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잘못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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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잘못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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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잘못된 선택
2023.01.03.
퇴근 후, 시현은 태하와 함께 호텔로 가서 레온을 만났다. 결혼식에 대한 세부 사항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웨딩 촬영은 언제 하기로 했니?”
“다음 주 토요일에요.”
“마침 잘됐구나. 혹시 이 중에 촬영에 쓸 만한 게 있는지 볼래?”
레온이 손짓을 하자 비서들이 벨벳으로 싸인 작은 상자 수십 개를 가져다가 응접실 테이블 위에 죽 늘어놓았다. 얼핏 보기에도 보석이 든 상자 같았다.
“이게 뭐예요?”
“케네디 가 며느리들에게 내려오는 거란다.”
레온이 고쳐 말했다.
“그러니까, 이젠 네 거지.”
비서들이 상자를 하나씩 열 때마다 그 안에서 보석들이 나타났다. 마치 고전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화려한 디자인의 보석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시현이 기존에 알고 있던 보석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물건들이었다.
목걸이에 달린 페어 컷의 다이아몬드는 손가락 두 마디 크기는 족히 되어 보였고, 에메랄드 컷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더 컸다.
에메랄드와 루비, 사파이어 같은 유색 보석들은 대부분 작은 사이즈의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인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것들도 모두가 엄청난 사이즈였다.
보통 다이아몬드 반지를 말할 때 2, 3캐럿 정도만 돼도 크다고 하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기본이 수십 캐럿이었다. 하다못해 진주마저도 그랬다.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스케일에,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유리가 아니라 진짜 보석이라는 거죠?”
레온이 설명했다.
“내 할머니, 그러니까 태하 증조할머니께서 보석을 무척 좋아하셨거든. 할리우드 여배우나, 각국 왕족이나 귀족들과도 많이 경쟁하셨지.”
화려한 보석들이 조명을 받아 경쟁적으로 빛을 뿜어냈다. 당장 보석 전시회를 열어도 될 듯한 엄청난 컬렉션에서 시현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아마 영화 같은 데서 레플리카(모조품)를 봤을 거야. 이것들 대부분은 원래 왕실에서 나온 거고, 그중에서도 몇 가지는 아주 유명한 보석들이거든.”
한참 만에야 시현은 겨우 시선을 들어 물었다.
“원래는 엄마한테 먼저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로즈는 보자마자 얼굴이 새하얘져서 자긴 괜찮으니까 시현이 주라고 하더구나.”
여태 카레 가게를 하고 있는 희선이 이 보석들을 보고 어떤 표정을 했을지 가히 상상이 갔다.
지금까지 시현은 태하와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제 인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하지 못했었다.
레온은 늘 너무 다정해서 거리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고, 희선은 자신보다도 더 소박한 사람이었고, 태하는 애초에 굶고 있는 것을 자신이 구한 아이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보석들을 보자 처음으로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지금, 엄청난 집안에 시집을 가는구나.
시현은 새삼스럽게 물었다.
“아빠, 혹시 미국 대통령도 만나보신 적 있어요?”
“물론이지. 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슈퍼 팩에 제일 많이 기부한 사람이 나일걸, 아마.”
레온이 웃고는 되물었다.
“왜, 시현이도 언제 백악관 한번 놀러가 볼래?”
“제가요?”
“너도 이제 케네디 가 사람이잖니.”
레온이 자신 있게 말했다.
“너희 결혼식에도, 대통령까지는 어렵겠지만 미국 대사 부부 정도는 초대하면 당연히 참석할 거야.”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났다. 시현이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이윽고 레온이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웨딩드레스는 어디서 하고 싶니?”
드레스 숍을 묻는 건 줄 알았는데 레온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네가 알고 있는 어떤 브랜드든 좋아. 원하는 브랜드만 얘기하면, 그쪽에서 디자이너가 와서 너와 상의해서 제작할 거야.”
시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별렀던 말을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있잖아요, 아빠.”
듣고 있단다, 하듯 레온이 다정한 눈을 했다.
“저는 그냥 저로 살고 싶어요.”
사실 결혼을 앞두고 시현은 계속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결혼식이 좋을까, 나아가서 결혼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가장 참고가 되었던 것은 전에 레온과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했던 경험이었다. 그때, 시현이 들어가는 명품 매장마다 그녀의 쇼핑을 위해서 문을 닫았었다.
분명 설레는 경험이었지만, 왠지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었다.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있는 느낌이랄까.
“저 편하게 쇼핑하라고 매장을 닫고, 명품 브랜드에서 저를 위한 웨딩드레스를 제작하고, 제 결혼식에 미국 대사가 참석하고, 그런 거……. 물론 특별한 경험이긴 하지만 저한테 어울리는 삶은 아닌 것 같아요.”
시현은 말하면서 점점 목소리에 확신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게 맞는다.
“저는 앞으로도 그냥 지금처럼 배달 앱에서 할인 쿠폰 뜨면 좋아하고, 보너스 나오면 큰맘 먹고 가방 하나쯤 사고, 월요일이면 로또 사면서 일주일 동안 행복한 꿈을 꾸는 강시현으로 남고 싶어요.”
물론 예전과 같은 삶일 수는 없다. 당장 신혼집부터가 일반적인 신혼부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하지만 마음만이라도 원래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태하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묻듯 슬쩍 태하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좋다면, 나도 그게 좋아.”
태하의 동의를 얻자 한층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결혼식도 그래요. 그랜드호텔에서 식을 올리는 것만 해도 저한테는 충분히 분에 넘쳐요. 그 이상 더 화려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기자들도 안 왔으면 좋겠고, 될 수 있으면 하객들도…….”
말하다 말고 시현은 레온의 눈치를 보았다. 결혼식이라는 것은 신랑 신부만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히려 부모님의 이벤트에 가깝다. 레온은 사업가이니, 아들의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그러나 레온은 흔쾌히 말했다.
“네 결혼식이야. 뭐든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단다.”
“그럼 그냥 친한 친구들하고 동료들만 불러서, 최대한 조용히 하고 싶어요.”
조그맣게 덧붙이고, 시현은 아까 한참 들여다보던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상자를 닫아서 밀어놓았다.
“보석은 저도 필요 없어요.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고요. 언젠가 저한테도 며느리가 생기면 그때 주든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어쨌든 지금은 네 것이니, 필요하면 언제든 꺼내서 사용할 수 있게 네 금고를 만들어서 보관해두마.”
그래도, 하면서 레온은 테이블에 놓인 것 중 가장 큰 상자를 열었다. 안에서 나타난 것은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티아라였다.
“이것만 결혼식 때 쓰는 건 어떻겠니?”
티아라는 겨울에 딱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눈꽃 같은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인 새파란 보석이, 마치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 호수를 연상시켰다.
너무 화려해서 착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던 다른 보석들과는 달리, 보는 순간 그만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결혼식 날 이 티아라가 제 머리 위에서 빛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할머니 컬렉션 중에 사파이어 나석이 있었거든. 겨울의 신부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서 제작한 거란다.”
그렇다면 이건 아빠가 주는 결혼선물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너하고 상의도 없이 만들긴 했는데…… 어때? 마음에 드니?”
레온이 불안한 듯이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대답 대신에 티아라가 든 상자를 닫아 버리자 레온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역시 미리 상의할 걸 그랬구나.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얼마든지 다른 티아라를 써도…….”
“이건 제 며느리한테도 안 줄래요.”
상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는 시현을 보고, 레온과 태하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현은 방에 틀어박혀 멍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아현 씨, 우리 얘기 좀 해요.]
집에까지 찾아온 우진이 노크하며 불렀지만 아현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뒤로도 아버지에게서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끈질기게 전화가 왔지만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우진은 메시지 폭탄을 보내기 시작했다.
- 아현 씨, 이러지 말고 전화 받아요. 우리 아기 생각도 해야죠.
우리 아기라니. 단어만 봐도 끔찍스러워서 아현은 휴대폰을 내동댕이치고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아악!”
밖에서는 부모님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당신 미쳤어요?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우리 아현이를!”
“그럼 어떡하잔 말이야? 벌써 소문 다 퍼져서 멀쩡한 집안에 시집보내긴 글렀는데!”
“차라리 평생 처녀로 늙혀 죽이고 말지, 내가 그 꼴은 못 봐요!”
화란의 심정이 곧 아현의 심정이었다.
‘차라리 평생 혼자 살고 말지 저 남자는 싫어!’
아현은 피가 나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예전에 아현은 친구에게 조한신문 딸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아수라장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조한신문 딸한테 약혼자 빼앗긴 여자가 바로 케네디 회장 예비 며느리라고.]
그 약혼자라는 것이 바로 우진이었다.
즉 지지리 능력도 매력도 없는 남자가, 주제에 바람까지 피웠다는 거 아닌가. 두루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다. 제 배 속에 그 남자의 아이가 있다는 것마저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당장 산부인과로 달려가고 싶은데 거실에서 아버지가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 와중에 입덧 때문에 속은 계속 울렁거리고. 아현은 그야말로 정신이 나가 버리기 직전이었다.
식사도 거부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자 기어이 아버지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아현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나가. 아빠 얼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남의 눈을 죽도록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사고방식 자체가 케케묵은 옛날 사람이라는 것도. 하지만 딸의 인생이 걸려 있는 일에까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정이 뚝 떨어졌다.
재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다 네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라는 게 그렇게 원할 때 쉽게 들어서는 게 아니란 말이다. 너만 해도 얼마나 어렵게 가졌는지 아니?”
“…….”
“자칫 잘못했다가 영영 못 낳게 되면 어쩔 테냐? 응?”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 아현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다.
결국 재호는 한숨을 짓고 입을 열었다.
“분당 상가하고 경기도 땅, 너한테 증여해주마.”
그제야 아현은 깜짝 놀라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짜?”
분당에 있는 상가는 월 임대료만도 3천만 원 가까이 나오는 알짜배기였다.
또한 경기도에 있는 땅은 아버지가 공장부지로 쓰려고 한참 전에 매입해 놓은 것인데, 갑자기 땅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공장을 짓기는 아까워서 여태 놔둔 것이었다.
땅값만도 50억이 넘는 걸 그냥 놀려만 둔다고, 엄마가 흉을 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차피 외동딸이니 나중에는 제 것이 되긴 할 테지만, 백세 시대에 대체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엄마인 화란은 사치가 심하고 능력이 없었다.
아버지보다 엄마가 열 살이나 어리기까지 하니, 자칫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엄마가 먼저 재산을 물려받으면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전에 죄다 탕진해 버릴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 재산의 일부를 미리 주겠다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해서 아이만 낳아. 그러면 바로 네 명의로 해주마.”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팔아서 쓰든지, 그걸로 사업을 하든지, 임대료 받으면서 편하게 살든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해.”
결국 아현은 거절하지 못했다.
“……한번 생각해볼게.”
재호가 나가고, 아현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버지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어차피 선 자리에서 입덧을 했다는 소문이 퍼진 이상 번듯한 집안에 시집갈 길은 막혔다.
아버지는 결혼해서 아이만 낳으면 재산을 주겠다고 했다. 그럼 재산 받자마자 아이는 시댁에 줘버리고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눈 딱 감고 1년만 참으면 되는 거잖아?’
1년 후에 이혼해도 겨우 스물아홉 살밖에 안 된다. 이 미모와 젊음에 재산까지 있으면, 원래 노리던 대단한 집안까지는 아니라도 얼마든지 젊고 괜찮은 남자를 잡아서 새출발 할 수 있을 거였다.
아니, 그 정도 돈이 있으면 사실 결혼 따윈 안 해도 그만이다.
말이 부잣집 딸이지 아현은 늘 돈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한 달 용돈이 웬만한 회사원 월급에 육박하는데도 그랬다.
화란이 워낙 최고급으로만 키워 놓아서 본인도 씀씀이가 컸고, 주위 친구들이 다 한 가닥 하는 집안 자식들이라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용돈은 얼마를 받아도 늘 부족했다.
죽기 전에 돈 좀 실컷 써봤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그 상가를 받으면 현금만도 꼬박꼬박 한 달에 3천만 원씩 들어온다는 거 아닌가. 평생 놀고먹으며 여행이나 다닐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아현은 모성애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게 그런 감정이 생길 거라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실수로 가진 아이 따위,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니 낳아서 시댁에 줘버릴 생각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그 남자와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애 핑계로 내 몸에 손끝 하나 못 대게 하면 되지 뭐.’
치열한 계산 끝에, 아현은 휴대폰을 들었다.
“강아현이에요.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자신이 지금 얼마나 깊은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