야?’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것도 모르고 나는 여태…… 당장 그 여자 들어오라고 해!’
지금쯤 이러고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짜릿해서 보라는 몸을 떨었다.
뭐, 미국인이니까 결국 그 부분은 쿨하게 넘어간다고 쳐도 이미 전국적으로 당한 망신은 어쩔 수 없을 터였다.
“앞으로 한국에서 얼굴 들고 살기 힘들겠네, 강시현.”
노래를 부르듯 중얼거리고, 보라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혹시 뉴스에는 안 나오나, 싶어서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 보았다.
그러다 경제 전문 채널에 이르러 보라는 깜짝 놀랐다.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비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태하의 아버지, 레온이었다.
[반 더 린드 LLC 케네디 회장 기자회견]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기자회견까지?
리모컨을 꽉 쥐고, 보라는 기대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
그랜드호텔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경제부 기자들이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헤지펀드 ‘반 더 린드 LLC’의 수장인 케네디 회장이 한국에서 직접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미 대한민국 재계에서 큰 이슈였다. 왜 케네디 회장 같은 사람이 하필 한국에서?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반 더 린드가 한국 회사에 투자하는 비중이 유난히 높기는 했다.
한국에 케네디 회장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기사화할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바 그는 싱글이었고, 한 번도 한국 언론과 접촉해서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그러니 드디어 그가 직접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에, 방송국 신문사 가릴 것 없이 온갖 경제부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케네디 회장이 등장하는 순간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의 입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졌다.
원래 젊다고는 들었지만, 실물은 알려진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 보였다. 게다가 멀리서 봐도 빛이 날 정도의 대단한 미남이었다.
케네디 회장이 미리 마련되어 있던 자리에 착석하자 경제인 기자회견이라기보다 마치 할리우드 배우 내한 인터뷰 같은 분위기가 났다. 사방에서 경쟁적으로 플래시가 터졌다.
케네디 회장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기자들은 그가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케네디 회장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많이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온 케네디입니다. 먼저 제가 준비한 말씀부터 드리고, 그 후에 질문받겠습니다.”
발음에서 약간 외국인 티가 나는 것 외에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한국어였다.
“헉!”
기자들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케네디 회장은 빙긋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되도록 한국어로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영어가 살짝 가물가물해서요.”
훌륭한 조크였지만 기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웃지도 못했다. 케네디 회장이 한국어를 저렇게 잘할 줄이야!
케네디 회장은 금세 미소를 거두고 마이크에 대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결혼 소식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유니온TA의 윤태하 대표는 저의 친아들입니다.”
잠시 회장에 정적이 흘렀다. 요란한 플래시조차 한순간 거짓말처럼 뚝 멈춰버렸다.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심지어 그 아들이라는 것이 지금 가장 핫한 이슈인 윤태하 대표라니.
특종이다!
다음 순간, 기자들은 신들린 듯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선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서 오류를 바로잡겠습니다. 제 아들이 신부를 만난 것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케네디 회장은 엄숙하게 말했다.
“사실 중학교 때가 아니라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2학년, 하면서 케네디 회장은 브이 자를 그리듯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