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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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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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함정
2023.01.31.
결혼을 앞두고 희선은 드디어 카레 가게를 그만두었다. 대신에 가게를 닫지는 않고,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친한 언니에게 넘기기로 했다.
사실 여태 가게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꾸준히 밥을 먹으러 오는 결식아동들 때문이었다. 다행히 앞으로는 그랜드호텔의 지원을 받아서 새 사장이 이어가게 되었다.
마땅한 신혼집을 찾기가 어려워서, 결혼식 후에도 당분간은 계속 호텔에서 지내게 되었다.
결혼식 전까지 희선은 지금까지 지내던 작은 객실에 계속 머무는 대신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레온이 쓰는 객실로 옮겨서 함께 지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신혼여행지도 결정되고 모든 준비가 끝난 시점.
단 한 가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게 있다면, 결혼선물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 정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글쎄 없다니까요.]
가문에 내려오는 보석조차도 다 시현에게 줘버린 희선이, 레온은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뭐라도 해주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
[뭐든 다 사줄 테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요.]
하지만 희선은 정말이지 필요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레온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카레 가게에 잠시 들렀다가 호텔로 돌아온 희선은 자신의 객실로 돌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유니폼을 입은 메이드가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놀람이 가시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가 사용하는 객실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깜빡 잠이 들었을까.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살았던 시절에, 희선은 한동안 호텔 룸메이드로도 일했었다. 비록 그랜드 호텔 같은 5성급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즈니스호텔이었지만, 룸메이드가 하는 일이야 크게 다를 게 없을 터였다.
생각보다 무척 힘든 일이었다.
침대와 베개 시트를 갈고, 수십 가지에 달하는 온갖 비품과 어메니티를 채워 넣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물기를 없애고, 타월을 교환하고, 컵을 씻고, 구석구석 먼지 제거에, 바닥 청소에, 환기에…….
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주어지는 시간이 룸 한 개 당 겨우 30분 남짓. 3년 정도 일하고 나니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룸메이드의 지친 얼굴에, 과거의 자신이 겹쳐져 보였다.
“…….”
잠든 룸메이드를 잠시 안타깝게 바라보다, 희선은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대로 문이 열려 있는 맞은편 객실에 들어가 청소하기 시작했다.
옛날 호텔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희선은 평소 자신이 머무는 객실의 정리정돈 상태를 눈여겨 봐두곤 했었다. 맞은편에 있는 것도 같은 구조의 객실이라 작업하기 어렵지 않았다.
먼저 커튼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비품을 채우고, 쓰레기를 비운 뒤 욕실 청소를 했다. 여기저기 먼지를 닦아낸 후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좀 더 자게 해주고 싶었는데, 진공청소기 소리에 깬 룸메이드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사, 사모님!”
허둥지둥 청소기를 빼앗아 드는 룸메이드의 얼굴이 말 그대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잠깐 앉았다가 깜빡…….”
회장 사모 방에서 잠든 것도 모자라, 그 사이에 제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까지 보았으니 전전긍긍하는 것도 당연했다.
“청소, 많이 남으셨나요?”
“사모님 객실하고 이 객실만 하면 끝입니다.”
룸메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빨리 끝내죠.”
“예? 사모님께서요?”
“저 베드메이킹 잘해요.”
능숙한 솜씨로 시트를 교환하는 희선을, 룸메이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룸메이드는 내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사모님이 하시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둘이서 함께 청소를 한 덕분에 순식간에 작업이 끝났다.
청소를 끝내고, 희선은 자기 방으로 룸메이드를 이끌었다.
“제 방은 청소 안 하셔도 괜찮으니까 잠깐 앉았다 가세요.”
“아니, 제가 어떻게 …….”
“인스펙터(*관리자, 감독자. 룸메이드의 작업을 최종 점검하는 사람)한테는 제가 잘 말해둘게요.”
희선이 손수 커피를 타서 내밀자 룸메이드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받아들었다.
“저어, 사모님은 어떻게 저희 일을 그렇게 잘 아세요?”
“저도 룸메이드로 일했었거든요. 3년 정도요.”
룸메이드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아요. 많이 힘드시죠?”
“힘들긴요. 그래도 그랜드호텔은 쉬는 시간도 많이 주시는 편이고, 휴게실도 잘돼 있고, 시급도 높거든요. 다른 호텔에 비하면 여기는 아주 일하기 좋아요. 마음 같아선 오래오래 일하고 싶은데…….”
룸메이드가 말하다 말고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괜찮으니까 말씀해보세요.”
몇 번이나 재촉한 후에야 룸메이드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어, 내년 초에 그랜드호텔과 계약한 용역회사가 다른 곳으로 바뀐다고 해서요. 지금 일하는 룸메이드들은 다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희선은 금세 이해했다. 희선이 일할 당시에도 룸메이드들은 호텔에 직접 고용된 직원이 아니라 용역회사 소속이었다. 그래서 몇 푼 안 되는 급여조차도 용역회사에 떼어줘야 했던 기억이 난다.
희선이 건넨 커피 잔을, 룸메이드는 차마 마실 엄두도 못 낸 채로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저도 그렇지만 룸메이드들이 다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나가면 이 나이에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할지…… 막막하네요.”
희선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
*
“아이고, 좋다. 아이고, 시원하다.”
화란의 집 거실에 놓인 안마의자에 척하니 누운 정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요즘 정임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화란의 집에 드나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비 며느리에게 시어미 노릇도 실컷 할 수 있지, 안사돈도 수족처럼 부려먹을 수 있지, 매 끼니 가정부가 차려다 바치지,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었다.
정임이 안마의자와 합체한 채로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동안, 화란과 아현은 찍소리도 못 내고 거실 바닥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었다. 정임이 마늘장아찌를 담가야겠다며 지시한 일이었다.
한 접이나 되는 마늘을 까자니 눈이 맵고 손이 아려 왔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깐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엄마. 우리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잠든 정임의 귀에 들리지 않게, 아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일단 네 아버지가 주겠다던 재산 받을 때까진 눈 딱 감고 참아. 길어야 앞으로 1년이야.”
화란이 소곤거리듯 대답했다.
아이를 낳은 후 재호에게 재산을 받고, 애는 시댁에 줘 버리고 이혼한다. 이미 모녀간에 다 합의가 된 사항이었다.
지금 당장 정임이 재호에게 입을 놀려서 아현의 출생이 발각되면 맨몸으로 쫓겨날 확률이 백 퍼센트다. 그러나 그 재산만 받게 되면, 혹 들키더라도 딸과 둘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화란이라고 평생 이러고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1년만, 하고 독하게 마음을 먹고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약점을 잡힌 거냐니까. 나한테는 좀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냐?”
화란이 쉿, 하고 잠든 정임의 눈치를 보았다.
“글쎄 넌 닥치고 하란 대로 해.”
그렇게 모녀가 마주 앉아 눈물 젖은 마늘을 까고 있는데 초인종이 급하게 연거푸 울렸다.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웬 남자가 튕기듯 집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사모님!”
재호의 회사에서 일하는 공장장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큰일 났습니다! 사장님께서 유서를 써놓고 사라지셨습니다!”
놀란 화란이 칼을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똑바로 얘길 해보세요!”
사색이 된 공장장이 사정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가족들에게는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한참 전부터 회사는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많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서 다 회사에 쏟아부었는데도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어음 결제를 막을 수가 없게 되어 회사가 어제 자로 최종 부도를 맞았다는 것이다.
“연락이 안 되고 있어서 찾아봤더니, 책상 위에 이런 게…….”
공장장이 재호의 유서를 내밀었다.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며, 찾지 말라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아니 우리는 어쩌라고!”
화란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급한 돈만 막으면 사장님도 마음을 돌리실 겁니다. 사모님은 돈만 구해주십시오. 사장님은 제가 어떻게든 찾아서 모셔오겠습니다.”
“급한 돈이 얼만데요?”
“50억 정도면 될 겁니다.”
“당장 50억을 어디 가서 구해요? 재산도 벌써 다 팔아먹고 없다면서요!”
시현에게서 뜯어낼 돈만 믿고 흥청망청 돈을 써댔던 탓에 화란은 여태 빚에 시달리는 신세였다. 50억은커녕 단돈 500만 원도 없다.
“아직 이 집이 있지 않습니까. 따님 명의로 잠실에 아파트도 있고요. 둘 다 처분하면 얼추 마련될 겁니다.”
화란과 아현이 동시에 흠칫했다.
“그 돈만 막으면요? 회사는 살릴 수 있는 거예요?”
화란의 물음에 공장장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아니 그럼 집 팔아서 막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최소한 사장님 목숨만은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허점투성이인 설명이었지만, 회사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화란과 아현은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도 느끼지 못했다.
돈이냐, 남편의 목숨이냐.
화란은 이를 악물었다.
‘나더러 길거리에 나앉으란 말이야? 이 나이에?’
공장장 말대로라면 자신들은 알거지가 된 거나 다름없다. 이제 남은 건 이 집 한 채뿐인데 그걸 팔라고?
평생 사모님으로 살아온 화란이었다. 도저히 고생을 감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현은 아현대로 아버지에게 화가 치밀었다.
‘뭐야. 애만 낳으면 상가랑 땅이랑 주겠다더니, 벌써 다 팔아먹은 거였어?’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럼 남은 건 아버지가 전부터 제 명의로 사놓았던 잠실 아파트뿐인데, 그것마저 팔아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엄마와 딸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화란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러지 말고. 우리 일단 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 보지요. 머리 좀 식히고 나면 돌아오겠죠.”
“맞아요. 우리 아빠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 아니에요.”
아현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사장님이 진짜 잘못되시면 어떡합니까?”
공장장의 말에 화란이 우물거렸다.
“어쩌겠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모녀가 나란히 함정에 빠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