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그 아래는 만지면 안 돼 (133/181)


#133. 그 아래는 만지면 안 돼
2023.01.06.



 
아현은 집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서 우진과 만났다. 그랜드호텔에서의 날벼락 같은 하룻밤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입덧은 좀 어때요? 그새 얼굴이 많이 핼쑥해졌네요.”

우진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용건만 얘기하죠?”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대꾸하자 우진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상견례 때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아현 씨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시현이 사촌동생이니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제야 아현은 눈을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말쑥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때는 자고 일어나서 머리도 말이 아니었고, 대충 꿰어입은 옷마저도 엉망이었는데.


‘차려입으니 그나마 좀 낫긴 하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아현에게, 우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룻밤이었지만 잊을 수가 없었어요. 집에 가서도 자꾸만 생각났어요.”

“…….”

“아현 씨 아버님께 연락을 받았을 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게 운명이란 건가 보다.”

우진은 뺨까지 조금 붉히고 어색하게 고백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아현 씨를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현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다짜고짜 달려들었잖아!]

그날 아침에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반말을 해대더니 영 딴판 아닌가.

입에 발린 멘트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았다. 하도 윤태하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뒤여서 그런가.

아현은 다시 한번 우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남자로서 매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제 주제를 알고 납죽 엎드리는 자세는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1년 동안도 같이 못 살 정도는 아니다.


“해요, 결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오히려 우진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렇게 쉽게 승낙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놀라서 멍해진 그 얼굴이 은근히 아현의 자만심을 충족시켰다. 하기야 자기가 보기에도 내가 황송한 상대이기는 하겠지.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아현은 잘라 말했다.


“임신 기간 동안 절대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우진은 이가 부딪히도록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자칫 우리 아이가 다치면 안 되니까.”

너 그 정도로 터프한 남자 아니거든? 아현은 속으로 비웃었다.

본인은 취해서 그날 밤에 뭘 어쨌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이쪽은 달랐다. 뭐야, 이제 보니 윤태하 별거 아니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속마음을 감추며 아현은 두 번째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혼인신고는 아이 낳고 나서 하죠.”

이번에는 우진도 대답을 망설였다.


“싫어요?”

그러나 아현이 다그치자마자 금세 굴복했다.


“아뇨, 싫다니요! 아현 씨 뜻대로 하죠. 요즘은 많이들 그렇게 하니까.”

아현은 속으로 웃었다. 이러면 이혼녀가 돼도 서류상으로는 깨끗하니까, 리스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도 생략하자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제 속내를 들킬 것 같았다. 남의 눈을 죽도록 신경 쓰는 아버지가 그렇게 해줄 리도 없고.

우진이 주머니에서 검은 상자를 꺼냈다.


“아현 씨, 비록 우리가 시작은 좀 어긋났지만…….”

또 구구절절 입에 발린 멘트를 시작하려는 남자의 손에서, 아현은 상자를 홱 빼앗아서 열어 보았다.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알이다.

반지에 박힌 투명한 보석이 제법 큼직해 보였다.


‘이 정도면 2캐럿은 충분히 되겠는데?’

월급쟁이 주제에 무리했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현은 반지를 꺼내서 제 손가락에 꼈다.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건네기도 전에 반지를 빼앗긴 남자가 머쓱하게 말을 마쳤다.

아현은 그제야 처음으로 우진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우리, 잘해봐요.”

‘앞으로 1년 동안’이라는 말은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

시현은 주말에 친구들과 청첩장 모임을 가졌다. 전에 모였던 멤버 그대로였다.

친구들은 태하도 데리고 나오라고 졸랐지만, 태하가 여자들 노는 데 남자가 끼어드는 거 아니라면서 극구 사양했다.


[끝날 때쯤 데리러 가서 인사만 할게.]

그래서 또 오랜만에 여자들끼리의 수다 모임이 되었다.

보라가 내보낸 거짓 기사 때문에 시현이 한동안 전국적으로 욕을 먹었을 때, 친구들도 덩달아 마음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런 거 아니라고 글을 몇 개나 올렸는데 다 묻혔잖아.”

“욕하는 데 정신없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더라고.”

“너네 시아버님 기자회견 하시고 나니까 그때야 퍼가서 여기저기 돌리더라.”

친구들이 뒤에서 싸워준 것을 뒤늦게 알고, 시현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역시 내가 인생 헛살지 않았구나.

바람난 우진을 욕하느라 바빴던 지난 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 강시현!”

부딪치는 술잔마저도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근데 있잖아. 사실 난 옛날부터 태하 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다?”

주은이 불쑥 꺼낸 말에 시현은 깜짝 놀랐다. 나는 몰랐는데!


“그때가 우리 졸업하고 한창 취업 활동 하던 땐데. 너 상반기 공채 줄줄이 떨어지고 나서 나랑 둘이 술 먹고 죽은 적 있거든.”

“그랬나?”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적 생각은 잊어버리나 보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태하 씨가 교복 입고 술집에 너 데리러 왔었거든. 자기 손으로 물 떠다 먹이고, 손수건 빨아다 얼굴 닦아주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리니까 업어서 데려가는데 하는 짓만 봐도 딱 알겠더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때 태하 씨가 겨우 고 1인가 그랬는데 어떻게 말을 하냐? 혼자 속으로만 아까워했지. 아휴 쟤를 어째, 몇 년만 좀 빨리 태어나지 그랬니, 하면서. 그런데 결국은 걔한테 시집을……!”

주은이 새삼 얄밉다는 듯이 시현을 흘겨보고는 술병을 들었다.


“됐고, 너 마셔.”

시현은 닥치고 술잔을 비웠다. 이런 술이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자, 나랑도 짠 한번 해.”

“나도!”

다른 친구들도 앞 다투어 시현의 잔을 채웠다.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그러다 보니 금세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 슬슬 취하는 거 같다. 그만 마실래.”

술잔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친구들은 아예 작정을 하고 나온 듯했다.


“아 무슨 걱정이야, 이따 신랑이 모시러 온다며.”

“이럴 때 마시지 언제 마시냐?”

오랜만에 마신 술에, 결국 시현은 제대로 취해버렸다.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채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눈은 뜰 수 없었지만 익숙한 향기가 느껴져서 시현은 방긋 웃었다. 어, 우리 태하 왔네.


“죄송해요. 저희가 그만 너무 먹였나 봐요.”

“얘가 원래 이렇게 술이 약한 애가 아니었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데려가서 잘 돌보겠습니다.”

“저희가 업혀드릴게요.”

이어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넓고 따뜻한 등에 뺨을 기댄 채 시현은 기분 좋은 움직임을 만끽했다.


“이건 저희가 같이 고른 결혼 선물이에요. 시현이 깨면 전해주세요.”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

시현을 업고 들어온 태하가, 침대에 조심스레 눕히고 나서 이마에 땀을 훔쳤다.


“……휴우.”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처럼 취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래도 속상해서 마신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마셨다니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취했을 때, 그녀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서럽게 울었었다.


[네가 어떻게 날 잊어.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겠어.

차마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가슴만 무너졌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잠든 시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태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태하는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한 침대에서 잘 자신은 없어서, 침대 밑에서 이불을 깔고 잘 셈이었다.


“어디 가.”

그러나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팔을 붙잡혔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자 시현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깼어?”

시현은 대답 대신에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나 안아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 뭐지. 이 애교 어린 목소리는.

시현은 평소에 절대 애교 따위는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자기가 일곱 살이나 많으니까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딱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사랑스러우니까 태하도 불만이 없었는데, 정작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걸 보니 그야말로 눈앞이 아찔했다.

당장 달려들어 와락 껴안고 싶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도저히 그냥 안고만 있을 자신은 없는데.


“취했어. 얼른 자.”

이불을 덮어 주며 달래서 재우려 했지만 시현은 막무가내였다. 이불을 걷어차고 그에게 오려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떼를 부렸다.


“안아줘어, 안아달라고오!”

태하는 치열하게 갈등했다. 어차피 그녀가 걱정하는 점괘 따위, 사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확 그냥……!

그러나 낮에 미주에게 들은 말이 발목을 잡았다.


[첫날밤까지 반성하면서, 다시는 시현 씨 속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시라고요.]

그래. 지은 죄가 있으니 벌은 받아야지.


“알았어. 안아줄게.”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시현의 곁에 누웠다. 팔을 내밀자마자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착 안겨 왔다.

부드러운 몸의 감촉에, 굶주린 몸은 당장 정직하게 반응했다. 태하는 백팔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억누르며 아기를 재우듯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제발 빨리 잠들어라.’

속으로 빌고 있는데, 문득 허리께에 터무니없는 것이 느껴졌다.


“잠……!”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이미 발칙한 손은 와이셔츠 자락 안으로 파고들어 복부를 살살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 이거 너무 좋아.”

시현이 뿌듯한 목소리를 냈다.


 
평소에도 그녀는 제 복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가끔씩 이렇게 만지곤 했다.

그러다가 된통 혼이 나고는 매번 다신 안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슬그머니 손을 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사실 태하도 좋아했다. 만져지는 것 자체도 물론 좋고, 당신이 자극한 탓이라고 홀라당 뒤집어씌우기도 좋고.

하지만 지금은……!

굴곡진 근육을 더듬는 손길에 몇 번이나 눈앞이 아찔해졌다. 신음이 나올 것 같아서 참느라 이를 꽉 깨물고 있는데, 시현이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뭘 세고 있나, 했더니 복근이었다.


“넷, 넷, 다섯…… 어, 이상하다. 왜 다섯 개지?”

넷을 두 번 셌잖아!


“하나, 둘, 셋, 셋, 넷, 다섯…… 어어? 하나, 둘, 둘, 셋, 넷, 다섯…… 어?”

시현이 몇 번을 헤매는 동안 태하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하나를 잃어버린 시현이 울먹였다.


“어디 갔지? 없어지면 안 되는데.”

결국은 사라진(?) 복근 한 개를 찾겠다고 가슴과 배를 한참 더듬다가, 기어이 벨트 근처까지 손길이 내려오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아래론 내려가지 마!”

태하는 황급히 경고했다.


“난 분명히 말했어. 그다음은 책임 못 져.”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

다음 순간.

질끈. 태하가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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