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어머님,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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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어머님,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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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어머님, 아버님!
2022.12.30.
부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태하는 시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신혼집은 결혼식 후에 입주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현은 아직도 혼자 원룸에서 지내고 있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까짓 거 안 먹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봐?’
굳이 그 장어 한 조각을 빼앗아가는 시현이 하찮고 귀여웠다.
비록 계략까지 동원해서 합가를 막기는 했지만, 제 부모님과 함께 살게 해주고 싶었던 시현의 마음을 모를 태하가 아니었다.
그런 여자가 왜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너무 예뻐서 확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물론, 아버지도 필요 없는 장어가 아들한테 필요할 리 없다. 태하는 그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자고 갈게.”
“안 돼, 오늘은 그냥 가.”
시현이 현관문 앞에서 막아섰지만 그의 눈에는 귀여운 앙탈로 보였다.
“오늘은 힘들게 안 해. 딱 한 번만 할게.”
태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약을 팔았다. 물론 그는 마음만 먹으면 그 한 번을 밤새도록 할 수도 있는 남자였다.
“들어가자.”
허리를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려는 그를 시현이 단호하게 밀어냈다.
“진짜 안 된단 말이야.”
밀어붙이면 늘 못 이긴 척 사랑스럽게 안겨 오던 여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태하도 이상한 것을 느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시현이 우물거렸다.
“미안하지만 결혼할 때까지는 너랑 안 잘 거야.”
태하는 굳어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결혼식까지는 두 달이나 남았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쨌든 안 돼.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첫날밤까지만 좀 참아주면 안 돼?”
시현이 매달리듯 말했다.
“너 내가 20억 달라고 했을 때도 안 물어보고 그냥 줬잖아.”
태하는 단호하게 얼굴을 굳혔다. 20억은 내줄 수 있지만 이건 안 된다.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협조 못 해.”
다그치자 결국은 시현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점집에서 결혼할 때까지는 절대 같이 자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태하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랬다고?”
제 귀를 의심하고 되묻자 시현이 울상을 하고 대답했다.
“나도 원래 그런 거 믿는 타입 아닌데, 그 사람 완전 족집게였단 말이야. 내 얼굴만 보고도 신상을 줄줄 읊더라니까. 얘기하기 전에 네 나이도 알더라.”
그거야 미리 들었으니까 그렇지!
태하는 하마터면 그렇게 외칠 뻔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침에 미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요.]
뒤늦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 어떻게 안 미워하란 말이지?
“그러니까, 결혼할 때까지 나하고 안 자겠다고?”
“나도 싫어. 하지만 자칫하면 네가 아플 거라는데 어떡해.”
시현이 안타까운 얼굴로 태하를 달랬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응?”
눈앞이 캄캄해졌다.
*
나는 원래 장어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 밤이 채 다 지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지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희선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레온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누워서 좀 쉬고 있어요. 내가 물 가져올게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희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핏 다정하게 들리지만 자라는 게 아니라 좀 쉬라는 것이다. 즉 아직 안 끝났다는 소리 아닌가!
‘나만 늙었나 봐, 정말.’
희선은 누운 채로 침실을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요즘 운동에 열심이라더니, 그렇지 않아도 타고난 넓은 어깨가 한층 더 넓어진 것 같다. 벗으면 더 멋질 것 같은데, 문제는 통 보여주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 후, 레온은 여태 그녀의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인 적이 없었다.
사랑을 나눌 때도 기껏해야 어두운 조명 아래서 와이셔츠 앞섶 단추만 풀었던 것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여름 내내 긴소매를 입고 있는 바람에 팔뚝 한 번을 본 적이 없다.
레온은 금세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려는 희선을 제지하고, 그가 물을 머금은 채 그녀를 향해 상체를 한껏 숙였다.
“…….”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시원하고 달콤한 액체에, 희선은 눈을 감았다.
“저, 레온.”
“응?”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며 그가 대답했다.
“말해봐요, 내 사랑.”
“있잖아요. 당신 왜…… 늘 그렇게 옷을 다 입고 있는 거예요?”
레온은 하다못해 희선의 머리털 하나까지 예뻐했다. 자기는 속속들이 다 보고 입 맞추고 싶어하면서, 정작 자기 몸은 꽁꽁 감추려 드니 얄밉기도 하고 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말했잖아요? 남자가 함부로 속살 보이는 거 아니라고.”
이 남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희선을 향해, 레온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남자는 원래 다 보여주면 신비감이 없어지는 법이에요.”
그나마 두 개밖에 안 풀려 있는 셔츠 단추마저 꼭꼭 잠그며, 레온이 희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첫날밤까지는 참아요.”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가 문득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결혼식은 안 할 거예요?”
“자식 장가보내는 판에 무슨 결혼식이에요, 부끄럽게. 그냥 아이들 신혼여행 다녀오면, 우리끼리 모여서 식사나 하고 반지나 나눠 끼면 됐죠.”
벌써 레온이 몇 번이나 물었지만 희선의 입장은 강경했다. 어차피 결혼식을 해봐야 올 사람도 없고, 나이 들어 웨딩드레스 입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레온에게, 희선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는 그냥, 당신의 아내가 되는 걸로 족해요.”
*
복도에서 미주를 마주친 시현이 물었다.
“미주 씨, 어디 가?”
“나 잠깐 본부장님 방에.”
미주가 대답하고 슬쩍 시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나저나 궁합은 보러 갔다 왔어? 어땠어?”
“용하긴 진짜 용하더라. 근데…….”
“근데 뭐?”
뭐라고 말하려다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주 잘 살 거래. 소개해줘서 고마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아차린 미주는 웃음을 참고 심각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혹시 거기서 뭐 주의사항 같은 거 말해준 거 있으면 꼭 지켜야 해. 그거 흘려들었다가 우리 큰언니가 한참 고생했잖아.”
시치미를 뚝 떼고 신신당부하자 시현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주는 시현과 헤어져 본부장실로 향했다.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윤태하 본부장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보고 받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네?”
“대체 저한테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본부장은 자못 억울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침저녁으로 키스 받게 해줬으면서, 자기한테는 첫날밤까지 금욕을 시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현 씨 속인 대가예요.”
미주는 팔짱을 끼고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안이 사안이니까 도와는 드렸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거짓말하는 건 나쁘죠.”
태하가 뜨끔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까 첫날밤까지 반성하면서, 다시는 시현 씨 속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시라고요.”
금세 반성 모드로 들어간 남자가 미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깨우쳐줘서 고맙습니다.”
목소리에서 억울함이 가시고, 대신에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두 번 다시 시현 씨 속이는 일 없을 겁니다. 결혼식 끝나고 각자 신혼집 입주하고 나면 꼭 사실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태하의 사무실을 물러 나온 미주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양손으로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냥 첫날밤에 좀 불타올라 보라고 결혼선물 준 건데.”
미주가 소리죽여 키득거렸다.
“둘 다 잘 속는 게, 진짜 찰떡궁합이긴 하네?”
발걸음도 가볍게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문득 휴게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미주는 걸음을 멈췄다.
“미주 씨만 불쌍해서 어떡해?”
“그러게 말이야. 강시현 씨 일이라면 그렇게 발 벗고 나서더니, 결국 시현 씨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데 자기만 혼자 남았네.”
“남 챙길 시간에 자기 연애나 하지, 하여튼 사람이 너무 좋아도 탈이라니까.”
“만나는 남자도 없는데 어디 강 과장 결혼식 때 부케나 받겠어?”
걱정을 빙자한 뒷담화에 미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녀는 당장 휴게실 문짝을 걷어차고 뛰어들었다.
“근데 이분들이 진짜!”
갑자기 나타난 미주를 보고 사람들이 귀신을 본 듯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소개팅이나 한번 시켜주고 시집을 가라 마라 말씀을 하시든지요!”
미주가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해댔다.
“김 과장님, 이번 주 토요일! 이 차장님, 이번 주 일요일! 박 대리님, 다음 주 토요일!”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미주는 협박조로 말했다.
“각자 소개팅 잡아서 갖고 오세요. 안 그러면 확……!”
미주가 양손을 들어 축 늘어뜨리고 혀를 길게 빼물자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흐어어!”
“처녀귀신 돼서 밤마다 세 분 꿈에 번갈아가면서 나타날 거예요. 아셨어요?”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는 사람들을 한 번씩 노려봐 주고 나서야 미주는 돌아섰다.
“…….”
방금까지 씩씩했던 미주의 얼굴에, 한순간 쓸쓸한 빛이 어렸다.
*
화란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 아니, 우리 집안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어떻게 남의 애를 배고 선 자리를 나와?
아현이 선본 상대의 모친인 병원장 부인이 전화를 해서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화란은 전화통에 대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그러니까, 애 아빠는 그때 시현이랑 결혼할 뻔했던 그 남자가 확실한 거지?”
이 와중에 남편인 재호는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을 했다.
“아 글쎄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요!”
화란이 팩 하고 쏘아붙였다.
아현이 사고를 쳤을 때, 화란은 희선에게까지 가서 매달렸었다. 그전에 그랜드호텔인들 안 찾아가 봤을까.
그러나 아무리 사정사정을 해도 케네디 회장의 머리털 하나 볼 수 없었다. 대신에 케네디 회장의 비서에게 아현이 한 짓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못 살아. 대체 어떻게 얽혀도 하필 조카사위 될 뻔한 남자랑!”
골이 지끈거려서 화란은 눈을 감았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는 거였다.
딱 하룻밤 실수에 애가 들어설 건 뭔지. 하필 선보는 자리에서 입덧이 시작될 건 뭔지. 하필 선본 상대가 의사였을 건 뭔지. 하필 병원이 근처라 가서 피 검사를 받았을 건 또 뭔지!
선보러 나갔다가 상대방에게 임신을 들키다니, 옛날 같으면 삼류 잡지에 실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들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 병원장 사모가 입을 가만히 둘 리도 만무했다. 가뜩이나 남 얘기 좋아하는 사모님들이 지금쯤 얼마나 뒤에서 입방아를 찧고 있을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아현은 재벌가는커녕 웬만큼 산다는 집안에도 시집가기는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빨리 애부터 지우고 생각해야죠.”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해?”
갑자기 재호가 벌컥 역정을 냈다.
“아현이 배 속에 있는 아이면 우리 손자야. 어떻게 지우자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화란은 기가 막혔다. 제 남편이 앞뒤 꽉꽉 막힌 옛날 사람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럼 지금 설마, 저 애를 낳자는 말이에요?”
화란이 날카롭게 되물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재호가 손짓을 하자 가정부가 쪼르르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후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화란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바로 시현의 상견례 때 보았던 우진이었다.
“아니, 자네가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왔나?”
당황해서 묻다가 화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이 미친 작자가, 연락을 한 거야?
“당신……!”
재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시현이 상견례 때 받아둔 명함이 있었어. 진지하게 얘기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집으로 오라고 했어.”
화란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님, 아버님!”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귀한 따님과 결혼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단지 제 아이만 살리고 싶습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아이만 낳아서 주시면 제가 혼자서 잘 키우겠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사극에 나오는 대역죄인처럼 이마를 바닥에 찧다시피 하며,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걸했다.
“그러니 제발 제 아이만은 살려주십시오!”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화란은 기어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