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 귀여운 여자 (153/181)


#153. 귀여운 여자
2023.03.17.



 


“임신이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집에서 임신테스트를 해본 다음 날, 희선은 산부인과를 찾았다. 혈액검사를 하자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아직은 너무 초기라 초음파로는 보이지 않네요. 2주 후쯤 다시 오시면 아기집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축하한다면서도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했다.


“만 44세에 자연임신이라는 건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임신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초기에 유산될 확률도 높습니다.”

“유산……이요?”

따라서 중얼거리는 희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리하시거나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운동도 자제하시는 게 좋고, 부부관계도…….”

한바탕 주의사항을 듣고 나서야 희선은 산부인과를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냥 정기검진 받은 거예요. 괜히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이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 저는 이제 사모님 비서인걸요.”

젊은 여성 비서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전에 레온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로 희선을 돌봐 주었다가, 이제는 정식으로 희선을 전담하게 된 최 비서였다.


“사모님, 카레 가게로 바로 모실까요?”

“그래요.”

가게를 넘긴 후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잠깐씩 들러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매일 와서 밥을 먹는 결식아동들이 주인이 바뀌었다고 괜히 눈치를 볼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친한 언니인 새 사장도 마음씀씀이가 넓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얼굴도 볼 겸 당분간은 계속할 생각이었다.

차 안에서 희선은 생각에 잠겼다.


‘어제 말 안 하길 잘했네.’

어제 테스터로 두 줄을 확인하고 나서도 레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둘째는 필요 없다고 단호히 말했기 때문에 차마 말이 안 나왔던 건데, 방금 의사의 말을 듣고 보니 말하지 않기를 다행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초기에 유산될 확률도 높습니다.]

당장 2주 후에 왔을 때 아기집을 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야 희선은 자신이 아이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만약에 이 아이가 잘못된다면……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레온 역시 마음이 좋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둘째 생각이 없었다 해도 일단 생긴 이상은 당연히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랄 것 아닌가. 게다가 유산한 희선의 몸을 얼마나 걱정할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당분간은 말하지 말아야겠어.’

희선은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는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부탁드린 자료는 찾아 주셨나요?”

“네, 사모님. 회장님 눈에 띄지 않게, 사모님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고마워요.”

남편에게 비밀이 자꾸만 늘어나는 기분이다. 희선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

카레 가게 앞에 대형 세단 세 대가 줄줄이 멈추고, 그 안에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 세 명이 차례로 내렸다.

그중 한 명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심쩍은 눈으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엄마손 카레……?”

4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르는 이들의 정체는 재벌가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백합회’ 회원들. 즉 국내 유수의 재벌가 사모님들이었다.

그 안에서도 특별히 친한 사이인 이 세 사람은 고씨, 양씨, 이씨. 각자의 성을 합쳐 일명 ‘고양이’라 불리고 있었다.

고양이 사모님들의 임무는 바로 케네디 회장 부인을 백합회에 가입시키는 것!

케네디 회장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사모펀드 ‘반 더 린드LLC’ 의 수장이다. 약 십 년쯤 전부터 한국에 집중 투자한 탓에, 국내 대기업치고 반 더 린드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회사가 드물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참 전부터 백합회 회원 대부분이 남편들에게 은근히 케네디 회장 부인과 좀 친해져 보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케네디 부인이 완전히 베일에 싸인 존재라는 거였다. 재계고 정계고 간에 결혼식에 초대받았다는 사람 하나가 없었고, 언론에도 사진 한 장 난 적이 없다. 하다못해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부부 동반으로 열린 경제인 모임에도, 케네디 회장은 아내 없이 혼자서 참석했다. 이러면 부부 사이가 별로라는 소문이 돌 법도 한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케이크가 맛있다면서, 어디 거냐고 굳이 물어서 비서 보내지 뭐겠어.”

“와이프가 케이크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

“그나마도 웨딩드레스 고르는 날이라면서 행사 끝나기도 전에 가 버렸잖아?”

벌써 수십 번도 더 했던 얘기를 또 주고받는 고양이 사모님들의 뺨에 홍조가 감돌았다.

그날 모임에 참석했던 이 사모님들은 전원 케네디 회장에게 홀라당 반해 버렸다. 미모도 미모지만, 어쩌면 저렇게 아내를 애지중지하는 남자가 다 있을까!

케네디 회장을 통해서 백합회 가입을 권유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아내가 수줍음이 많아서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 아내에게 관심 꺼 달라는 의도가 명백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케네디 부인에 대한 사모님들의 궁금증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저렇게 꽁꽁 숨겨두고 혼자만 보려고 하지?’

백합회 가입은 둘째 치고,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지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결국은 각자 비서들을 동원해서 조사한 끝에, 케네디 부인이 일주일에 두 번씩 카레 가게에 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 결혼 전에 본인이 직접 경영하던 가게인데, 지금도 결식아동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가끔씩 나가서 일을 돕는다는 거였다.


‘케네디 부인이 식당을 했다고?’

보고를 받을 때도 의아했는데, 실제 가게를 눈으로 보니 더욱더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손바닥만 한 동네 식당 아닌가.


“정말 여기 맞아?”

아무래도 잘못 온 거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볼 수밖에 없다. 사모님들은 머뭇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사모님들은 재빨리 조그만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은 5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아줌마였다. 딱 봐도 케네디 회장 부인은 아니다.


‘그럼 설마 이 여자가?’

세 사모님의 시선이 일제히 방금 인사를 건넨 여자에게 꽂혔다.


“주문 결정되시면 불러 주세요.”

여자는 메뉴판을 갖다 주고 나서 다른 테이블로 음식을 날랐다. 초등학생 아이들끼리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맛있게 먹어.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하고.”

여자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요, 왜 아줌마는 요즘 가게에 잘 안 와요?”

“아줌마가 요즘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래. 아줌마 없어도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와서 밥 먹으면 돼.”

“그럼 이제 아줌마는 가게 그만두는 거예요?”

“아니, 아줌마도 가끔 와서 일할 거야. 오늘도 이렇게 왔잖아?”

그제야 아이들은 안심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여기 카레 돈가스 세 개 줘요.”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주문을 마치고 나서, 사모님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설마 저 여자일까?’

같은 부류끼리는 금세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러나 여자에게서는 재벌가 사모님 같은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고왔지만 관리나 시술을 받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입고 있는 옷도 고급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지?’

사모님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케네디 회장 부인쯤 되는 여자가 이런 식당에서 아줌마 소리나 듣고 있을 리가…….

그때 갑자기 가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반갑게 외쳤다.


“로즈!”

뛰다시피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사모님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케네디 회장 본인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벌써 일 끝났어요?”

“당신 도와주려고 중간에 도망 나왔어요.”

두 손을 꼭 잡은 채 여자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장면을 곁눈질로 훔쳐보는 사모님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진짜 저 여자가 케네디 부인이란 말이야?’

그러는 동안에도 케네디 회장은 여자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족히 십 년쯤은 떨어져 있던 사이인 줄 알겠다.


“아유, 회장님 오셨어요?”

“예, 잘 지내셨죠?”

안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도 케네디 회장은 입으로만 대답할 뿐, 시선은 그대로 여자에게 꽂혀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어디 하나 눈에 띄는 곳이라고는 없는 수수한 여자에게.

한참만에야 케네디 회장은 겨우 시선을 돌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사모님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손님들은? 주문 받았어요?”

“네. 카레 돈가스 세 개요.”

“그럼 내가 튀길게요. 앞치마 줘요.”

“괜찮아요, 내가 하면 돼요.”

“안 돼요. 당신 저번에 끓는 기름 튀어서 데었잖아요?”

기어이 앞치마를 꺼내 두르는 케네디 회장을 보며, 사모님들은 비명이 새어나올 것 같은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케네디 회장이 돈가스를 튀긴다니!

경악이 조금 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초조해졌다.

사실 케네디 회장이 아내에게 신경 끄라는 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차마 호텔로도 찾아가지 못하고 이리로 온 건데, 하필이면 여기서 딱 마주치다니.

그렇다고 주문해 놓고 도망을 갈 수도 없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그만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말았다.


“자, 카레 돈가스 나왔습…… 음?”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던 케네디 회장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고 이사장님?”

나머지 두 사모님은 최대한 고개를 푹 숙였지만 역시나 케네디 회장의 날카로운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양 관장님하고 이 원장님도 계시는군요.”

아무개 회장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하나하나 직함까지 정확히 붙여서 부르는 것을 보고 사모님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모임에서 딱 한번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기억력도 좋지! 당황한 와중에도 팬심이 더욱더 솟아올랐다.


“바쁘신 분들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급격히 싸늘해진 목소리에 사모님들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저기,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배가 고파서 들어온 거예요.”

“사모님이 하시는 가게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호호호.”

황급히 변명을 했지만 물론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았다.


“설마 제 아내를 그 친목 모임에 가입시키려고 오신 겁니까?”

“…….”

“그 얘기라면 제가 분명히 거절한 걸로 기억합니다만.”

더는 오리발을 내밀어 봐야 소용없다. 사모님들은 태세를 바꿔 회유에 나섰다.


“저기, 회장님께서 외국 분이시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한국에선 혼자서 사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사업하다 보면 서로 도울 일이 많이 생기거든요.”

“내조가 정말 중요하답니다. 그래서 안사람들끼리도 친분을 쌓으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네디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저는 내조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저 사람에게 외조를 해야지요.”

아까 꿀이 뚝뚝 떨어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디찬 눈초리였다.


“식사비는 안 받을 테니 조심히 가십시오.”

동경하는 케네디 회장에게 야단을 맞은 꼴이 된 사모님들은 시무룩해서 물러나왔다. 체면도 없이 눈물까지 찔끔 나려고 했다. 저렇게까지 말할 건 뭐람!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저기, 잠깐만요!”

케네디 부인이 저만치부터 뛰어와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희선이라고 합니다. 케네디 씨 안사람이에요.”

“…….”

“저이가 외국 사람이어서 가끔 말을 좀 예쁘게 못 해요. 본심은 안 그런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부끄러운 듯, 여자는 앞치마를 두른 제 차림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저어, 친목 모임이라고 하셨지요. 보시다시피 제가 장사만 하던 사람이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뛰어와서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여자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저 같은 사람도 받아 주실까요?”

그 순간, 고양이 사모님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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