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 출생의 비밀 (138/181)


#138. 출생의 비밀
2023.01.24.


하루아침에 날이 급격히 추워졌다. 전날에 비해 기온이 10도 이상 뚝 떨어지는 바람에 아침에는 부랴부랴 겨울 코트를 꺼내 입고 출근해야 했다.


“시현 씨, 날도 추운데 어묵탕에 소주 한잔 콜?”

퇴근 시간, 미주가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말을 걸자 시현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어쩌지? 나 오늘 신혼집에 가구 들어오는 날이라 바로 가봐야 하는데.”

하긴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신부에게 술 먹자고 하는 게 무리긴 했다. 미주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그렇구나. 그럼 담에 먹지 뭐.”

“이번 주는 좀 힘들고, 다음 주쯤 먹을래?”

“아냐, 지금 한창 정신없을 땐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결혼 준비나 열심히 해.”

결국 혼자 터덜터덜 회사를 나오며 미주는 중얼거렸다.


“아 씨, 무슨 날씨가 중간이란 게 없냐.”

어제까지 분명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씨였는데, 하루아침에 겨울이 돼 버렸다. 칼바람이 사정없이 목덜미를 파고들어서, 가뜩이나 허전한 마음이 시리디시렸다.

시현이 여태 남자 잘못 만나 마음 고생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곁에서 지켜본 미주다.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됐으니 진심으로 기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짝이 사라지니 당장 퇴근 후에 소주 한잔 같이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소개팅이나 한번 시켜주고 시집을 가라 마라 말씀을 하시든지요!]

최근에 주변인들을 협박해서 얻어낸 소개팅을 세 번이나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하나같이 그 자리에서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잘 만나긴 했는데…….


[미주 씨, 성격 참 좋으시네요.]

[미주 씨,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래 놓고는 헤어지고 나면 짠 것처럼 애프터가 없는 것이다. 연달아 세 번이나 같은 일을 당하니 있던 자신감도 달아날 판이었다.

미주는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회사에서 그녀의 평판은 그랬다. 성격 좋은 사람. 밝고 재미있는 사람. 의리 있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중에 여자로서 매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제 곧 해가 바뀌면 서른네 살.


‘슬슬 결혼은 포기해야 하나?’

요즘 세상에 굳이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연애는 하고 싶었다. 가까이에 다 죽은 연애세포도 살아나게 만드는 커플이 있어서 더 그랬다.

윤태하 본부장이 시현을 바라볼 때의 눈빛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꼭 본부장님처럼 멋진 남자가 아니라도 좋다. 누구라도, 나를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현실은 소개팅도 줄줄이 물먹는 신세.


“에휴…….”

한숨을 푹 내쉬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우는 아이 뺨 때리는 격으로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못 살아!”

미주는 급하게 뛰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버스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됐는지, 전광판에 쓰여 있는 다음 버스 도착은 10분 후. 급하게 콜택시 앱을 켰지만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택시도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하필 정류장에는 지붕도 없어서, 미주는 그 차가운 비를 그대로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아니, 바깥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직 미주의 세상에만 비가 멈췄을 뿐.

올려다보자 키가 훌쩍 큰 누군가가 미주의 머리 위에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추운데 같이 쓰시죠.”

미주는 너무 놀라서 대답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



“슬슬 김장을 할 때가 됐네요.”

화란에게 전화한 정임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제 막내아들놈도 따로 살림을 나겠다, 첫째네하고 둘째네 보내줄 것까지 하면 적어도 백 포기는 해야 할 텐데 저희 집이 너무 좁아서 큰일이네요.”

정임의 속내를 알아차린 화란이 냉큼 대답했다.


- 아유, 무슨 걱정이십니까? 저희 집에서 하시면 되지요. 저희 정원이 수도 시설도 잘돼 있겠다, 아주 배추 씻고 절이기 그만이거든요.”

“그렇지요?”

그제야 정임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헤벌쭉 웃었다.


“그럼 사양 않고 사돈댁으로 배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임은 화란의 집에서 김장을 하게 되었다.

정원사까지 고용해서 잘 가꾼 정원 한구석에 시뻘건 고무통이 놓이고, 배추와 무 따위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가정부와 화란이 고무장갑을 끼고 허리가 부러져라 배추를 절이는 와중에, 정임은 정원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훈수를 두었다. 화란이 애지중지하는 비싼 커피 잔으로.


“거 빡빡 잘 좀 씻으세요. 원 그 나이 먹도록 제 손으로 김장도 한번 안 담가 봤나.”

마침 외출했다 돌아온 아현이 이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한 것은 물론이었다.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놀라서 묻자 정임이 타박했다.


“얘, 넌 멀거니 서서 뭐 하니? 얼른 와서 같이 일하지 못하고.”

아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김장을 담그라고? 나더러?

이 아줌마가 벌써 노망이 났나. 당장 대들려고 하는 순간, 화란이 황급히 딸의 손목을 붙잡고 저만치 구석으로 끌고 갔다.


“너 잘 들어. 앞으로 뭐든지 저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내가 왜?”

“잘못하면 너하고 나하고 나란히 인생 끝장날 판이란 말이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정임이 화란에게 애인이 있는 줄만 알지, 아현의 출생에 얽힌 비밀까지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정임이 재호에게 이 건을 일러바치게 되면, 자칫 거기까지 밝혀지고 말지 몰랐다.


‘아현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걸, 그 고지식한 인간이 알게 되면?’

그야말로 파멸이었다. 죽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각오 하에 화란은 정임에게 설설 기고 있었다.

화란의 심각한 표정에 아현도 덩달아 겁을 먹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생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아온 제 엄마가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 따위를 담그고 있을 리가 있나.


“갑자기 왜 그러는데? 엄마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

“그냥 닥치고 하란 대로 해, 이것아!”

화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자칫하면 네 아버지가 너 주겠다던 땅이고 상가고 다 날아간다고!”

아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 애까지 낳으려고 결심했는데, 그게 날아가면 안 되지!

협박하다시피 딸을 윽박질러 놓고, 화란은 정임에게 가서 비굴하게 말을 꺼냈다.


“저어, 안사돈 어른. 아현이는 애도 가진 몸인데 좀 쉬게 해주시지요.”

그래도 아현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정임의 손자 아닌가. 일말의 희망을 걸고 부탁했지만 정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해버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들 시절엔 몸 풀자마자 곧바로 밭에 나가 김도 맸는데 이까짓 김장 몇 포기 하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요.”

그러면서 아현의 날씬한 몸을 새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비리비리하게 말라빠져가지고 어디 애나 제대로 낳을 수 있으려나 몰라.”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아현을 향해, 화란이 얼른 눈치를 주었다.


‘눈 깔지 못해?’

결국 아현은 땅바닥에 엉거주춤 쭈그려 앉아 절인 배추에 속을 채워 넣는 신세가 되었다.

정임은 고무장갑은커녕 비닐장갑조차 끼지 못하게 했다.


“음식이란 손맛이고 정성이야. 어디서 감히 장갑을 꺼내?”

맨손으로 시뻘건 양념을 만지자니 따갑고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눈물이 절로 나왔지만 정임의 눈치가 보여서 쉴 수도 없었다.


“쯧쯧, 다 만들어놓은 속도 제대로 못 넣는 꼴 좀 봐. 원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정임은 내내 그림같이 앉은 채로 트집을 잡아댔다.


“대체 사부인은 여태 따님한테 뭘 가르치신 겁니까? 저래서 어디 남편 밥이나 제대로 해먹이겠어요?”

“죄송합니다, 안사돈 어른.”

“우리 우진이가 내 음식 먹고 자라서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너. 지금부터라도 노력을 해야 내조를 하지.”

정임이 아현을 향해 거드름을 피워댔다.


“앞으로 내가 제대로 가르쳐줄 테니까, 고마운 줄 알고 열심히 배워.”

아현은 곧 죽고만 싶었다.

*

재호는 길거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한참을 고뇌하고 있었다.


[진짜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아현이가 당신 딸이라도 이럴 거냐고요!]

우진의 집안과 상견례를 하던 날, 화란의 입에서 실수로 튀어나온 한마디가 내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었다. 그 말을 하고, 아내는 무척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고 보니 그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엄마 아빠 딸은 맞고?]

아현이 화란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하긴,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 딸은 맞겠네.]

그때는 설마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고 넘겨버렸는데…….

태하 집안과의 상견례 때, 희선이 했던 말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김 기사 방에서 사모님이 나오시는 걸, 제가 보았습니다.]

희선의 말에 의하면 화란은 계속 김 기사와 바람을 피우는 사이였다고 했다.

희선은 무려 7년이나 재호의 집에서 일했다. 딱히 긴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 지켜봤으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선이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란을 믿기로 한 것은, 화란이 워낙 강경하게 부정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두려운 것이 있어서였다.

아현.

열 살이나 어린 아내는 좀처럼 아이를 갖지 못했다. 결혼하고 3년이 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아서, 나이 많은 내 탓인가 싶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볼까 고민하는 중에 기적처럼 아현이 생겼던 것이다.

아현을 끝으로 화란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현은 재호에게 있어 자신이 제대로 된 남자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만에 하나, 아현이가 내 딸이 아니라면……?’

정말 두려운 것은, 아내의 부정 그 자체보다도 아현에 관한 문제였다.

비록 요즘 젊은 아버지들처럼 자상한 아빠는 되어주지 못했지만, 재호는 아현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외동딸인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재산을 주겠다고 조건을 걸면서까지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했던 것도, 딸이 제 엄마를 닮아서 임신이 힘든 체질일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모처럼 생긴 아이를 지웠다가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할까 봐.

물론 아현이 아이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 낳고 살다 보면 정은 저절로 붙는 거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옛날 방식으로 사고하는 인간인 재호는, 그게 딸을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런 딸이, 생판 남의 아이라면.

상상만 해도, 아니 차마 상상조차 하기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애써 눈 딱 감고 아내를 믿기로 했던 것인데…….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 가시처럼 작은 의혹들이 합쳐져, 이제는 커다란 쐐기가 되어 재호의 가슴을 숨도 못 쉴 정도로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재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앞에 있는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국유전자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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