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 회장님의 분노 (154/181)


#154. 회장님의 분노
2023.03.21.



 


“그래서, 기어이 그 재벌 사모님들 모임에 가입하겠다고요?”

“네. 내일모레 보육원에 같이 봉사하러 가기로 벌써 약속했어요.”

희선은 단호했지만 레온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그는, 그 세계에 속한 자들이 자기들 영역 밖의 사람을 얼마나 철저하게 배척하는지를 잘 알았다. 당장 제 부모부터가 그랬으니까.

한국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터였다. 여태 평범하게, 아니 평범 이하의 삶을 살아온 희선이 괜히 그런 사람들 틈에 끼었다가 상처나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성격이나 좀 사교적이라면 모를까, 희선은 워낙 낯을 가렸다. 하다못해 사람 많은 데 가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알 것 같아서 레온은 안타까웠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내조 안 해도 내 사업은 문제없어요.”

사실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한 빌미에 가까웠다. 그까짓 호텔 하나에 백화점 하나쯤이야 원래 하는 투자 사업 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내조씩이나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새 인생을 살고 싶어서 그래요.”

“…….”

“더 이상 숨어 살던 한수연이 아니잖아요. 이젠 케네디 회장님이 내 남편인데, 그러면 저런 사람들하고도 어울릴 줄 알아야 할 거 아녜요.”

그제야 레온은 희선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새 삶을 살겠다는 결심은 기특하지만…….

영 표정이 어두운 레온을 보고, 희선이 밝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가게에 왔던 사모님들, 좋은 분들 같았어요.”

“잠깐 본 게 다잖아요. 어떻게 알죠?”

희선이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메뉴 통일해서 시키면 좋은 사람이에요.”

레온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하고 소심한 여자가, 저를 상대로는 제법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레온은 팔을 벌렸다.


“이리 와요.”

그러나 왠지 희선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 오늘은 손만 잡고 자요.”

오랜만에 듣는 말에 레온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젠 결혼도 했는데, 왜 또!


“갑자기 왜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많이 안 좋아요? 의사 불러서 좀 보라고 할까요?”

“아뇨!”

희선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레온은 깜짝 놀랐다.


“그냥 감기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요. 몸 따뜻하게 하고 자면 금세 나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내가 안아줄 테니까 푹 자요.”

허리를 끌어안자 희선이 못 미더운 듯이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안고만 있어야 해요.”

레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니까요.”

 

*

케네디 회장 부인의 가입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백합회 전체가 들끓었다.


“실제로 보니까 어땠어요?”

회원들은 케네디 부인을 직접 만나고 온 ‘고, 양, 이’ 사모님들을 둘러싸고 폭풍같이 질문을 쏟아냈다.


“대단한 미인이겠죠? 옛날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하던데.”

“제가 듣기론 학벌도 엄청나다던데요. 하버드 졸업했다고 하잖아요?”

“어머, 나는 프린스턴이라고 들었는데.”

케네디 회장이 워낙 부인을 애지중지하는데, 정작 본인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으니 이런저런 헛소문이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런 와중이니 고양이 사모님들은 차마 식당에서 앞치마 두르고 일하고 있더라는 말이 안 나왔다. 결국은 성화에 못 이겨 내놓은 대답이 이랬다.


“그냥 뭐…… 귀엽던데요?”

어디서나 그렇듯, 백합회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했다. 철저히 재계순위와 남편의 지위에 따른 서열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케네디 회장 부인은 다른 사모님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사업 규모부터가 웬만한 국내 기업은 상대가 안 됐고, 게다가 케네디 회장은 미국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막역한 사이라지 않는가.

이쯤 되면 사실 가입하는 즉시 여왕 노릇을 한대도 누구 하나 찍소리 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거드름은커녕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저도 끼워 달라 부탁하는 케네디 부인이, 몇 살 더 위인 고양이 사모님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왜 이 수수하기 그지없는 여자에게 케네디 회장이 목을 매다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네? 귀엽다고요?”

다른 사모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그중 한 사모님이 새로운 정보를 풀었다.


“근데 말이에요. 결혼식에 아무도 초대 안 한 게 아니던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호텔에서 일하는 룸메이드 전원을 다 초대했대요. 150명이나 됐다고 하네요.”

사모님들은 어이가 없었다. 정, 재계에서도 아무도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 룸메이드를?

사실 이 중에는 뒤에서 몰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했다가 거절당한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늦은 결혼이라 가족과 지인 몇 명만 참석하여 조촐하게 치를 예정이라는 정중한 설명을 듣고 기분이 좀 상해도 이해는 했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니, 듣고 보니까 좀 그러네.”

“그러게요. 우리가 청소하는 아줌마들만도 못하다는 거야, 뭐야?”

“자기가 케네디 회장 부인이면 다예요? 사람을 뭘로 보고!”

고양이 사모님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나 대단한 여잔지, 어디 내일모레 보자고요.”

 

*

보육원 봉사 당일.


“처음 뵙겠습니다. 정희선이라고 합니다.”

열두 명이나 되는 사모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희선을 향했다.

희선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어차피 주방에서 일할 건데, 하는 생각에 평소 입던 대로 편하게 입으려다가, 최 비서가 펄쩍 뛰는 바람에 그나마 좋은 옷으로 골라 입고 오기를 다행이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잘 해 봐요.”

사람들이 차례로 명함을 건넸지만 희선은 마주 건네줄 명함이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명함이 없네요.”

“그럼 정 여사는 사회 활동은 전혀 안 하시나 봐요?”

“네, 그냥 집에 있어요.”

부끄러운 나머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방금 받은 명함들에는 하나같이 무슨 재단 이사장, 무슨 미술관 관장 등의 직함이 쓰여 있었다. 자기 일이 없는 것은 희선 혼자뿐이었다.


“그럼 결혼 전에는 뭘 하셨죠?”

희선은 당당하려고 애썼다. 내 힘으로 벌어먹고 산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저어, 장사를 했었어요. 카레 가게요.”

사모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아니, 사회 활동을 안 하시다뇨. 보니까 자선사업 하시던데. 그렇지, 양 여사?”

가게에 찾아왔던 고양이 사모님들 중의 하나가 희선의 편을 들어주듯 나섰다. 고씨 성의 사모님이었다.


“그러게. 그 아이들, 결식아동 맞죠? 너무나 훌륭한 일이지요.”

양씨 성의 사모님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희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미 멸시가 어려 있었다. 희선이 자기들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본 것이다.


“자, 인사는 이쯤 나누고 일 시작들 합시다. 이러다가 점심시간 되겠어요.”

이씨 성의 사모님이 중재하듯 상황을 종료시켰다.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한 사모님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 봉사를 하는 동안, 나머지 일곱 명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나마 제게 호의적인 고양이 사모님들이 모두 교육 봉사 쪽으로 가는 바람에 희선은 자꾸만 어깨가 작아졌다.

오늘의 메뉴는 공교롭게도 돈가스였다. 식사 준비를 시작하는데 부잣집 사모님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하다못해 고기에 밀가루와 달걀, 빵가루를 입히는 순서마저 엉망이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보다 못한 희선이 나서자 다른 사모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넘기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고는 서커스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둘러싸고 감탄을 연발했다.


“세상에, 정 여사 손 빠른 것 좀 봐요.”

“정말 대단하세요.”

“우리야 언제 집에서 음식을 해봤어야지.”

칭찬을 받은 희선은 그 말 뒤에 숨은 의도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순수하게 기뻤다.


“굳이 우리까지 안 도와도 되겠네요.”

“그럼 나가서 잠깐 한숨 돌리고 올까요?”

“그래도 되죠, 정 여사? 커피 한 잔 마시고 얼른 올게요.”

당황스러웠지만 신입회원 주제에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 다녀들 오세요.”

그러나 얼른 오겠다던 사람들은 삼십 분이 지나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희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일곱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자니 금세 팔이 아파 왔지만,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굶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골탕을 먹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찾아나서 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간신히 밑준비를 다 끝내고 나서 튀길 차례가 될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리를 한 탓일까. 끓는 기름에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어지럼증까지 밀려왔지만, 희선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

점심식사 시간 삼십 분 전.

아이들 대상으로 교육 봉사를 마치고 나오던 고양이 사모님들은, 식사 준비를 맡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체 아이비리그 출신이니 미스코리아니 하는 소문은 어디서 나온 거야?”

“그러게요, 식당 아줌마인 줄도 모르고 깜빡 속았네.”

“저런 여자가 대체 어떻게 케네디 회장이랑 결혼을 했지?”

“아들이 있다잖아요. 젊을 때 멋도 모르고 만났다 발목 잡힌 거죠 뭐.”

고양이 사모님들은 놀라서 물었다.


“여기서 뭣들 하시는 거예요?”

“아, 수업 끝나셨어요? 이리 오셔서 커피 한 잔 하세요.”

“식사 준비는 어쩌고요?”

“잘 하는 사람이 하고 있으니까 걱정 놓으세요.”

고양이 사모님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럼 정 여사 혼자 일하고 있단 말예요?”

“무슨 걱정이세요. 여태 음식 장사로 먹고 살던 사람인데 오죽 잘할까.”

“그러게요. 어찌나 빠른지 아주 손이 안 보이던데.”

고양이 사모님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케네디 회장은 아내를 애지중지하다 못해 돈가스도 자기 손으로 튀기는 위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아니, 제정신들이에요? 케네디 회장님이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에이, 설마하니 유치하게 일러바치기야 하겠어요?”

그들은 희선을 잠깐 보고도 그녀의 성정을 금세 파악했다. 사람이 어수룩하고 순진해서,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주변머리도 못 되는 사람이다.

안 되겠다. 고양이 사모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헐레벌떡 주방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열기가 훅 끼쳐 왔다.

뜨거운 기름이 끓는 솥 앞에 혼자 위태롭게 서 있던 희선이 고개를 들었다.


“수업은 끝나셨어요?”

웃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띄게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정 여사?”

사모님들은 황급히 달려가서 집게부터 빼앗아 들었다.


“세상에,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네! 어디 안 좋아요? 응?”

희선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러나 희선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정 여사!”

놀란 사모님들이 쓰러지는 희선을 부축했다.

*

희선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은 레온은 날다시피 병원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레온이 도착했을 때에는 희선은 이미 안정을 찾고 잠들어 있었다. 팔에 수액 줄을 꽂고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희선을 보자 억장이 무너졌다.

자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일단 병실을 나온 레온은, 병실 앞에 모여 있는 사모님들을 싸늘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극도의 분노로 인해 목소리는 오히려 낮아져 있었다. 열두 명의 사모님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과가 아니라 설명을 하시란 겁니다. 어쩌다 저 사람이 쓰러진 거냐고 묻지 않습니까?”

다그치던 레온은, 마침 의사가 오는 바람에 잠시 말을 멈췄다.


“장시간 서서 무리를 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빈혈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레온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임신 초기에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유산 기미는 없습니다만, 워낙 초기이니 앞으로는 더욱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철분제 꼭 챙겨 드시고…….”

레온은 흠칫 놀라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직 임신 초기이니 조심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충격을 받은 레온의 표정을 보고, 의사가 더 놀란 듯이 물었다.


“혈액검사 결과를 보니 사모님이 임신 중이시던데요. 설마 모르셨습니까?”

희선이 아이를 가졌다고……?

멍해진 레온의 귀에, 의사의 말이 먼 곳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다음 순간.

벅찬 기쁨과 동시에, 여태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분노가 레온을 덮쳤다.


“……!”

케네디 회장의 살벌한 눈빛에, 사모님들은 단체로 간이 콩알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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