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당신, 왜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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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당신, 왜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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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당신, 왜 울었어요?
2022.11.08.
어슴푸레한 빛에 희선은 눈을 떴다. 주위 풍경이 낯설어서,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 호텔로 옮겨 왔었지.’
희선은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방바닥에서 요를 깔고 지냈던 몸이라,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니 오히려 허리가 뻐근했다.
거실로 나오자 태하가 소파에서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왜 멀쩡한 침대 놔두고 소파에서 자고 있나 했더니 테이블 위에 시현의 핸드백과 겉옷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이가 왔나 보구나.’
내외하는 두 사람을 보고 희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곧 결혼할 사이, 한 방에서 잔대도 흉잡지 않을 텐데. 어머니가 옆방에 있으니 예의 차린다고 저렇게 따로따로 떨어져 자고 있는 거였다.
‘예쁜 내 새끼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불을 주워서 잠든 태하의 몸 위에 가만히 덮어 주고, 희선은 살짝 건너편 침실로 향했다.
사실은 요 며칠 시현이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태하가 걱정하는 것을 들었다.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지 시현과 둘이서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시현이 아직 자니?”
가만히 부르고 노크를 하려는데 안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은 준비됐어요.”
일어나 있었구나. 희선은 얼른 손을 멈췄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아서 돌아서려는데, 왠지 말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아뇨, 입금은 나중이고요. 먼저 변호사 입회하에 각서부터 써주셔야겠어요. 똑같은 일로 두 번 뜯길 순 없잖아요?”
시현의 목소리가 저렇게 차갑게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사람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위약금 두 배 물어주신다는 조항 넣을 거예요. 태하랑 저희 아버님은 물론이고요.”
그지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태하에다 레온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 희선은 숨을 죽였다.
“원하시면 작은어머니도 변호사 데리고 나와서 검토하시든지요.”
작은어머니.
희선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아무래도 이건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네. 이번 주 일요일 열두 시, 제가 그쪽으로 찾아뵐게요.”
희선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가누고 있는 사이에, 시현은 시간 약속까지 마쳤다. 희선은 입속으로 간신히 되뇌었다. 이번 주 일요일, 열두 시.
“작은어머니. 돈을 떠나서, 제가 조카로서 하나만 여쭤볼게요.”
전화를 끊기 전에, 시현이 잠시 망설인 끝에 물었다.
“정말 저희 이모, 아니 어머님이 아이를 가지셨던 게 사실인가요?”
희선은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애써 틀어막았다.
“……!”
*
태하와 시현이 출근하기 전에, 셋이서 함께 룸서비스로 조식을 먹었다.
“시현이는 언제 왔니?”
희선이 묻자 태하가 얼른 대답했다.
“어젯밤에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서, 제가 밤중에 달려가서 납치해 왔습니다.”
“이모, 괜히 저 때문에 깨신 거 아니죠?”
그렇게 묻는 시현의 뺨이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홀쭉해져 있었다. 어젯밤에 울었는지 눈도 빨갛게 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깨긴. 호텔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지, 세상모르고 잤는걸.”
아들이 부쩍 시현을 살뜰하게 챙기는 것이 눈에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짐을 짊어진 거니, 응?’
당장이라도 시현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희선은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몇 번이나 꼬집어야 했다.
“어머니, 그럼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이모.”
“그래, 잘들 다녀오렴. 운전 조심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하와 시현을 배웅하고, 겨우 객실에 혼자 남자마자 희선은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그저 숨고, 도망치려 했었다. 어차피 다 지난 일, 평생 기억 속에 깊이 묻어둔 채로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 시현이 걸려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침에 엿들은 시현의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상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빌미로 시현이 작은어머니인 화란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사람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위약금 두 배 물어주신다는 조항 넣을 거예요. 태하랑 저희 아버님은 물론이고요.]
태하에게도, 레온에게도 여태 말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야 그 두 사람에게 알리겠다고 협박을 당한 것일 테니까.
그러면 대체 돈은 어떻게 구한 것일까.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던 시현을 떠올리자 희선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 애가, 못난 나를 지키겠다고……!’
혼자서 가슴을 치고 있을 때 마침 레온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영상 통화였다.
지금은 도저히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비서에게 전화해서 내 로즈 어디 갔느냐고 한바탕 난리를 칠 남자다. 희선은 얼른 눈물을 닦고 전화를 받았다.
- 로즈! 나 이제 자려고…….
반갑게 말을 꺼내던 레온은, 희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안색이 굳어졌다.
- 당신 울었어요?
“아니에요. 내가 울 일이 뭐가 있다고.”
희선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지만 레온은 심각했다.
- 왜 울었어요?
“글쎄 안 울었다니까요. 거기 몇 신데 벌써 잘 시간이에요?”
- 말 돌리지 말아요. 울었잖아요, 당신.
“울긴 누가 울었다고 자꾸 그래요? 방이 건조해서 눈 좀 빨개진 거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말아요.”
핀잔을 주자 다행히도 레온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잘 자요. 네, 일어나면 또 통화해요.”
전화를 끊고 희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최대한 타이트하게 스케줄을 잡아서 겨우 타협한 출장 기간이 열흘이었다.
단 하루도 더 줄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차피 레온이 당장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를 붙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희선은 눈물을 닦았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줌마는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봐?]
매섭게 눈을 치켜뜨는 화란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건반사처럼 몸이 떨려왔다. 무섭고 두려운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희선은 어머니였다. 자식을 지켜야 했다.
저 혼자 일이라면 지금까지처럼 도망치고 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현이 걸려 있고 태하가 걸려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고통스러웠을 시현과, 그런 시현을 보면서 이유도 모르고 함께 마음 아파했을 태하를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희선은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너는 엄마야, 정희선.’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를 향해, 다그치듯 속삭였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여자의 눈빛에서,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져 갔다.
*
밖에 나갔던 아현이 눈이 둥그레져서 들어왔다.
“엄마. 밖에 저거 뭐야?”
“뭐는 뭐야. 새 차 처음 보니?”
소파에 앉은 화란이 손가락에 낀 커다란 보석 반지를 요모조모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돈이 어디서 나서 차를 바꿨어? 얼마 전에 아빠 공장 설비 증설하는 바람에 요즘 어렵다고, 가정부 아줌마도 한 명 내보냈잖아.”
“엄마가 옛날에 묻어뒀던 곗돈을 탔거든. 아현이 너도 가방 산 지 오래됐지? 내일 엄마랑 쇼핑이나 가자.”
“정말?”
아현이 좋아라고 제 엄마 곁에 붙어 앉았다가, 문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엄마. 그 여자, 우리 집에서 왜 쫓겨났는지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그 얘긴 또 왜 꺼내?”
화란이 눈을 흘겼다.
“그냥. 그랜드호텔 놀러갔다가 또 마주쳤거든.”
“그놈의 그랜드호텔은 왜 자꾸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하는데?”
“하여튼. 좀 말해 줘봐, 응? 그 여자 뭐 잘못했어?”
화란이 대답 대신에 딸을 향해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입금부터 하시라고요. 20억짜리를 어떻게 맨입으로 말을 해주니?”
“20억?”
영문을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딸을 향해 픽 웃어 보이고, 화란은 손을 거뒀다.
“깊게 알면 다쳐. 그냥 모른 채로 살아, 이것아.”
“그럼 그것만 말해줘. 좋은 일은 아니지? 응?”
“일하던 집에서 쫓겨났는데 그럼 뭐, 좋은 일이었을까 봐?”
“그러니까, 뒤가 구린 여자다 이거지?”
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내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더라니!”
*
다음 날.
야간 근무 중에 객실 호출을 받아 복도를 지나다, 아현은 또다시 희선을 딱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하나?’
지난번에는 주위에 보는 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깊은 밤이어서인지, 늘 희선의 곁에 있던 레온의 비서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내적 갈등 끝에 아현은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왜 저런 여자한테?’
엄마인 화란은 끝까지 저 여자가 쫓겨난 이유를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단단히 구린 일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뭐, 엄마 반지라도 훔치다 걸린 게 아닐까.
아현은 보란 듯이 고개를 더 빳빳이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피식, 하고 비웃어 보이고 그대로 지나쳐 가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희선이 말했다.
“손님을 마주쳤으면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현은 어이가 없었다. 뭐야, 저번에는 알아본 줄 알았는데?
“아줌마, 나 누군지 모르겠어요?”
희선은 입을 다문 채 아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겠다는 거야, 모르겠다는 거야? 답답해진 아현이 먼저 자신을 밝혔다.
“나 강아현이에요. 아성식품 강 사장님 댁 딸, 강아현이라고요.”
“오랜만이네요.”
그제야 희선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손님이고, 그쪽은 호텔 직원이잖아요. 그럼 인사는 해야지요.”
“뭐라고요?”
아현은 기가 막혔다. 어린아이인 자신에게 늘 아현 아가씨, 아현 아가씨, 하고 부르던 부엌데기 주제에, 뭐라고?
그때 레온의 비서가 헐레벌떡 희선의 뒤를 따라왔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산책을 나가시는 줄 모르고…….”
단번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비서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이 직원분 상급자 불러주세요.”
희선의 말에 아현은 그제야 당황했다.
비서의 연락을 받은 지배인이 당장 달려왔다. 희선은 그때까지도 아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차분하게 말했다.
“직원 교육이 잘못된 것 같네요. 이 직원분이 저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고, 저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는데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비서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했고, 지배인은 사색이 되었다.
이 아담하고 조용해 보이는 사모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웬만한 해외 귀빈들보다도 더한 스페셜 게스트였다.
어렵게 호텔로 모셔 온 분이니 한 점 불편함 없이 지내시게 하라고, 케네디 회장님께서 출장 가시기 전에 직접 컨시어지에 방문하셔서 귀가 닳도록 당부하셨다.
그런 분께 고객님도 아니고, 아줌마?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 직원이 아직 인턴이라 그만 실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제가 사모님 곁을 비운 탓입니다.”
지배인과 비서가 나란히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희선은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두 분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직접 해야지요.”
그러나 도저히 아현은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제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던 아줌마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사과드리지 않고 뭐해요?”
닦달을 해도 입만 꽁하니 다물고 있으니 지배인과 비서는 쌍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회장님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가는……!
그때, 조용한 복도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돌아보니 저만치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 한 무리가 한바탕 소음을 일으키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희선이 제 눈을 의심하는 순간, 맨 앞에 선 사람이 외쳤다.
“로즈!”
비서와 지배인이 놀라서 동시에 말했다.
“회장님?”
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희선이었다. 지금쯤 미국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여기?
“레온?”
단숨에 희선의 곁으로 달려온 레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당신, 왜 울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