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딱 어울리네,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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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딱 어울리네,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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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딱 어울리네, 둘이.
2022.12.06.
윤태하와 첫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나갔던 자리에서 시현에게 뺨을 맞은 그날 이후.
여태 아현은 풀숲에 도사린 독사처럼 잔뜩 몸을 낮춘 채로 때를 기다려 왔다.
문제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윤태하는 계속 본인의 부친, 혹은 모친과 함께 객실을 사용했기 때문에 혼자 남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케네디 회장이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날 밤, 드디어 때는 왔다.
이날 케네디 회장은 아들의 어머니와 함께 다른 객실에 묵는 바람에, 아들인 윤태하는 처음으로 객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아현은 재빨리 움직였다. 먼저 유니폼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현이 옛날부터 즐겨 쓰던 향수를 몸에 뿌렸다.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배전실 열쇠를 훔쳐 윤태하가 있는 객실의 전력을 복도부터 차단시켜 버린 후, 재빨리 마스터키를 가지고 객실로 향했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치 맞이하듯 남자가 바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시현…… 읍.”
그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나오기 전에, 아현은 온몸으로 남자의 품에 안기며 입을 맞췄다. 꿈에서도 그렸던 입술에서는 달콤한 맛 대신에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초저녁부터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먹었어?’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제발 알코올이 그의 판단력을 흐려 놨기를 빌면서 아현은 뜨겁게 키스했다.
“…….”
잠시 후, 남자가 마주 입 맞추며 그녀의 허리에 마주 팔을 감았다.
*
그 시각.
“뭐? 누가 와 있다고?”
호텔 로비에서 태하를 만난 시현은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김우진. 여기저기 소송을 많이 당해서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우진이 웨딩앨범을 팔러 왔다는 말을 듣고 시현은 한참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인간과 결혼까지 갈 뻔했다는 게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데?”
“내 방에. 잠깐 전화 받고 오겠다고, 기다리라고 했어.”
시현은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오늘은 태하가 방에 혼자 남는다고 해서 호텔에 놀러 온 건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올라가자.”
시현은 당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잠깐, 일단 진정해.”
“그거 내 사진이야. 제가 뭔데 그걸 돈을 받고 팔아? 심지어 1억? 미친 거 아냐?”
어차피 웨딩앨범 같은 거, 결혼하면 펼쳐 보지도 않는다면서 무조건 싼 데서 하자고 우진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게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어차피 그때는 이미 결혼 준비 따위 아무 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하자는 대로 따랐는데, 이제 와서 그 물건을 내 남편 될 사람에게 팔러 오기까지 했다니. 시현은 치를 떨었다.
“굳이 얼굴 볼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게.”
태하가 말리려 했지만 시현은 듣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됐어, 내 일이야. 내 손으로 직접 찢어버릴 거야!”
씩씩거리며 올라갔는데 왠지 객실 앞 복도부터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문을 열어봐도 안쪽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정전인가?”
당장 뛰쳐 들어가려는 시현을, 태하가 제지했다.
“일단 당신은 여기 있어. 혹시 몰라.”
시현은 복도에서 기다렸다. 휴대전화의 랜턴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던 태하는, 금세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 인간은?”
“그게……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
태하는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까 멋대로 술 꺼내서 마셨다고 했잖아. 그새 취해서 잠든 모양이야.”
시현은 한층 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미친 인간이, 남의 방에서 잠까지 퍼질러 잔단 말이야?”
팔까지 걷어붙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태하가 황급히 제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냥 자게 놔둬.”
시현은 대체 태하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무슨 소리야, 당장 깨워서 쫓아내야지!”
“안됐잖아. 자기도 얼마나 막막하고 속상하면 저러겠어.”
시현은 기가 막혀서 랜턴 불빛에 비친 태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행동 하나하나가 태하답지 않았다.
“너 대체 왜 그래? 지금 저 인간 편 들어주는 거야?”
“승자로서의 여유랄까.”
어둠 속에서, 태하가 손을 뻗어 시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이렇게 예쁜 강시현을 나한테 뺏기고, 저놈 속은 오죽하겠나 싶은 거지.”
“너 진짜……!”
화가 난 가운데서도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게 우스워서 시현은 풋, 하고 웃어버렸다. 태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현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그냥 자라고 놔두고, 우리는 다른 방에 가서 자자. 응?”
*
“꺄아아악!”
아현은 비명을 지르며 시트를 둘둘 만 채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당신 대체 뭐야! 이, 이 사람은 또 뭐고?”
분명 제 옆에 있어야 할 태하는 멀쩡히 옷을 입고 있고, 대신에 다른 남자가 누워 있다니.
태하가 아침에 저보다 먼저 눈을 떠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아현은 태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남자가 비열하게!”
태하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처제.”
“당신 어젯밤에 나랑 같이 있었잖아! 그래 놓고 다른 남자를 데려와서 내 옆에 눕혀?”
아현의 말에 펄쩍 뛴 것은 태하가 아닌 매니저였다.
“무슨 소리예요? 윤 대표님 어젯밤에 다른 객실에 체크인 하셨는데!”
“뭐라고요?”
“윤 대표님은 이 방에서 주무신 적도 없다고요. 아침에 돌아오셔서 침실에 누가 있는 것 같다고, 컨시어지에 연락하신 거예요!”
아현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분명 수영장에서 본 윤태하의 몸은 전신이 탄탄한 근육질이었는데, 실제 안기는 감촉은 자꾸만 뼈가 부딪쳤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체형보다 훨씬 왜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하지만 윤태하의 방에 윤태하 이외에 다른 남자가 있을 리 없었기에, 그냥 기분 탓이겠지 하고 생각하고 넘겨 버렸는데.
설마하니 다른 사람이었을 줄이야……!
아현이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그때까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남자가 드디어 서서히 눈을 떴다.
“아, 머리 아파…….”
얼굴을 한껏 찡그리던 남자가 아현을 보고는 기겁한 얼굴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처제가 왜 여기 있어?”
“처제? 이게 어디서……!”
어디서 윤태하인 척을 하느냐고 쏘아붙여 주려다가, 아현은 순간적으로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잠깐, 당신……?”
어쩐지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더니!
틀림없었다. 상대는 시현의 상견례 때 딱 한 번 보았던, 사촌 형부가 될 뻔한 사람이었다.
아현은 곧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사촌언니의 남자를 빼앗으려다 엉뚱한 남자와 자버린 것도 미칠 노릇인데, 그 남자가 하필 언니가 버린 남자라니!
우진은 우진대로 미칠 지경이었다. 시현이가 아니라 시현이 사촌동생이었다고?
아현은 황급히 옷을 걸쳐 입으며 쏘아붙였다.
“아니 대체 왜 남의 방에 있어요?”
우진도 옷을 주워 걸치며 대거리했다.
“그러는 넌 왜 남의 방에 막 들어오는데?”
“방 주인이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다짜고짜 달려들었잖아!”
서로 등을 돌린 채 옥신각신하는 남녀를, 태하는 조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구경인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등 뒤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태하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시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방 안의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어젯밤에 죽어도 방에 못 들어가게 하더니, 이거였어?”
어젯밤에 방에 돌아왔다가, 태하는 제 침실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두워서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갔다.
갑작스런 정전.
마치 노린 것 같은 여자의 등장.
정말 짐작대로라면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었지만, 시현이 목격하게 만들기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시현에게는 우진이 불쌍하니까 그냥 자게 놔두자는 둥 하면서 핑계를 대고 다른 방에 묵었다가, 아침 일찍 혼자 일어나서 와본 거였다.
역시나 상황은 태하가 추측한 대로였다. 그냥 빨리 내쫓아버릴 걸, 하도 재미있는 광경이라 좀 구경하고 있었더니 그새 시현이 일어나서 따라온 것이다.
“볼 필요 없어. 나가자.”
태하가 얼른 팔을 붙잡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시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때 결혼까지 갈 뻔했던 남자와 사촌동생이 함께 있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둘이 그랬단 말이야? 진짜로?”
우진이 시현을 향해 매달리듯 말했다.
“난 진짜 너인 줄 알았어, 시현아. 내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왜 네 사촌동생이랑!”
“나도 당신인 줄 몰랐어, 내가 미쳤어?”
아현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보고 있자니 시현도 상황이 이해가 갔다. 어젯밤에 정전이 된 사이에 서로 상대를 착각하고 벌어진 일인 모양이다.
시현은 기가 막힌 나머지 피식거렸다.
“이제 보니까 인연은 따로 있었네. 하필 정전된 사이에 둘이 딱 만나고, 세상에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니?”
그러나 태하는 비웃듯 말했다.
“우연이 아니지.”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매니저가 고개를 숙여 보고했다.
“CCTV 확인했습니다. 어젯밤에 클로이가 배전실 열쇠를 훔쳐서 정전시키고, 마스터키도 훔쳐서 객실에 침입한 모양입니다.”
시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아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인턴십 기간만 채우고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거야?”
아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은 다시 물었다.
“그거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에 네 계획이 성공했다고 치고, 그 후엔 어쩌려고 했니? 착각해서 하룻밤 잤다고, 태하가 너하고 결혼이라도 해줄 것 같았어?”
대답이 없는 아현 대신에, 태하가 말했다.
“최소한 우리 결혼은 깰 수 있을 것 같았겠지. 아니면 내 반응을 봐서, 원치 않는 관계였다면서 날 고소했을 수도 있고…… 아, 표정 보니까 그쪽이 맞나?”
속내를 들킨 아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여차하면 거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시현은 깊이 후회했다. 아현이 태하에게 접근했던 걸 알았을 때, 진작 레온에게 부탁해서 내보냈어야 했는데. 그래도 사촌 동생이라고, 매달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봐줬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너 정말 사람도 아니구나.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러나 아현은 전혀 찔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시현과 태하를 죽일 듯이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럼 너희가 우리 엄마를 모함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모함? 설마 작은어머니가 너한테 피해자인 척한 거니?”
“난 우리 엄마 믿어!”
아현이 고함을 질렀다. 시현도 지지 않고 마주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네 엄마 복수해주겠답시고 한 짓이 겨우 이거야? 일부러 정전까지 시키고, 객실 열쇠 훔쳐서 네 사촌 형부 될 사람 방에 숨어드는 거?”
숨 막히게 불꽃이 튀는 가운데, 시현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딱 어울리네, 둘이.”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말투에 아현은 금세 떠올렸다. 상견례 때 우진을 보고, 제 입으로 시현에게 했던 말이었다.
[난 언니가 하도 버티고 안 가길래 대체 눈이 얼마나 높아서 저러나, 궁금했거든. 그런데 오늘 형부 보니까 그럴 만했네. 딱 어울려, 언니랑.]
물론 칭찬이 아니라 조롱의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놓고 조롱했던 그 남자가 지금, 제 옆에 있었다.
아현은 부들부들 떨며 시현을 노려보았다. 어릴 때부터 제집에 얹혀살면서, 아무리 괴롭혀도 찍소리 한 번 못하던 사촌언니에게 짓밟힌 기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서 감히 잘난 척이야! 아빠도 엄마도 없는 주제에!”
어릴 때부터 싸울 때마다 아현이 써먹었던 말이었다. 이 말에 시현이 제일 상처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현은 옛날과는 달리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 넌 참 좋겠다.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어서.”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시현은 웃음기를 거뒀다.
“그런데, 네 아빠인 건 확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