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웨딩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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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웨딩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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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웨딩드레스
2023.01.17.
정임이 눈물을 삼키며 겉절이를 무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새된 소리가 들렸다.
“아니, 누가 겉절이를 비닐장갑을 끼고 무쳐요?”
화란이 도끼눈을 하고 곁에 있던 가정부를 쏘아보았다.
“아줌마, 아줌마가 비닐장갑 줬어요?”
“아니에요, 사모님! 이 아줌마가 멋대로 뒤져서 꺼낸 거예요!”
화란의 더러운 성격을 잘 아는 가정부가 펄쩍 뛰고는 정임을 다그쳤다.
“아줌마, 대체 어디서 일을 배웠어요? 처음 왔으면 뭐든지 나한테 물어보고 해야지!”
가정부는 여태 정임이 화란의 안사돈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뭐 하고 섰어요, 당장 그거 벗지 못하고?”
가정부의 닦달에 정임은 비닐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겉절이를 무치기 시작했다. 액젓과 마늘, 고춧가루가 범벅이 된 시뻘건 양념이 손톱 밑에 배어들면서 비명이 절로 새어 나왔다.
“뭐 살림을 가르치네 마네 하시더니, 이제 보니 되레 본인이 배우셔야겠네.”
화란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꾸물대지 마시고 얼른 무쳐서 상 차려 내오세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는 정임의 눈가에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드디어 시현이 본식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날이 되었다.
명품 브랜드에서 직접 드레스를 맞추는 건 싫다고 했더니, 레온은 그 대신에 드레스 숍에 유명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의 신작들은 다 구비해놓게 해주었다.
진짜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라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텐데. 시현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고마워요, 아빠.”
“정작 내가 같이 못 가게 돼서 서운하구나. 우리 시현이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은데.”
레온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이면 오늘 저녁에 무슨 경제인 모임 같은 곳에 참석해야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에이, 결혼식 때 보시면 되죠 뭐. 엄마랑 태하랑 같이 갈 거니까 괜찮아요.”
“음, 시현아.”
레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태하랑 둘이서만 가는 건 어떨까?”
“왜요?”
“로즈는…… 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했잖아.”
레온이 쓸쓸한 얼굴을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시현이를 보면 물론 로즈도 마음이 뿌듯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시현은 새삼스레 레온이 얼마나 희선을 사랑하는지를 느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그는 헤아리고 있었다.
“엄마가 결혼식은 정말 싫으시대요?”
조심스레 묻자 레온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자기는 신부가 아니라 어머니여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것 같아.”
희선은 태하를 자기 손으로 키워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늘 품고 있었다. 아무리 태하가 자기는 괜찮다고 말해도 좀처럼 편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신부인 시현이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로즈는.”
시현도 안타까웠다. 어차피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
“아빠는 결혼식 하고 싶으시죠?”
“물론이지. 나는 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에게 키스하는 순간을 꿈꿨는걸.”
레온이 와이셔츠 위로 팔목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지었다.
“로즈를 두고 미국에 돌아갔을 때, 붙들려서 몇 달 동안 집에 갇혀 있었거든. 평생 그렇게 갇혀 살든지, 아니면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와 결혼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였어.”
“…….”
“TV는커녕 책 한 권 없는 작은 방에 갇혀서, 하다못해 그림도 그릴 수 없고…… 정말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단다. 그때 나는 아름다운 신부가 된 로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어. 반드시 이겨내서 로즈를 데리러 가야지. 꼭 웨딩드레스를 입혀줘야지.”
“…….”
“그런데 결국 끝내 볼 수 없게 됐구나.”
안타까워하는 시현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레온은 금세 환하게 웃었다.
“나도 참 우습지? 언제는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배가 불러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드레스 잘 보고 오렴.”
레온이 말했지만, 시현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
웨딩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시현은 눈부시게 예뻤다.
“세상에, 우리 딸!”
첫 드레스부터 희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꼭 천사 같다, 그렇지 않니?”
동의를 구했지만 왠지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곁을 쳐다보자 태하는 아예 넋을 잃은 얼굴로 제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태하가 되물었다.
“예?”
희선은 웃음을 참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말 안 시킬 테니까 실컷 보렴.”
뭘 입어도 너무 예뻐서 그중에 한 벌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희선의 눈에도 예쁜데 신랑이 될 태하의 눈에는 오죽할까. 시종일관 홀린 듯이 시현만 바라보느라, 정작 드레스를 고르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를 보지 말고 드레스를 보라고.”
“어? 어.”
대답만 건성으로 해 놓고 또 멍하니 얼굴만 바라보는 태하에게, 결국은 시현이 눈을 흘겼다.
“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희선의 눈빛이 어느덧 쓸쓸함에 물들었다. 옛일을 떠올린 탓이었다.
스무 살 때, 레온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서 꼭 데리러 올게요. 나하고 같이 미국에 가요.]
허락을 받아 올 테니 결혼하자는 말이었다.
가 버린 채 연락이 끊겨버린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희선은 가끔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러나 그녀는 끝내 신부가 되지 못한 채로 어머니가 되었고, 어느덧 그 아들이 자라서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희선은 자꾸만 표정에 어리는 회한을 지우려 애를 썼다. 행복을 만끽해야 할 새신부 앞에서 착잡한 마음을 내보일 수 없었다.
“참 어렵다. 어쩜 입는 것마다 그전 것보다 예쁘니?”
결국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두 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고른 것은 겨울의 신부에게 어울리는, 눈꽃 같은 레이스로 온통 뒤덮인 드레스였다.
“엄마, 잠깐 하나만 더 봐주실래요?”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입고 왔던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온 시현이 희선의 손을 붙잡고 도로 드레스가 있는 안쪽 룸으로 향했다.
“이거 어때요?”
시현이 가리킨 드레스에, 희선은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여태 시현이 입었던 드레스들은 모두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것들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장식도 레이스도 전혀 없이 그저 전체가 순백의 실크로만 이루어진 드레스였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우아하다. 소박한 희선의 취향에 딱 어울리는, 그런 드레스였다. 짜르르 윤기가 흐르는 풍성한 치맛단을 저도 모르게 만져 보고 싶어지는 것을 꾹 참고, 희선은 물었다.
“이것도 너무 예쁘구나. 그런데 아까 고른 드레스는 어쩌고?”
“엄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한번 입어보시라고요.”
시현의 말에 희선은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얘는,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드레스를 입겠니?”
희선은 원래부터 고아여서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래서 일가친척도 없었고, 20년이 넘게 숨어다니며 사느라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카레 가게에서 일해 주는 아줌마가 전부였다.
결국 결혼식을 하게 되면 하객들이라곤 모두 레온의 지인들일 텐데, 희선은 그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그 사람에 비해 한참 부족한 자신을 굳이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혼주 한복이지 웨딩드레스가 아니다. 웨딩드레스를 보니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입을 주제는 아니었다. 괜히 나이 먹고 주책일 뿐.
마음씨 고운 시현이 제 쓸쓸한 심정을 눈치챘다고 생각한 희선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렴.”
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옛날에 말이에요. 아빠가 엄마한테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미국 가신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혹시 아세요?”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레온에게 그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는 ‘집에 갇혀버리는 바람에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고 간단히만 설명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라고 강요하시는 걸 거역하느라 몇 달 동안 책 한 권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지내셨대요.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게 하고…….”
시현이 전해주는 말을 듣고, 희선은 곧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그토록 고초를 당하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나 때문에…….
“그때 아빠는 웨딩드레스 입은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루하루를 버티셨대요. 꼭 이겨내서 엄마를 데리러 가야지, 꼭 예쁜 신부로 만들어줘야지, 하면서요.”
시현이 조심스럽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레온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결국은 볼 수 없게 됐다고 서운해하시더라고요.”
쓸쓸한 레온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희선은 여태 그가 그토록 결혼식을 원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정말 결혼식 안 해도 괜찮겠어요?]
레온은 그렇게만 물었지, 자기가 결혼식을 꼭 하고 싶다고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자칫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 마음 한 자락 내보이지 않은 채 꽁꽁 숨겨놓고 있었던 남자를 생각하자 가슴이 조용히 벅차올랐다.
레온이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을 때, 희선은 그에게 울며 매달렸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될게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알고 보니 단순한 오해였지만 그때 한 말만은 진심이었다.
남들은 마흔이 훌쩍 넘어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보고 주책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의 곁에 서기에는 말도 안 되게 초라한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더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고 싶다는데 그까짓 것들이 다 무슨 상관일까.
희선은 그를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
언젠가 그가 간절히 부탁했었다.
[내가 당신한테 갈게요. 많이 갈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딱 한 발짝만 나한테 와줘요.]
이제 그녀는 달려갈 생각이었다.
희선은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눈앞의 드레스를 새삼 바라보았다.
“……맞을까?”
시현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
레온은 모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와서 드레스 숍으로 달려갔다. 시현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희선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지금쯤 희선이 어떤 심정으로 웨딩드레스를 바라보고 있을까. 늘 사랑하는 여자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남자에게는 안 봐도 훤히 보였다.
우리 시현이 예쁘다, 하면서 애써 웃어 보이고 있겠지. 자꾸만 쓸쓸해지는 자신을 속으로 다그치면서.
운전기사를 닦달해서 겨우 도착했는데 정작 숍에는 태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레온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시현이 드레스는 벌써 골랐니? 네 엄마는?”
“잠깐 밖에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태하가 웃음을 물고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세요, 아버지. 드레스 입은 거 보셔야죠.”
레온은 앉아서 기다렸다.
“오픈하겠습니다.”
잠시 후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차락, 하고 커튼이 열렸다.
안에서 나타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고 레온은 숨을 멈췄다.
“나 괜찮아요?”
희선이 수줍은 듯이 물었지만 레온은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토록 꿈꿔왔던, 아니 그보다도 더 아름다운 신부가 눈앞에 있었다.
태하도, 시현도 어디 갔는지 어느덧 보이지 않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있는 레온을 향해, 희선이 사뿐사뿐 다가왔다.
“우리 결혼식 때 입으려고요.”
그제야 레온은 가슴속에만 묻어두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언젠가는 꼭 당신의 손을 잡고 웨딩 로드를 걷고 싶었어요. 부케를 든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었어요.”
목이 메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희선은 조금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아쉽네요. 좀 더 젊었을 때 입었으면 예뻤을 텐데.”
레온은 고개를 젓고 희선의 손을 붙잡아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당신은 몇 살이 돼도 아름다운 내 신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