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 위험한 상견례 (1) (117/181)


#117. 위험한 상견례 (1)
2022.11.11.



 


“레온?”

단숨에 희선의 곁으로 달려온 레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당신, 왜 울었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희선은 대답하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분명히 이 사람은 열여덟 시간 전에 통화했을 때도 미국에 있었는데!

희선에게서 대답을 얻지 못하자 레온은 이번에는 곁에 있던 사람들을 다그쳤다.


“누가 이 사람 울렸죠?”

물론 레온은 방금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지배인과 비서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약속이나 한 듯이 아현을 향했다.

아현의 명찰을 살펴본 레온이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가씨가 클로이였군. 대체 이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그는 당장 희선의 앞을 막아서며 다그쳤다. 회장에게 직접 추궁을 받은 인턴 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현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결국은 비서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했다.


“사모님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저어,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레온이 아름다운 입술을 비뚤어뜨리고 조소했다.


“대단한 가정교육이군. 우리 시현이가 그 집에서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그는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지배인을 향해 아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단 데려가서 똑바로 교육해요. 처분은 나중에 지시하죠.”

아현은 그대로 컨시어지 지배인에게 끌려가고, 희선은 레온에게 손목을 잡혀 객실로 올라갔다.


“레온, 대체 어떻게 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끌어 안겼다.


“…….”

품에 꼭 껴안고 작은 몸을 확인하듯 더듬어 보며, 레온은 그녀의 귓가에 떨리는 한숨을 불어넣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 그리웠어요.

미치도록 걱정했어요.

희선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완전히 몸을 맡겼다. 녹아드는 것처럼 따뜻하고도 아늑했다.

그가 없는 동안 이 커다란 호텔에서 작은 그녀는 마치 엄마 없는 아이 같았다.

그럴까 봐 그가 비서를 붙여주고, 직원들에게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도 사실은 그랬다. 넓은 품에 안기자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식을 지키겠다고 한껏 가시가 돋쳐 있었던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 안에서 잠시 소녀가 되었다.

한참 만에야 레온은 겨우 희선을 조금 떼어놓았다. 이미 눈물이 말라버린 지 한참인 눈동자를 안타까운 듯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울었어요, 당신.”

그 어떤 일보다도, 그녀가 울었던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희선은 알았다.


“레온.”

“듣고 있어요.”

“당신, 나 믿어요?”

레온이 희선의 손을 잡았다. 일찍 거칠어진 손등에 소중하게 입을 맞추고, 제 가슴에 손을 가져가서 심장이 있는 부위에 지그시 눌렀다.


“내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믿어요.”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희선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물론.”

“만약에 내가 사람을 죽였다면요?”

무서운 말을 듣고도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놈이 죽어도 싼 놈이었겠지요.”

희선은 느꼈다. 그 말 한마디로, 여태껏 살면서 당했던 모든 서러움이 다 눈 녹듯 스르르 사라져 가는 것을,

그러니까, 더는 울 필요가 없었다.

새롭게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고, 희선은 웃어 보였다.


“당신 혹시, 상견례가 뭔지 알아요?”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꺼내자 레온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한국에서, 결혼하기 전에 양쪽 집안이 만나는 거 말이에요?”

“잘 알고 있네요.”

“그런데 갑자기 상견례는 왜…….”

“당신, 미국에 언제 돌아가야 해요? 일 다 못 끝내고 왔을 거 아녜요.”

그가 잠시 손가락을 꼽아보고는 말했다.


“급한 일들은 일단 미뤄뒀지만……. 늦어도 일요일에는 다시 출발해야 해요.”

“그럼 빨리 연락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어디에?”

희선은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들 장가보내기 전에, 저쪽 집안하고 상견례는 해야지요.”

 

*

열흘에서 단 하루도 못 줄인다던 레온이, 출장 간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돌아왔다. 그것만도 놀랄 일인데, 돌아오자마자 꺼낸 얘기는 더욱더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네? 상견례요?”

시현은 크게 당황해서 레온과 희선을 번갈아 보았다.


“저 작은아버지 댁하고 연 끊은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널 키워 주신 분들이잖니. 결혼하기 전에 우리도 감사하다고 인사는 드려야지.”

희선에 이어 레온도 말했다.


“내가 한국어 공부할 때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거든. 그래서 언젠가 상견례라는 걸 해보는 게 로망이었단다. 자식이라고 태하 하나뿐인데, 이번에 안 하면 언제 또 해보겠니?”

시현은 등골에 식은땀이 다 났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엉뚱하게 상견례 얘기가 나오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 가족 분들 보면 괜히 이모 불편하실 거 아녜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불편할 게 뭐 있니, 다 지난 일인데. 나도 오랜만에 사장님이랑 사모님 뵙고 인사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래.”

“그래, 시현아. 그렇게 하자꾸나.”

두 분이 번갈아 말하는 데는 시현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일요일에는 미국에 다시 들어가야 하니까, 이번 주 토요일이었으면 좋겠구나.”

“한번 말씀은 드려볼게요.”

결국 고개를 끄덕여 놓고 나와서, 시현은 태하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아무래도 두 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은 작은아버지 댁과 연을 끊었고, 두 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견례를 밀어붙이다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한데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글쎄, 난 알 것도 같은데.”

태하가 말했다.


“어머니가 그 댁에서 일할 때 서러움 많이 당하셨다면서. 이제 나한테도 든든한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 아닐까?”

다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선은 뭐든 남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레온이나 태하가 잘났다고 자랑하기보다는, 도리어 부족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뒤로 숨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상견례를 한다? 글쎄, 희선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시현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자 태하는 다시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제 시현이는 우리 딸이라고 그쪽에다 딱 잘라 말하고 싶으신 거겠지.”

“그런 걸까?”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어쨌든 두 분이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니 시현도 그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현은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 오, 시현아! 이게 얼마만이냐? 응?

연 끊은 조카를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잠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작은아버지, 강재호는 상견례 얘기가 나오자마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야 천하의 케네디 회장이 사돈 대접을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거였다.


“저희 아버님이 일요일에는 미국에 가셔야 해서요.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 암, 당연히 우리가 맞춰야지!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목소리가 어찌나 들떠 있는지 전화 저편에서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 그렇지 않아도 조카 시집보내면서 아무것도 못 해주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날 만나서 혼수도 의논하자꾸나. 재벌가만큼이야 못 해주겠다만, 내가 힘닿는 대로 마련해주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조차도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살가운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참으로 애틋하게 키운 조카인 줄 알겠구나. 시현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혼수는 제가 알아서 마련했어요. 그럼 작은어머니께도 그렇게 전해주시고, 토요일에 봬요.”

전화를 끊은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작은어머니에게서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 너 이게 무슨 수작이야? 일요일 날 돈 주기로 해놓고 갑자기 토요일에 상견례라니?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부모님이 갑자기 하자고 하시는 걸 전들 어떡하겠어요.”

- 네가 시부모한테 얘기해서 무슨 수작 부린 거 아니고?

“그 얘기가 시부모님한테 들어가는 걸 막겠다고 제가 20억을 들였는데 뭐라고요?”

시현이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화란도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 하긴 그렇구나.

그러더니 들으라는 듯이 전화에 대고 비아냥거렸다.


- 그나저나 수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뻔뻔한 타입이네? 상견례 자리에서 자칫 옛날 얘기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시현은 당부했다.


“그러니까 말씀 조심하세요. 괜히 말실수 하시면 20억은커녕 20원도 못 드려요.”

- 알았어, 얘. 입 딱 다물고 있을 테니까, 넌 돈이나 준비해.

화란이 장담했다.

*

상견례 장소는 그랜드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공교롭게도 우진의 집안과 상견례를 했던 곳과 같은 장소였다. 이런 게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일까.

토요일 저녁, 두 집안이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이날을 위해 화란은 수천만 원어치 쇼핑을 했다.


‘그 여자가 내 기를 죽이려고, 아주 대단하게 차려 입고 오겠지?’

가정부 주제에 먼저 나서서 상견례를 하자고 제의한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이제 제가 더 대단한 집안 사모님이라고 과시하려는 거 아닌가.


‘옛날 일이 까발려질까 봐 무섭지도 않나?’

하긴 뭐, 오래된 일인데 증거 있느냐 싶겠지. 내가 여태 김 기사랑 연락이 되는 줄은 모를 테니까. 화란은 속으로 비웃었다.

어쨌든 질 수 없다는 생각에 화란은 옷은 물론 구두에 핸드백, 보석까지도 싹 다 최신상 명품으로 마련했다.

구두쇠 같은 남편이 돈줄을 꽉 죄고 있어서, 여기저기 돈까지 빌려야 했지만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야 내일이면 20억이 들어올 텐데.

그런데 정작 만나 보니 희선은 더없이 단정하고 간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에 블랙 펜슬 스커트. 새하얀 블라우스의 목깃 위로 드러난 긴 목선은 그지없이 우아해 보였고, 날씬한 몸매의 굴곡을 드러내는 스커트는 한층 더 키가 커 보이게 했다.

오히려 작정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티가 나는 화란이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희선이 백조 같다면, 화란은 공작새처럼 보이기 위해 갖은 새의 깃털을 다 주워다 꽂은 까마귀 같았다. 화란은 양쪽에 커다란 보석 반지를 낀 손을 저도 모르게 뒤로 감췄다.

희선의 몸에 걸친 액세서리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만 한 크기의 투명한 귀걸이뿐이었다.


‘저거 설마 진짠가?’

보통 저 정도 사이즈쯤 되면 진짜 다이아몬드라고 당연히 생각을 안 할 텐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케네디 회장의 존재가 차마 가짜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 저 남자.

저 여자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옷도, 가방도, 보석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남자였다. 자기 여자를 위해서 의자를 빼주는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저 남자.

자신의 옆에 있는 배 나온 늙은 남자와는 전혀 다른, 젊고 매력적인 신사.

질투를 감추느라, 화란은 일부러 더 반가운 듯이 굴었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에요? 수연 씨는 어쩜 그대로네.”

“그건 옛날에 잠시 쓰던 이름이고, 원래 제 이름은 정희선이랍니다.”

희선이 잔잔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화란 씨도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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