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가족 (120/181)


#120. 가족
2022.11.22.



“그냥,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요.”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서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법정싸움이고 뭐고, 더는 얽히는 것 자체가 싫다. 그게 시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레온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태 우리 귀한 시현이 키워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 댁에서 나온 돈으로 시현이가 제 아들을 키운 것도 사실이니, 아까 약속한 사업상 도움은 확실하게 드리도록 하지요.”

“…….”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시현이는 댁의 조카도,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시현이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차후 어떤 이유로라도 시현이에게 연락하거나 접근할 시에는, 그 즉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레온은 아시겠습니까, 하듯 엄한 눈으로 작은아버지 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호는 대답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마치 더 이상은 1초도 화란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여보. 아현 아빠.”

그대로 자리를 떠나는 재호의 뒤를, 화란이 황급히 일어나서 뒤쫓아 나갔다.


“잠깐만요. 아현 아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필사적으로 재호를 쫓아가던 화란이, 그만 발을 헛디뎌 크게 넘어졌다.

하필이면 다른 테이블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테이블이 쓰러져서 접시와 와인 잔이 이리저리 날아가고 깨지며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악!”

그러나 재호는 끝까지 화란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

작은아버지 부부가 나가고 나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는 시현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희선이었다.


“우리 딸.”

희선이 시현을 끌어당겨 감싸듯 품에 안았다.


“우리한테도, 태하한테도 말 못 하고 여태 혼자서 힘들었지? 못난 나 때문에…….”

시현의 등을 쓰다듬는 손이 조용한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엄마가 절대 못나게 살지 않을 거야. 반드시 강해져서 우리 시현이, 우리 태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사실 아까 시현은 내내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화란 씨도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시현이가 철이 없다니요?]

희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란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할 말을 다 했다.

옛날, 화란의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던 그 희선이 아니었다.

시현 역시 오랫동안 똑같이 화란을 무서워해 온 입장이라 더욱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무리 이제는 더 이상 가정부가 아니게 됐다고 해도, 어떻게 하루아침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 작은어머니 얘기만 들어도 그렇게 무서워하던 분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희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용기를 냈다는 것을.

혼이 나고 방에 들어와서 훌쩍훌쩍 울던 시현을, 말없이 품에 안고 토닥여주던 젊은 가정부가 떠올랐다. 그때 시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한테도 이런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끝내 부르지 못했던 한마디를, 시현은 처음으로 불러보았다.


“……엄마.”

“그래, 우리 딸.”

희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서로 껴안고 있는 모녀를 한참 바라보다, 곁에서 레온이 말했다.


“자, 아버지도 한번 안아보게 해주어야지요?”

그제야 희선이 팔을 풀고 물러났다. 이어서 레온이 시현을 품에 안았다.


“앞으로는 뭐든지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렴.”

등을 토닥이며 레온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고 있는 희선을 향해, 이번에는 태하가 팔을 뻗었다.


“어머니.”

아들은 조용히 어머니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하셨어요.”

내가 당신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는 듯, 깊은 슬픔이 배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바람에 희선은 스스로 당황했다.


“아니야, 엄마는 괜찮아. 다 지난 일인걸.”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그녀는 백번 천번 결심했었다. 이제는 절대 바보처럼 울지 않겠다고.

그래서 레온에게 미리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들의 품에 안기자마자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되어버리는 건지.


“시현이가 힘들었지,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로…….”

자칫하면 아들이 입고 있는 고급 슈트를 망쳐 놓을까 봐 희선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태하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더욱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결국 눈물은 닦을 겨를도 없이 아들의 넓은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젠 제가 있어요. 어머니가 이렇게 커다랗게 낳아주셨잖아요.”

“…….”

“그러니까 마음 놓고 기대셔도 괜찮아요.”

결국 희선은 태하의 가슴에 허물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아기.

말은 배웠을까. 키는 얼마나 컸을까, 걸음마는 뗐을까.

언제나 가슴이 저미도록 그리웠던 내 작은 아기.

그 아이가 이렇게 커다란 나무처럼 자라서, 이제는 제게 기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태하야……!”

아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희선은 그간의 서러움을 다 토해내듯 목 놓아 울었다. 저만치서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자, 이제 이리 와요, 로즈.”

희선의 울음이 잦아들 때쯤, 레온이 그녀의 팔을 잡아서 부드럽게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태하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오래 안고 있으면 아버지가 질투 나잖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선은 시현을 향하고 있었다. 어서 데려가서 안아주렴, 하듯이.

그제야 태하는 시현의 손을 잡고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어머니, 오늘 저는 나가서 자고 오겠습니다. 아버지, 내일 미국 조심해서 다녀오시고요. 그럼 다녀오신 후에 뵙겠습니다.”

그대로 태하는 시현을 데리고 돌아섰다.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선은 눈물을 훔쳤다.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내가 눈치도 없이 계속 태하 붙들고 있을 뻔했네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사건으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시현이다. 시현에게 위로해줄 짝이 있다는 게 기뻤다.

아무리 부모가 예뻐해도 짝이 보듬어주는 것만 할까. 그 짝이라는 게 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또한 기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왠지 부아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죠? 난 정말 질투가 나서 한 말인데.”

희선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들과 꼭 닮은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서운한 빛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내 앞에서는 조금도 안 울더니 우리 아들한테 안기니까 어쩜 그렇게 서럽게 울어요?”

희선에게 처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레온은 눈이 붓도록 울었다.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죠?]

그러나 희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우리 시현이가 나를 지키려고 협박을 당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울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레온은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내가 해결할게요.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요.]

희선이 불편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게 싫었다. 굳이 아픈 과거를 제 입으로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당사자는 나예요. 진실을 아는 것도 나뿐이고요. 그러니까 그 여자 앞에서, 내 입으로 직접 이야기할 거예요.]

하지만 희선은 강경했다.


[내 자식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그 말대로 했다.


“나한테는 하나도 의지하지 않고, 눈물 한 방울 보여주지 않고. 당신은 우리 아들만 좋아하는 거죠?”

서운해하는 레온을 보고, 희선은 뒤늦게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사람이 출장도 도중에 내팽개치고 미국에서 달려와 주지 않았으면,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용기 내지 못했을 텐데.


“미안해요, 레온. 난 그러려던 게 아니고…….”

“농담인데.”

다음 순간. 레온이 팔을 벌려 희선을 와락 껴안으며 속삭였다.


“잘 싸웠어요, 내 사랑.”

“놀랐잖아요!”

품에 안긴 작은 몸이 뒤늦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당장 키스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저만치서 지켜보고 있는 서버들이 있었다.


“나,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데.”

귓가에 속삭여주고, 레온은 조금 성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도 이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갈까요?”

 

*

레스토랑에서 내려오자마자 태하는 프런트로 향했다.

토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없는 방도 만들어서 체크인할 수 있는 것이 오너 아들의 위엄이었다.

비록 평소에 지내던 스위트룸이 아니라 그냥 디럭스 룸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그냥 어디든 단둘이 있을 수만 있으면 족했다.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태하는 그녀를 꼭 껴안고 뺨을 비볐다.


“그랬던 거야?”

“잠……!”

기겁해서 도망가려는 작은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두 손으로 꼭 감싸고 입맞춤을 퍼부었다.


“내 어머니를 지키려고? 응? 그랬어?”

[나 그 돈이 왜 필요한지, 너한테 말 못 해.]

제게 무슨 일이라고 말도 못 하고 그녀가 울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귀하기로 말하자면 물론 어머니도 귀하디귀한 분이었다.

하지만 둘을 저울에 올려놓자면 역시나 시현 쪽으로 기울었다. 젊어서 자신을 낳고 그 때문에 모진 고생을 해온 어머니에게는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도,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선택하라면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선택할 테니까. 원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귀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지키느라 죽도록 마음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네 시어머니 될 사람이 과거에 운전기사의 아이를 가졌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이 얘기를 저한테 폭로하겠다……고 한 모양이던데요.]

아까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의 입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는, 정말이지 벌떡 일어나서 늙은 여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상대가 연장자라서도, 시현의 작은어머니라서도 아니었다.

제 어머니가 그 여자의 숨통을 직접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오늘 밤, 철저하게 짓밟혔다. 아들인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하고 약속해.”

태하는 시현을 껴안고 애원하듯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라도 지키지 마. 그게 나라도, 내 부모라도.”

자식이라도, 하는 말은 너무 불길해서 차마 입 밖에 내지 않고 삼켜버렸지만 심정만은 사실이었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시현이 그녀 자신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으면 했다.


“상대가 누가 됐든 당신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 알았어?”

“……알았어.”

기어이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야 태하는 시현을 안았던 팔을 풀었다. 침대에 앉히고 좀 쉬어, 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껴안고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며칠 동안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은 끝이니 우선은 푹 쉬게 해주고 싶었다.


“배고프지 않아? 아까 식사 제대로 못 했잖아.”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하는 신경을 분산시킬 겸, 그는 룸서비스 메뉴를 찾아 뒤적였다.


“그런데 있잖아.”

침대에 걸터앉은 시현이 불쑥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래도, 태하 네가 나보다 좀 더 소중한데…….”

태하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정당방위다.


“……난 참으려고 했어.”

“응? 뭘?”

의아하게 묻던 시현의 눈동자가, 덮쳐 오는 커다란 그림자에 물들어 커다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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