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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돌아온 겉절이 (135/181)


#135. 돌아온 겉절이
2023.01.13.



 


“진짜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아현이가 당신 딸이라도 이럴 거냐고요!”

헙. 뒤늦게 말실수를 눈치챈 화란이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재호가 되물었다.


“아유 참, 너무 열이 받으니까 말이 막 헛나오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 딸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거예요.”

얼른 말을 정정하고, 화란은 도로 화난 표정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나, 저 여편네가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전에는 죽어도 이 결혼 못 시키니까 당신도 그렇게 알아요!”

쏘아붙이고 나서, 화란은 아현을 불러 기사가 대기하는 차가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가자, 아현아!”

그런 화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재호의 표정이 한껏 굳어져 있었다.

*

아현의 가족들이 상견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마자 우진은 제 엄마를 붙잡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엄마 미쳤어?”

자칫 불똥이 떨어질 것을 예감한 우진의 아버지는 담배를 핑계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납작 엎드려서 모셔 와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거기서 시어머니 노릇을 할 생각을 해!”

정임도 지지 않고 아들을 향해 대들었다.


“아니, 누가 봐도 저쪽이 안하무인 아니니? 딸 가진 부모 주제에 뭐 그렇게 당당해? 우리 집 씨까지 배 놓고!”

“애는 지우면 그만이야! 대체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우진은 곧 미칠 노릇이었다. 저 여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인데,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끊어놓으려고 하다니!

사실 위의 두 며느리에게 해온 갑질이 몸에 익어 있던 정임으로서는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부잣집이고 하니까 초장부터 기를 확 잡으려던 거였는데, 임자를 잘못 만난 게 문제였다.

전에 시현과 상견례를 했을 때,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화란이 ‘예, 사부인’ 하고 고분고분하게 나오길래, 생긴 거랑은 달리 만만한 여자인 줄 알았던 게 오산이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아유, 왜 이렇게 난리야. 설마 진짜 파투 내기야 하겠니?”

“파투 못 낼 건 뭔데? 애만 없었으면 저 집안에서 나 따위 거들떠나 볼 것 같아?”

아들이 펄펄 뛰는 걸 보니 정임도 슬슬 간이 쪼그라들었다.

서른다섯이나 된 아들놈 매일같이 밥해 먹이기도 슬슬 힘에 부치는데, 이러다 자칫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할 위기 아닌가.


‘저 성질 더러운 여편네가, 진짜로 혼사를 엎으려나?’

뒤늦게 가슴이 철렁하는데, 우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가서 빌어.”

“뭐?”

“장모님한테 싹싹 빌란 말이야!”

정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삼 형제 중에 막내라고, 제일 딸같이 살가운 아들이었는데!


“너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말이니?”

“대체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시현이 구박해서 딴 놈한테 가게 만든 거 말고 해준 게 뭐가 있냐고!”

우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남들처럼 유학을 보내주길 했어? 집을 해주길 했어? 하다못해 예물도 별 거지 같은 짜가를 줘 놓고, 예단으로 명품 가방 타령이나 하고!”

정임은 손이 다 벌벌 떨렸다.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운 막내아들한테서 늘그막에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잘 들어. 엄마 때문에 이 결혼 엎어지면, 나 평생 엄마 얼굴 안 봐.”

우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혼자 남은 정임이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저런 놈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니, 아이고, 아이고!”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

퇴근 무렵, 시현은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청첩장은 끝났고, 스튜디오 촬영은 내일. 다음 주는 본식 드레스랑 엄마 한복. 그다음 주는 신혼여행 준비랑…….”

전에는 그저 대충대충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하나 그렇게 설레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회사 일도 바쁜 와중에 결혼 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신부 관리까지 받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시현은 하루하루가 꿈결 같았다.

내일은 드디어 스튜디오 촬영이 있다. 며칠 전에 촬영 드레스 가봉까지 끝낸 터였다.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문득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이마를 감쌌다. 시원한 느낌에 스르르 눈을 감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몸이 살짝 처지는 것 같기는 했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살짝 감기 기운이 왔나 봐. 목도 안 아프고, 기침도 없고, 괜찮아.”

그러나 태하는 못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내일 촬영할 수 있겠어? 몸 안 좋으면 미루든가.”

“전날에 취소하면 위약금 100프로 물어야 할걸.”

태하가 한숨을 쉬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당신 남편이 평범하지 않아.”

“…….”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스튜디오를 통째로 사버리는 수가 있어.”

협박조의 목소리가 어쩌면 이렇게 다정하게 들릴 수 있을까.


“같이 퇴근해. 내가 가서 죽 끓여줄게.”

시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냥 약 먹고 푹 자면 아침엔 가뿐해질 거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남자를 더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시현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다. 열이 있어서인지 좁은 원룸이 새삼 썰렁하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밥을 챙겨 먹을 기운도 없어서, 약국에서 산 감기약만 두 알 삼키고 일찌감치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내일이 촬영인데, 마스크 팩이라도 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약기운에 슬슬 밀려오던 졸음이, 어디선가 들려온 삑삑삑삑, 하는 소리에 확 도망갔다.

눈을 뜨자 현관으로 태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식재료를 사 왔는지, 손에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왜 왔어, 나 괜찮다니까.”

태하가 다가와서 시현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한숨을 지었다.


“그것 봐, 아까보다 열이 더 올랐잖아.”

“약 먹었으니까 좀 있으면 떨어질 거야. 걱정 말고 가.”

태하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내 몸만 보고 좋아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금세 얼굴이 빨개진 시현이 눈을 흘겼다.


“그런 거 아닌데 왜 자꾸 피해. 손도 안 잡고, 키스도 안 하려고 들고.”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피하는 거, 눈치채고 있었구나.


“네가 힘들까 봐 그러지. 어차피…… 자지도 못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자려고 만나는 사이였냐고.”

그는 슈트 상의를 벗고 드레스 셔츠의 팔을 걷어붙였다. 채소 써는 소리와 함께 썰렁했던 집안이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

잠시 후 능숙한 솜씨로 죽을 끓여 온 태하가 시현을 안아 일으켰다.


“넌 왜 꼭 이렇게 떠먹여주는 거야? 못 움직일 정도도 아닌데.”

숟가락을 입가에 갖다 대주며 태하가 대답했다.


“옛날에 내가 밥 안 먹으면 당신이 물 말아서 떠먹여줬잖아. 난 그게 참 좋았어.”

“아, 그래서 일부러 안 먹었어?”

“솔직히 가끔은.”

시현은 눈을 흘겼다.


“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서 이젠 내가 해주고 싶은 거야. 이럴 때라도.”

죽을 다 먹고 나자 몸이 훈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잘 먹었어. 나 이제 잘 테니까 넌 가도 돼.”

시현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태하는 넥타이를 풀고 서랍을 열어 자기 옷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금세 드러나는 눈부신 몸에서, 시현은 애써 눈을 돌렸다.


“자고 가려고?”

“그럼 아픈 사람을 어떻게 두고 가.”

태하가 티셔츠를 입으며 대꾸했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

시현은 어떻게든 태하를 돌려보내려 했다. 벌써 한 달 동안이나 멀리했으니까, 밤새 안겨서 자면 진짜 괴로울 텐데.

그러나 태하는 들은 체도 않고 침대에 와서 눕더니 이리 와, 하고 팔을 벌렸다.


“정말 괜찮아? 너 괴롭지 않겠어?”

“괴롭지.”

태하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렇다고 키스도 못 하고 안지도 못하는 게 훨씬 더 괴로워.”

“…….”

“좋아하니까 자고 싶은 거지, 자려고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시현은 잠시 망설이다 순순히 안겼다. 오랜만에 넓은 품에 폭 안기자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정말 괜찮겠어?”

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숫자만 세지 마, 제발.”

대체 내가 그날 밤에 뭘 세었길래 저러는 걸까, 생각하는데 문득 태하가 물었다.


“키스하지 말라고는 안 했지?”

점집에서 말이야, 하고 그가 속삭였다.


“안 했지만…… 너 감기 옮으면 어떡해.”

피하기도 전에 달아오른 입술이 닿아 왔다.


“내가 다 가져갈게.”

“…….”

“아픈 거, 힘든 거, 다 나한테 줘.”

오랜만의 키스. 사이사이에 들려오는 다정한 속삭임이 시현에게도 더없는 황홀함을 불러일으켰다. 어느덧 그녀도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정신없이 더 깊은 입맞춤을 조르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점점 뜨거워져 가는 어느 순간.

그가 입술을 떼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여기까지만 하자.”

“……응.”

시현은 행복한 마음으로 그의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내일 웨딩 촬영 때는 정말 예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상견례가 파투난 지 사흘 만에, 정임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화란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과 아들에게 들들 볶인 결과였다.


“사부인, 일전에는 제가 대단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 아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셨을까요? 그렇게 아들 가진 유세가 대단하시더니?

화란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울컥했지만 지금은 그저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제가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아무쪼록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세요.”

닥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화란이 내뱉듯 말했다.


- 알면 됐습니다. 앞으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 않으시리라 믿지요.

갑을관계가 완전히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파혼만은 막았다. 정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내일이 제 생일입니다. 친구들 초대해서 집에서 간단히 점심이나 먹을까 하는데, 얼마 전에 일하던 아줌마를 한 명 내보내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하네요. 혹시…….

화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임은 외치다시피 말했다.


“아 예, 암요, 제가 가서 거들어야지요!”

이렇게 해서 정임은 화란의 생일날, 사돈집 부엌에서 일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화란이 곱게 차려입고 거실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동안, 정임은 가정부와 함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시집을 보낸단 말이야?”

“의사니 검사니 선봤다던 건 다 어쩌고 갑자기 회사원이야?”

“아휴, 나도 속상해 죽겠어. 사위라고 어디 한 군데 눈에 차는 데가 있어야지. 그래도 저희들끼리 좋다는데 난들 어쩌겠어?”

“하긴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거실에서 떠드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이 저런 소리를 듣고 있는데도 찍소리 한마디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했다.

정임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겉절이를 무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새된 소리가 들렸다.


“아니, 누가 겉절이를 비닐장갑을 끼고 무쳐요?”

돌아보자 화란이 도끼눈을 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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