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플랜 B (123/181)


#123. 플랜 B
2022.12.02.



 


“다녀왔습니다.”

터덜터덜 힘없이 들어오는 우진의 얼굴을, 다짜고짜 묵직한 무언가가 날아와서 강타했다.


“억!”

얼굴을 감싸 쥐는 우진을 향해, 어머니인 정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알 한다, 자알 해. 날이면 날마다 고소장이나 받고, 아주 자알 하는 짓이다!”

우진은 가슴이 철렁해서 현관에 뒹구는 누런 서류봉투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어딘데?”

이미 우진은 보라에게서, 그리고 보라의 결혼식이 열렸던 호텔로부터 각각 소송을 당한 상태였다.


“한영그룹이다, 이 미친놈아!”

정임이 소리를 빽 지르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러댔다.


“도대체가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월급쟁이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다가 신문사랑 대기업 혼사를 망쳐놔, 망쳐 놓기를, 응? 남의 혼사 훼방 놔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대기업의 영향력은 무시무시했다. 이미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우진의 작은형이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저 먼 지방에 있는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해당 회사가 바로 보라의 결혼 상대였던 한영그룹 계열사였다.

동네에서 오랫동안 안경점을 하고 있는 우진의 아버지도 얼마 전 갑자기 건물주로부터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압력을 받았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영그룹에서 직접 고소를 해온 것이다.


“너 때문에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어, 이놈아!”

“아 그만 좀 해, 나도 미치겠다고!”

우진은 제 엄마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분명 보라의 결혼식 때 내보낸 영상에는 제 얼굴과 목소리는 다 잘라 놓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회사에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음험한 인간이네.]

[어디 무서워서 같이 일하겠나, 원.]

이제는 우진과 밥 한 끼 같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공기업이라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지만, 이러다가는 인사고과에도 영향이 갈 게 뻔했다.


“내가 전화로 법률 상담 받아보니까, 명예훼손 벌금 물고 나면 민사로 위자료 소송 들어올 거라더라. 자칫하면 그 결혼식에 들어간 돈을 네가 물어줘야 한다는데 대체 어떡할 거야? 응? 변호사는 또 무슨 돈으로 살 거고?”

정임의 닦달에 우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꼭지에 피가 몰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는 신경 꺼.”

“네가 무슨 수로 알아서 할 건데!”

“아, 어떻게든 내가 마련한다고!”

소리를 꽥 지르고, 우진은 방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챙겨 다시 집을 나왔다.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내뱉듯 말했다.


“그랜드호텔이요.”

우진은 태하와 시현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시현 눈앞에 나타나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때, 윤태하는 시현의 앞을 막아서고 말했었다.


[할 말이 있거든 그랜드호텔로 날 찾아와. 언제든 상대해줄 테니까.]

 

*

그랜드호텔에 도착한 우진은 곧바로 프런트로 향했다.


“여기 윤태하라고 있습니까? 김우진이 왔다고 하면 알 겁니다만.”

혹시 쫓겨나면 어쩌나, 하고 긴장했는데 윤태하는 자기 입으로 했던 말은 지키는 놈이었다. 직원이 어디론가 연락해 보고는 우진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뒤를 따라가며 우진은 입술을 비뚤어뜨렸다. 하기야 안 만나주면 내가 강시현한테 연락할 게 뻔한데, 제가 안 나오고 배겨?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멋진 스위트룸이었다. 우진은 넓디넓은 응접실을 둘러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부모 잘 만난 놈이 좋긴 좋네. 설마 이 방을 너 혼자 쓰는 거냐?”

“용건이 뭐지?”

태하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우진은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목도리도마뱀처럼 한껏 허세를 부렸다.


“손님이 왔으면 일단 술 한 잔은 내놔야 하는 거 아니냐?”

태하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마주 앉아서 술잔 기울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자 저만치 위스키 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바가 보였다. 멋대로 술병을 집어 와서 잔도 없이 병째 벌컥벌컥 들이켜자 태하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독한 위스키에 금세 머리가 띵했다.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자 태하가 다가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우진은 손등으로 입술을 쓱 훔치며 중얼거렸다.


“네 녀석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어.”

태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자업자득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네가 아니었으면 이보라 그년이 처음부터 나한테 꼬리를 안 쳤을 거 아니야.”

“그래서 뭐?”

일견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태하는 우진이 하는 말을 무시해버리지 않고 하나하나 받아주고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우진은 가방을 열어 가져온 것을 꺼냈다. 사실은 이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서 여태 센 척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거, 네가 사라.”

시현과 촬영했던 웨딩앨범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앨범을 열어본 태하가 맨 앞장에 실린 드레스 입은 시현의 사진을 보고 금세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가 원본이랑 영상파일까지 싹 껴서 줄게.”

“…….”

“많이 달라고는 안 해. 딱 1억만 부탁한다.”

우진은 태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보라 결혼식 망친 것 때문에 벌써 소송 걸린 것만 몇 건이야. 아버지는 평생 하시던 가게도 접어야 할 판이고, 엄마는 스트레스 받으셔서 안 아프신 데가 없다. 소송비용에라도 좀 보태고 싶어서 그래.”

태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우진을 바라보았다.


“나 절대 너 협박하는 거 아니다. 이제 시현이 네 여자인 거, 나도 인정해.”

“…….”

“네 여자 결혼사진, 남이 갖고 있는 거 너도 싫잖아. 그러니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한테서 사가라, 이 말이야.”

이윽고 태하가 기가 막힌 듯이 피식거렸다.


“남자 대 남자로, 한 대쯤은 맞아주려고 올라오라고 했더니……. 정말 바닥까지 떨어졌군그래.”

우진은 몰래 이를 악물었다.

새파랗게 어린 놈 앞에서 머리까지 조아리며 구걸을 하고 있는데, 왜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죽도록 얻어맞더라도 말마따나 남자 대 남자로 한판 붙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저놈의 멱살을 잡는다고 시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라도 살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는 자존심을 감추고, 우진은 애원했다.


“넌 다 가졌잖아. 곧 시현이랑 결혼도 하잖아. 한번만 도와줘라.”

웨딩 앨범을 바라보는 태하의 얼굴이 착잡함에 물들었다. 이걸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

한참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어디선가 작게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 본 태하가 곤란한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단 기다려.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태하가 몸을 일으켜 객실을 나갔다.

우진은 목이 타서 또다시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벌컥벌컥 마셔 버리는데,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뭐야, 정전이야?”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판에, 한층 더 겁이 나서 우진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전기는 다시 들어오지 않고, 방 주인도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간이 쪼그라들어서, 우진은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이 새끼는 사람을 앉혀 두고 대체 어딜 간 거야?”

욕설을 내뱉으며 더듬더듬 문 쪽으로 향하는데,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깥 유리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에 힘입어 상대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였다.

커다란 남자와는 전혀 다른, 날씬한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우진은 놀라서 불렀다.


“시현…… 읍.”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드러운 것이 우진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날씬한 몸이 품에 와락 안겨 오며, 동시에 익숙한 향기가 가슴 깊이 밀려들었다. 시현이 예전에 늘 쓰던 향수였다.

너무 놀라서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아. 시현이가 나를 그놈인 줄 아는구나!’

짧은 순간, 우진은 고뇌했다.

잘하면 윤태하 녀석이 돈을 해줄 것도 같은 눈치인데, 이러고 있다가 들키면 말짱 헛것 아닌가.

그러나 뒤이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후에 녀석이 돌아와서, 제 침대 위에서 시현이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본다면……?’

경악과 배신감에 물든 태하의 표정을 상상한 순간,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우진은 마음을 결정했다.

어차피 이건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다고 시현이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뒤는 어찌 되어도 좋다. 윤태하 그놈의 그 잘난 얼굴에, 단 한순간이라도 낭패한 기색이 어리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우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는 말 한마디 없이 뜨겁게 키스하고 있었다. 애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침대로 가자고 유혹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이 키스가 사실은 자신이 아닌 그놈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날카로운 질투가 우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윤태하에 대한 복수심은 어느덧 엷어지고, 시현에 대한 미련과 질투심이 온전히 우진을 지배했다.

네 결혼이 깨지면 좋겠다.

네가 그놈 얼굴도 못 쳐다보게 되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네가 다시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면 좋겠다.


‘네 탓이야. 날 버린 네 탓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우진은 말없이 여자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마주 키스하면서 침실로 향했다.

*

누군가가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이! 클로이!”

이어서 어깨를 난폭하게 흔드는 바람에 아현은 겨우 실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가차없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요?”

지옥에서 온 사신 같은 표정을 한 매니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잠이 확 달아났다.

아현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시트를 끌어당겼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다행히 남자는 등을 돌린 채 아직 잠들어 있었다.


“미쳤어요? 객실에 멋대로 들어와서 뭐 하는 짓이에요?”

남자를 깨우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항의하자 매니저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지금, 누가 할 말을……!”

하지만 아현은 떳떳했다. 객실에서 객실 주인이랑 잤는데 뭐 문제 있나?

물론 호텔리어로서야 실격이겠지만 애초에 호텔리어가 목표가 아니었으니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인턴십 따위 오늘로 때려치울 거고.

남자는 곧 눈을 뜰 것이다. 그가 자신을 확인하고 놀라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현은 다시 한번 매니저에게 나가라고 눈을 치켜떴다.


“일어났거든 이만 나가죠.”

그 순간 어디선가 느긋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호텔이라, 경찰까지 부르고 싶진 않은데.”

아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저만치 침실 입구에서, 옷을 완벽히 차려입은 태하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 남잔, 누구……?’

아현은 삐걱대는 고개를 겨우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잠든 남자가 이쪽으로 돌아눕는 순간, 아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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