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 진심 어린 사과 (139/181)


#139. 진심 어린 사과
2023.01.27.



 

- 케네디 부자가 같은 날 동시에 그랜드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 소식이 새어나간 것이 어디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호텔 웨딩홀 관계자에게서인지, 아니면 드레스 숍에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 신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뷰티 숍에서인지.

출처조차 명확하지 않은 이 소식을, 온갖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해댔다.

반 더 린드 LLC의 케네디 회장은 아들의 결혼과 관련된 기자회견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유명인이 되었지만, 원래가 재계에서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아들인 윤태하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나란히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밖에 나가면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 자체만으로도 화젯거리인데, 부모와 자식이 같은 날에 결혼한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던가. 당연히 모든 언론이 취재하고 싶어 군침을 흘려댔다.

그러나 결혼 소식이 온갖 언론을 장식하면서도, 정작 결혼식에 취재 허가를 받아낸 곳은 아무도 없었다. 일체의 취재는 물론 하객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 케네디 부자 측의 입장이었다.

초대를 받은 것은 신랑 신부의 극히 일부 지인들뿐, 하다못해 재계나 정계에서조차 청첩장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유력인사 몇 명이 넌지시 참석 의사를 전했다가 정중히 사양을 당했다는 가십 기사까지 등장했다.

모든 언론이 취재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 이 두 결혼식에 다 초대받은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미주였다.


“미주 씨. 저번 주에 못 먹은 소주, 오늘 콜?”

퇴근 시간,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있는 미주의 옆구리를 시현이 쿡 찔렀다.


“쏘리. 오늘 데이트 있어서 패스.”

미주의 대답에 시현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뭐야? 미주 씨 남자 있었어? 누구야? 뭐 하는 사람이야? 잘생겼어? 몇 살…… 읍.”

당장 호구조사에 들어가는 시현의 입술을, 미주가 검지를 갖다 대며 막아버렸다.


“쉿, 아직 사귀는 거 아니니까 설레발 금지. 잘되면 그때 얘기해줄게.”

황당한 표정의 시현을 뒤로하고, 미주는 춤추는 듯한 걸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옷깃을 파고드는 차가운 겨울바람마저도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열 번을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내 인생에도 이런 로맨틱한 일이 생기다니!

버스정류장에서 우산을 씌워줬던 잘생긴 남자의 이름은 서현우. 미주와 동갑으로, 직업은 증권사 애널리스트였다.

그날은 마침 차를 놔두고 출근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비를 맞고 있는 미주를 보고 우산을 씌워줬다는 것이다.


[저어, 혹시 제가 커피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먼저 말을 꺼낼 때는, 씩씩한 미주도 긴장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날 이후로 가까워져서 매일같이 통화를 했고, 주말에도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놀랍게도 반한 것은 미주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남자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 한 달 후의 약속을 벌써 잡으려 들 정도로.


“미주 씨, 12월 첫째 주 토요일에 뭐해요?”

식사 중에 현우가 불쑥 물었다.


“뮤지컬 티켓이 생겼는데, 미주 씨하고 같이 하고 싶어서요.”

하필 그날이야. 미주는 무척 안타까워하며 대답했다.


“그날은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요.”

“중요한 일?”

“네. 제일 친한 회사 동료 결혼식이 있거든요.”

현우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요?”

“아, 아실 수도 있겠다. 그랜드호텔 케네디 회장님 있잖아요? 왜 한창 기자회견으로 떠들썩했던.”

“당연히 봤죠. 나와서 아들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맞아요. 그 아드님 결혼식이에요. 거기서 말했던 며느리 될 사람이 바로 제 동료거든요.”

미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 그래요? 결혼식이 몇 신데요?”

“점심때쯤이에요.”

“그럼 끝나고 만나도 충분하겠네요. 뮤지컬은 오후 시간이니까.”

“그게…….”

미주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미 기사로도 많이 나간 얘기니까 괜찮겠지.


“사실은 케네디 회장님도 그 뒤에 이어서 결혼하시거든요. 제가 거기에도 초대를 받아서 가 봐야 해요.”

케네디 회장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은 정말 극히 일부의 지인 몇 명뿐이라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이 된 것을 미주는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지난번 점집 사건 때 세운 공로 덕이었다.


“그럼 그날은 결국 못 만나겠네요.”

현우가 서운한 얼굴을 하는 바람에 미주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문득 번쩍, 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저하고 결혼식 같이 가시겠어요? 그랜드호텔 결혼식장 식사가 무척 맛있다는데요.”

“정말 그래도 돼요?”

현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네. 원래는 초대장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동반자 있어도 괜찮다고 했거든요.”

현우가 바짝 다가앉았다.


“그럼 케네디 회장 결혼식도 볼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좀…….”

미주는 말끝을 흐렸다. 시현의 결혼식이야 학창시절 친구나 회사 동료들도 참석하는 자리지만, 케네디 회장 결혼식은 문제가 다르다.

현우는 적잖이 실망한 얼굴을 했다.


“반 더 린드 케네디 회장, 이코노미스트나 포브스 같은 잡지에도 커버로 나오는 사람이잖아요. 결혼식 궁금한데.”

하기야 현우는 경제 쪽에서 일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미주는 이미 현우에게 푹 빠져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데, 어떻게든 들어 주고 싶었다.

윤태하 본부장이 말하길, 케네디 회장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다고 했다. 사례로 주겠다고 한 그랜드호텔 프리패스까지 사양했으니까, 대신에 남자친구 데려가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지 않을까.

고민 끝에 미주는 말했다.


“한번 부탁은 드려볼게요.”

 

*

시현과 태하의 결혼식이 끝나고 난 뒤에, 바로 그 장소에서 레온과 희선이 뒤이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당신이 죽어도 아이들 먼저 결혼시키자고 했죠. 이러면 먼저 시키는 거 맞잖아요?]

레온이 내세운 완벽한 논리였다.

결혼 준비를 모두 마치고, 느긋한 마음으로 맞이한 결혼식 전의 마지막 주말.

네 사람은 사이좋게 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다. 시현의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산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겨울날치고는 날씨가 포근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예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태하와 시현은 신랑 신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산소에 거의 도착했을 때, 태하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태하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눈짓을 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부모님의 무덤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작은아버지, 강재호였다.


“형님, 형수님. 제가 시현이한테 모질게 굴었던 벌을 이렇게 받나 봅니다.”

재호는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무덤에 뿌리고 나서, 자신도 마시고는 중얼거렸다.


“시현이가 쫓겨날까 봐 그랬다는 거, 예, 변명이지요. 결국은 제 마누라, 제 딸년을 편드느라 그 어린애가 구박받는 거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았습니다.”

띄엄띄엄 말하던 재호가, 결국 무덤을 부여잡으며 허물어지듯 외쳤다.


“결국 제 핏줄이라곤 하늘 아래 시현이밖에 없는 거였는데……!”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엄연히 친딸인 아현이 있는데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었나.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재호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울었다. 늘 무뚝뚝했던 작은아버지가, 저토록 피를 토하듯 통곡을 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못한 지 한참 됐는데, 무덤은 주변까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평소에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

시선을 돌리자 희선과 레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렴, 하듯이.


“작은아버지.”

다가가서 가만히 부르자 재호가 놀란 듯 움찔하며 울음을 그쳤다.


“시, 시현아.”

작은아버지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양복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요즘 사업이 좀 어려워서 말이다. 마음이 울적해서 형님 뵈러 왔는데…… 여기서 널 마주칠 줄은 몰랐구나.”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 것에 시현은 확신을 얻었다.


‘역시 그랬구나.’

마지막으로 본 것이 겨우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작은아버지는 족히 10년은 늙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랜 미움도, 원망도 눈 녹듯 스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는 미워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평생토록 헌신했던 가족에게 배신당한, 늙고 지친 남자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질까.

고민 끝에 시현은 입을 열었다.


“저 다음 주 토요일에 그랜드호텔에서 결혼해요. 괜찮으시면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재호는 놀란 얼굴을 했다. 앞으로 평생 동안 시현의 곁에 얼씬도 말라고 레온에게 경고를 받은 후 아닌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무슨 낯으로 거길…….”

시현은 힘주어 말했다.


“제 아버지의 동생이시잖아요.”

그 말에 재호의 지친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시현아. 내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너한테……!”

전에 상견례 때도 재호는 시현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었다.


[너한테도 면목이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 하는 사과는 그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후회가 절절하게 묻어 있었다.

한참 만에야 작은아버지는 눈물을 그치고 무덤 앞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에 태하가 와서 섰다. 작은아버지를 향해 묵례를 한 후, 태하는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어머님, 사위 인사드립니다.”

시현도 그의 곁에 섰다.


“엄마, 아빠.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

입을 열자마자 눈시울이 확 뜨거워지는 바람에 시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시현 씨 덕분에 살았고, 시현 씨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인생은 오로지 시현 씨를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 시현의 손을 꼭 붙잡고, 태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평생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그때, 어디선가 겨울바람 같지 않은 따스한 기운을 품은 바람 한 줄기가 살랑거리며 불어와서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복을 입은 신혼부부가 함께 절을 올리고, 이어서 희선과 레온도 무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예쁜 따님을 두고 얼마나 눈 감기 힘드셨어요. 이제 저희가 딸처럼 아끼며 살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따님은 저희에게 맡기고, 편히 쉬십시오.”

시부모가 될 희선과 레온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면서, 시현은 속으로 가끔씩 낳아주신 부모님을 떠올리곤 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하늘에서 보시면 혹시 서운해하지 않을까.


“형님하고 형수님께서 두 분께 무척 감사해하실 겁니다.”

마치 그런 시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작은아버지는 희선과 레온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핏줄인 저조차 주지 못한 사랑을 제 조카에게 주신 은혜, 저 역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난생처음으로 시현은 재호에게서 숙부다운 모습을 보았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재호에게 말을 건네는 레온의 목소리 역시 이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웠다.


“전에 제가 사업상 도움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린 건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십시오.”

재호가 눈물을 훔치고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업해야지요. 많이 도와주십시오.”

어느덧 목소리에 슬픔이 가시고, 대신에 각오가 깃들었다.


“열심히 회사 키워서, 제 핏줄한테 다 물려줄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