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 동상이몽 (121/181)


#121. 동상이몽
2022.11.25.



“아현 아빠!”

발을 쿵쿵 울리며 집으로 들어오는 재호의 뒤를, 화란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따라 들어왔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크게 넘어진 탓에, 새로 산 옷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비싼 귀걸이도 어디로 갔는지 한쪽이 달아나 있었다.

머리까지 산발이 되는 바람에 반쯤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화란이 씩씩거리며 재호를 향해 외쳤다.


“당신 설마, 그 여자 말을 믿는 거예요?”

“그럼 안사돈이 없는 말을 지어냈단 말이야?”

재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럼 내가 지어냈다는 거예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당신?”

“거짓말은 나한테 했겠지! 뭐, 고향에서 아는 동생이 놀고 있으니까 취직 좀 시켜달라고? 솔직히 말해봐, 당신 처음부터 그놈이랑 그런 사이였던 거야?”

무서운 표정으로 윽박지르는 재호에게, 화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그런 사이였으면 내가 그때 김 기사를 그 여자랑 같이 안 잘랐겠지! 그게 벌써 십몇 년 전 일인데, 지금은 어디서 사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지고 나더러 뭘 어쩌라고!”

바락바락 대들던 화란이, 태도를 바꾸어 애원하듯 재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당신 진짜 모르겠어요? 그 여자, 그 회장이랑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 아니잖아. 자기 과거가 들통나면 결혼 못 할까 봐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잖아요! 그 회장, 재산이 얼만데!”

그제야 재호가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당신은 어떻게 삼십 년 넘게 살 비비고 산 마누라를 못 믿고 생판 남의 말을 믿어요?”

화란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한테 시집와서, 시조카까지 키우면서 살다가 다 늙어서 가정부 따위한테 이런 모함까지 당하고…… 내가 못 살아, 억울해서 못 살아!”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에, 재호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 슬그머니 화란을 믿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지난 일,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해 봐야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뿐이니까.

하지만 화란을 믿는다 해도, 시현을 협박한 일만은 명확히 선을 넘은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카한테 협박이라니, 그건 당신이 잘못했잖아!”

눈물 때문에 마스카라 범벅이 된 눈으로, 화란이 재호를 노려보았다.


“협박은 누가 협박을 했다고 그래요? 당신도 들었잖아요! 시현이 그 계집애가, 키워준 은혜는 언젠가 갚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던 거! 정 그러면 시집가기 전에 성의 표시는 하고 가라고 했던 거지, 그게 무슨 협박이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무슨 놈의 성의 표시를 20억씩 하라고 해!”

그러나 화란은 굽히지 않고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내가 20억 내놓으라고 했어요! 시현이 저 계집애 키우느라 날려 버린 내 청춘은? 당신이 죽어도 조카딸 먼저 시집보내야 한다고 우겨서 날려 버린 우리 아현이 시간은? 그게 그까짓 20억 어치도 안 된단 말이에요?”

재호가 움찔했다.


“벌써 올해도 다 갔어. 해 바뀌면 아현이도 벌써 스물아홉이야, 서른이 다 됐다고! 시현이 때문에 날려 버린 우리 모녀 귀한 시간,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다고!”

화란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어쩌다 그 꽃다운 나이에 저런 인간한테 시집을 와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우는 아내를 한참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재호는 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아현이 놀란 표정으로 들어왔다.


“뭐야. 엄마? 아빠 왜 저렇게 화가 났어?”

눈물범벅이 된 화란의 얼굴을 보고 아현은 더욱더 놀랐다.


“엄만 또 왜 우는데? 오늘 상견례 한다고 했잖아. 무슨 일 있었어?”

화란은 눈물 어린 눈으로 딸을 노려보았다. 팔을 붙잡아서 주먹으로 다짜고짜 등짝을 후려치자 아현이 비명을 질렀다.


“악!”

“너 누가 엄마 얼굴에 먹칠하래? 응?”

불시에 얻어맞은 아현은 영문을 몰랐다.


“아 갑자기 왜 사람을 때리고 난린데! 악! 아프다고!”

“너 그 호텔에서 일한다며? 어디 일할 데가 없어서 하필 그 호텔로 기어들어가냔 말이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를 악물고 딸의 등짝을 두들겨 패던 화란이 제풀에 지쳐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유, 내가 분해서 못 살아!”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냐고!”

화란은 울음을 섞어 가며 상견례에서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물론 시현을 협박했던 일은 쏙 빼놓고, 대신에 자신을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이 미친 여자가 감히, 우리 엄마를 모함해……?”

아현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현은 며칠 전 희선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던 사건 때문에 지배인에게 된통 깨진 끝에 해고 통보까지 받은 참이었다.


[클로이 당신,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사모님한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해!]

지배인은 부들부들 떨다 못해 뒷목을 잡았다.


[인턴이고 뭐고 이번 주가 끝이야. 회장님 직접 지시니까, 그렇게 알고 짐이나 싸요.]

그런 마당에 엄마가 우는 것까지 보니 그야말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아현아, 엄마가 가슴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아. 내가 그것들 잘 먹고 잘사는 꼴을 보고 어떻게 살아? 나 억울해서 못 살아……!”

화란은 딸의 품에서 철없이 어린 양을 부리며 흐느껴 울었다.


“울지 마, 엄마.”

아현이 이를 갈았다.


“두고 봐. 그것들 눈에는 반드시 피눈물 나게 될 테니까.”

 

 

*

상견례 다음 날 아침 일찍 레온은 다시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번에는 일주일 예정이었다.


[로즈, 당신도 같이 갈래요? 미국 가보고 싶지 않아요?]

[무슨 소리예요? 난 비자는커녕 여권도 없어요!]

가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는 남자를 등 떠밀어 보내느라 이번에도 희선은 한바탕 진땀을 뺐다.

주말이라 카레 가게는 쉬는 날이었다. 공항에서 레온을 배웅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온 희선은 객실 앞 복도에서 아현을 딱 마주쳤다.

외면하고 지나치려 하는데, 아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는 제가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는 ‘아줌마, 나 누군지 몰라요?’ 하면서 아주 기세등등하더니 오늘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가 싶어서 희선은 일단 아현의 표정을 살폈다.


“제가 오늘까지만 근무하고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전에 꼭 사과는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현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부모님들끼리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저희 엄마 때문에 사모님께서 그런 고통을 겪으셨는지,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희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제 일이 아현의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하기야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딸이 눈치를 못 채기도 힘든 일이긴 했다. 그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까칠하게 메마른 입술을 보니 희선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처음 희선이 아현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아현은 겨우 네 살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현은 까르르 잘 웃는, 귀여운 어린아이였다. 자라면서 점점 제 엄마의 성품을 닮아갔을 뿐.

구박당하는 시현을 품느라 어쩔 수 없이 아현은 뒷전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아현 역시 제 눈으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였다. 제 손으로 떠먹인 밥이 얼마인데 왜 애틋한 마음이 없겠는가.

이제라도 지난 일에 대해 진실을 밝힌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화란은 그만한 잘못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에 아무 책임이 없는 아현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된 것 같아 희선은 영 입맛이 씁쓸했다. 자식이 굳이 엄마의 부정을 알 필요는 없는 것인데.


“인턴이라고 들었는데, 기간이 끝나서 나가는 건가요?”

그렇게 묻는 희선의 목소리도 지난번보다는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아뇨.”

아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사모님께 무례를 저질렀던 것 때문에 케네디 회장님께서 많이 화가 나셨다고 합니다. 호텔리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희선은 한숨을 지었다. 하기야 자신이 모욕을 당했는데 레온이 가만히 있을 리 없는 거였다.


“원래는 얼마나 남았죠?”

“앞으로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됐어요, 그럼. 나 때문에 그만둘 필요 없으니까 남은 기간은 채우도록 하세요.”

“하지만 회장님께서…….”

“그이에게는 내가 이야기할 테니 걱정 말아요.”

희선은 잘라 말했다. 레온에게 부탁하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래도 결국은 들어줄 거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아현이 태하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걸 알았다면 오히려 희선이 먼저 나서서 내보냈을 테지만, 희선은 그 일에 대해서는 여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는 희선이 아현의 집안 얘기만 나와도 스트레스를 받던 때라, 시현과 태하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모님…….”

아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희선을 바라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아현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다, 희선은 물었다.


“아현 씨, 올해 나이가 몇이었죠?”

“스물여덟입니다.”

그렇다면 태하와 겨우 두 살 차이였다.

희선은 자랄수록 점점 제 엄마를 닮아 가는 아현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 타고난 천성은 나쁜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릴 때 아현 씨는 무척 밝고 착한 아이였어요. 아직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나이니까, 부디 마음을 곱게 썼으면 좋겠어요.”

제 자식을 타이르는 마음으로, 희선은 말했다.


“예, 사모님. 명심하겠습니다.”

아현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는 뒷모습을, 희선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중간에 잠깐 돌아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난 레온은,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출장을 마치고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레온이 돌아오기 전날, 희선은 아침부터 방을 옮길 준비를 했다. 레온이 돌아오면 원래대로 태하와 레온이 한방을 쓰고, 희선은 그 옆방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잘 다녀오렴.”

출근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아들의 넓은 어깨를, 희선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며칠이라도 너하고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엄마는 무척 행복했단다.”

레온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 희선은 태하와 같은 객실에 머물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밤중에 룸서비스로 치킨도 시켜 먹고, 나란히 앉아서 TV도 보고, 잠이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오래오래 이야기도 나눴다.

이제 아들은 얼마 후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니 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둘만의 시간인 셈이었다.

서운해 하는 희선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태하는 위로하듯 말했다.


“아버지 오셔도 바로 옆방에서 지내실 텐데요, 뭐.”

대답 대신 미소로 아들을 배웅하고 나서, 희선은 비서와 컨시어지 지배인을 불러들였다.


“예?”

희선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나란히 펄쩍 뛰었다.


“그냥 침대 하나 놓인, 제일 작은 방이면 돼요. 비싼 방은 제가 지불하기 힘들어서요.”

레온이 희선을 위해 준비한 옆방은 이 방과 똑같은 구조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수백만 원에 달한다는 것을 듣고, 이미 호텔로 옮긴 첫날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레온이 돌아올 때까지만 태하와 함께 여기서 지내고, 그가 돌아오면 자신은 그냥 평범한 방으로 옮겨야겠다고.


“제가 그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그만큼 손님을 못 받아서 호텔에 손해를 끼치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비서가 울상을 했다.


“사모님, 회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 제 입장도 부디 생각을 해주십시오.”

“보고 드리지 마세요. 회장님 돌아오시면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희선은 고개를 돌려 지배인에게 물었다.


“혹시 장기 숙박하면 좀 할인해준다든가, 그런 거 없을까요? 옛날에 한동안 여관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게 있었거든요.”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사모님…….”

“그러면 좀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희선은 하루아침에 스탠더드 룸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무리 스탠더드 룸이라 해도 그랜드호텔은 엄연히 5성급 호텔이다. 도저히 일정 수준 이하로는 할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호텔 측에서는 머리를 짜낸 끝에 3명 한정으로 특별 플랜까지 마련했다.

- 그랜드호텔, 파격 한달살이 플랜 선봬…… 하루에 10만 원꼴

인터넷 기사까지 뜬 것은, 사실 프로모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한 손님을 위해서였다.

*

그 시각, 레온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행복한 상상에 젖어 있었다.

희선이 지내게 될 객실을, 온통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로 꾸며 두라고 지시했다. 그러기 위해서 플로리스트를 몇 명이든 고용하라고도.


‘세상에, 레온. 방이 너무 예뻐요!’

그 방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마중 나오지 말고 그냥 객실에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지금쯤 그녀가 방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고 있을까. 그 얼굴을 빨리 보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레온은 비서를 재촉했다.


“가서 기장한테 전해요. 좀 더 속도 높여보라고.”

잠시 후 맞닥뜨리게 될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