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갑을이 바뀌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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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갑을이 바뀌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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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갑을이 바뀌는 순간
2023.01.20.
가을이 점점 깊어져가는 어느 날. 정임은 화란의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사돈댁으로 달려갔다.
“거기 앉으세요.”
예비 시어머니가 왔는데도 아현은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았다. 정임이 엉거주춤 소파에 앉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화란이 입을 열었다.
“슬슬 예단 문제를 의논해야 할 것 같아서 오시라 했습니다.”
예단! 정임은 귀가 번쩍 띄었다.
시현과 우진의 혼사가 깨졌을 때 제일 속 쓰렸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예단 문제였다. 골라놓기까지 했던 명품 가방을 못 받게 되지 않았던가.
‘시현이 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도 천만 원짜리 가방이었는데, 아현이 얘는 부잣집 딸이니까 훨씬 더 비싼 걸 해 오겠지?’
정임은 모처럼 마음이 들떴다.
“아유, 예단이라니요? 뭘 그런 걸 다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손을 내저었다. 화란에게 하도 단단히 혼이 나서 군기가 바짝 든 탓이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저희는 그저 대충 구색만 맞춰 주셔도 충분…….”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계십니까?”
화란의 눈초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결혼식에 신혼여행, 신혼집까지 다 준비하는데 왜 예단을 우리가 해요? 그쪽에서 해 오셔야지요.”
“……예?”
정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쪽에서 집을 해가면 상대편에서 예단을 해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정말로 아들자식 알몸으로 장가보내실 생각이셨어요?”
화란이 못마땅한 눈으로 정임을 훑어보았다.
“사람이 원, 양심이란 게 있어야지?”
날벼락을 맞아 멍해져 있는 정임에게, 화란이 우아한 손길로 쪽지를 내밀었다.
“아현이 예물이랑 합쳐서 몇 가지 적어봤습니다.”
정임은 쪽지를 받아들었다. 맨 첫 줄에 쓰인 물품부터 숨이 턱 막혔다.
하필 시현과 함께 가서 예단으로 골랐던 바로 그 명품브랜드의 가방이 화란과 아현의 몫으로 각각 하나씩 적혀 있었다.
‘그 비싼 걸 두 개씩이나?’
그러나 가방은 시작에 불과했다. 보석에, 밍크코트에, 양복에, 이불에, 반상기에…….
손을 부들부들 떠는 정임을 보면서 화란이 비꼬듯 물었다.
“왜요? 못 하시겠습니까? 그럼 혼사고 뭐고 그냥 다 없었던 일로 할까요?”
“아, 아닙니다!”
정임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젓자 그제야 화란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나마도 사돈댁 형편을 봐서 많이 생각해드린 줄 아세요.”
*
화란이 요구한 예단과 예물은 줄잡아 억대에 가까웠다.
[아들 장가보내면서 그 정도도 못 해줘? 아현이 외동딸이야, 어차피 나중에 그 집 재산이 다 내 거라고. 왜 엄마는 그렇게 늘 한 치 앞을 못 봐?]
우진이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결국 정임은 집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야 했다.
그뿐인가. 화란은 백화점까지 굳이 정임을 동행시켰다.
“어머님, 이것 좀 들고 있어 보세요.”
아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정임에게 제 가방과 옷가지를 내밀었다. 숫제 하녀 취급이었다.
“엄마 완전 괜찮은데?”
“그래? 난 좀 너무 튀어 보인다, 얘.”
화란과 아현이 화기애애하게 가방을 고르는 동안, 뒤에서 정임은 모녀의 짐을 든 채로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떠니, 아들?]
[이야, 우리 엄마 진짜 젊어 보인다. 엄마가 시집가는 거 같은데?]
[잘 어울리세요, 어머님.]
그때의 행복했던 기분을 떠올리니 갑자기 목이 콱 메어 왔다.
‘그래도 시현이 걔가 애교는 없어도 수더분하니 참 착했는데…….’
꽃이 지고야 비로소 봄인 줄 깨닫는 정임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이것저것 들어 본 끝에 화란과 아현은 핸드백을 하나씩 골라 들었다. 두 개 합쳐서 이천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잘 쓸게요, 어머님.”
고개를 까딱하는 아현의 옆구리를, 화란이 쿡 찔렀다.
“얘는 뭘 당연한 걸 받으면서 인사까지 하고 그러니? 이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결제하는 정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방을 사고 나서도 아현 가족의 예복과 화란의 밍크코트, 아현이 예물로 받을 보석 따위를 사는 데 또 수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하나같이 정임이 평생 만져볼 엄두도 못 냈던 사치품들이었다. 결제할 때마다 정임은 생살을 뜯기는 기분이었다.
거의 1억에 가까운 돈을 단 반나절 만에 시원하게 탕진하고 나서야 모녀는 겨우 백화점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끝이 아니었다.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낑낑대며 따라 들어오는 정임을 향해 화란이 말했다.
“아유, 그까짓 거 몇 가지 산다고 점심도 여태 못 먹었네. 안사돈도 피곤하실 테니 간단히 멸치 육수 내서 국수나 말아먹고 치웁시다.”
하녀에 짐꾼으로 부려먹은 것도 모자라 밥까지 차려내라는 소리였다.
“예, 사부인.”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할까. 찍소리 못하고 어깨가 축 처진 채 주방으로 향하는 정임의 뒷모습을 보고, 아현이 소곤거렸다.
“좀 심한 거 아냐? 그래도 명색이 시어머닌데.”
“모르는 소리 말아. 저 여자가 보통내긴 줄 알아? 자칫하면 네가 시집살이해, 이것아.”
화란이 눈을 흘겼다.
“초장부터 군기를 바짝 잡아놔야 앞으로도 감히 너한테 시어미 노릇을 할 생각을 못 하는 거야. 엄마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넌 가만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단단히 일러놓고 화란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너 오늘 산부인과 검진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반차 내고 데리러 온댔어. 같이 갈 거야.”
아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우진은 아현에게 그야말로 입안의 혀처럼 굴고 있었지만 물론 아현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빨리 시간이 지나서 아이를 낳아서 줘버리고 이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화란은 소파에 앉아 홈쇼핑을 보며 노닥거리고, 아현은 피곤하다며 제 방에 들어가 드러눕고, 정임은 부엌에서 국수를 만들고 있을 때 우진이 도착했다.
“어머님, 저 왔습니다.”
“왔나.”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화란에게, 우진은 더없이 싹싹하게 물었다.
“예단 쇼핑은 잘하고 오셨습니까?”
“예산이 얼마 안 되니 뭐 살 거나 있겠나? 대충 구색만 갖추는 척만 했네.”
“저희 어머니는요? 집에 가셨나요?”
화란이 턱짓으로 주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가 보게.”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멸치 육수에 간을 맞추고 있던 정임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
처갓집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고 있는 제 어머니를 본 우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충격에 물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우진이 달려들어 정임의 손에 들린 소금 통을 거칠게 빼앗았다.
‘그래도 내 생각 해주는 건 역시나 아들밖에 없구나!’
정임이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한 순간.
“집에서 하는 것처럼 소금을 들이부으면 어떡해? 장모님 혈압 있으신 거 몰라?”
우진이 눈을 부라리며 소금 통을 흔들어 보였다.
“장모님이 엄마같이 아무거나 막 먹어도 탈 안 나는 분인 줄 알아? 신경을 써야지, 신경을!”
얼어붙은 제 엄마를 본체만체하고, 우진은 등을 돌려 아현의 방으로 향했다.
“나 왔어요, 아현 씨. 병원 갑시다.”
방금 제게 타박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봄바람 같이 살랑거리는 목소리에 또다시 서러움의 눈물을 삼키는 정임이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님.”
우진과 아현이 산부인과에 가기 위해서 나가고, 집에 남은 화란은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장모님 혈압 있으신데 집에서 하는 것처럼 짜게 하면 어떡해?]
아까 주방에서 우진이 제 엄마를 타박하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던 것이다. 그 순간의 정임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동류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화란은 정임의 심술보를 일찌감치 파악했고, 죽어도 그 심보를 제 딸에게 부리게 만들지 못할 셈이었다.
“아유, 허기져 죽겠네. 어디서 밀을 갈아서 국수를 뽑아 갖고 오나 원.”
들으라는 듯이 주방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하는데, 마침 거실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우아하게 대답하는데 성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 야, 신화란! 너 자꾸 내 전화 피할 거야?
김 기사였다. 가슴이 철렁한 화란은 얼른 안방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자기도 참, 내가 왜 자기 전화를 피해? 요즘 이래저래 좀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화란은 일단 상대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
원래 김 기사는 화란이 결혼 전부터 만나던 애인이었다. 운전기사로 채용해서 집에서까지 밀회를 나누며 몇 년을 지냈다.
그러다가 같이 산부인과를 갔다 걸릴 뻔한 사건 때 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김에 같이 내보냈던 것이다.
문제는 아현이 있으니 내보내고 나서도 도통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 결국은 평생에 걸쳐서 돈을 뜯기고 있었다.
- 이번엔 확실하다니까. 딱 한 장만 해주면 된다는데 그걸 못 해줘?
“글쎄 지금은 내가 한 푼도 없다니까? 자기도 알잖아, 아현이 아빠가 돈줄 꽉 쥐고 안 놓는 거.”
이건 변명이 아니었다. 시현에게서 뜯어낼 돈만 믿고 흥청망청 써댄 덕분에 화란도 여태 빚에 쫓기는 신세였다.
그러나 물론 상대는 그런 화란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았다.
- 누가 아현이 아빠라는 거야?
김 기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지금 사람 무시해? 내 자식 평생 딴 놈한테 빼앗기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화란은 울컥해서 외치고 싶었다.
‘대체 당신이 아현이한테 뭘 해줬다고 내 자식이라는 거야? 아현이 핑계로 수십 년 동안 돈이나 뜯어갔지, 언제 연필 한 자루 사줘 봤냐고!’
그러나 김 기사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자칫 이 인간이 수틀려서 남편을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파멸이다.
역시나 김 기사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 아무래도 내가 강재호 그놈하고 담판을 지어야지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내 딸 내놓으라고!
화란은 가슴이 철렁해서 매달리다시피 말했다.
“아유, 내가 언제 안 해준댔어? 내가 반지라도 팔아서 어떻게 마련해 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자기야, 응? 하긴 우리 자기는 화낼 때가 제일 매력 있더라.”
애교까지 떨어서 겨우겨우 달래 놓은 후에야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에휴, 내 팔자야…….”
전화를 끊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왠지 등골이 서늘했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본 순간, 화란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정임이 문가에 서서 씨익, 하고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랑 통화를 하시길래 그렇게 자기야, 자기야 하실까요?”
“아, 안사돈……!”
“사돈어른은 아닌 것 같던데.”
화란은 어떻게든 변명을 해 보려고 했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그게 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화란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앞치마가 날아와서 얼굴을 턱 하니 가리는 바람에.
앞치마를 벗어던진 정임이, 거만하게 말했다.
“일단 커피부터 한잔 타 와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