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케네디 부부의 복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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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케네디 부부의 복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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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케네디 부부의 복수 (1)
2023.03.24.
“혈액검사 결과를 보니 사모님이 임신 중이시던데요. 설마 모르셨습니까?”
의사의 말에 놀란 것은 케네디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사모님들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임신?’
‘정 여사가 올해 마흔다섯이라고 하지 않았나?’
워낙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한 케네디 회장이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그 애지중지하는 부인이 가진 늦둥이를 잃을 뻔한 것 아닌가.
“……!”
역시나 케네디 회장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사모님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망했구나!
이 일이 남편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케네디 부인하고 친해지랬더니, 따돌리다 유산을 시킬 뻔했단 말이야?’
노발대발하는 남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건 곧 죽어도 오리발을 내밀고 봐야 한다. 개중에 두뇌 회전이 빠른 사모님이 즉석에서 변명을 지어냈다.
“저기, 저희가 잠깐 커피 사러 나갔는데 마침 아이 하나가 놀다가 픽 쓰러지지 뭐예요. 그 아이한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정 여사께서 혼자 식사 준비를 하다 그만 몸에 무리가 간 모양이에요.”
어차피 보육원이야 백합회 후원을 받고 있으니 말은 나중에 맞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지어낸 거짓말에, 다른 사모님들이 너도나도 맞장구를 쳤다.
“몸이 안 좋으면 그냥 쉬고 있어도 됐을 텐데, 저희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럼요, 절대 일부러 혼자 일하게 만든 게 아니랍니다.”
발뺌부터 하고 나서, 사모님들은 케네디 회장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축하와 덕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정말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늦둥이라니, 얼마나 기쁘세요?”
“이렇게 액땜까지 했으니 아이가 아주 건강하게 태어나겠어요, 호호.”
듣다 못한 고양이 사모님 중의 하나가 발끈해서 나섰다.
“이것들 봐요, 어쩜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그러나 금세 다른 사모님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입을 막았다.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자칫하면 우리 백합회는 다 망하는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고 여사만 무사할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결국은 고양이 사모님들도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세 사모님들은 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모셔왔으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저희 불찰입니다.”
사실 고양이 사모님들은 교육 봉사 중이었기 때문에 희선이 뭘 당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몰랐다.
즉 이들에게는 잘못이 없는 셈이었지만, 물론 레온은 거기까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사람을 찾아오기까지 해서 모임에 가입시킨 이 세 사모님이 제일 미웠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책임을…….”
레온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데, 병실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 당신 왔어요?”
희선의 목소리였다. 레온은 흠칫 놀라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언제 깼는지, 희선이 몸을 일으켜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정신이 들어요?”
황급히 달려들어 묻자 희선이 대답했다.
“그냥 주방이 더워서 잠깐 어지러웠나 봐요. 바쁜데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고, 희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의사 선생님은요?”
의사를 찾는 얼굴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레온은 희선이 뭘 걱정하는지 금세 깨달았다.
“걱정 말아요. 아이는 괜찮다니까.”
순간 희선이 움찔하며 레온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 레온은 깨달았다. 희선이 이미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왜 나한테 진작 임신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말하고 나자 뒤늦게 짚이는 게 있어서, 레온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설마 내가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해서? 그래서 말 못 한 거예요?”
아녜요, 하면서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워낙 노산이라 유산 위험이 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좀 안정기에 접어들면 말하려고 했어요. 혹시 안 좋게 되면 당신이 속상할 거 아녜요.”
“내가 속상한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의사가 그 정도까지 말했으면 본인은 오죽이나 무섭고 걱정이 됐을까. 그런데 남편인 나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아내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한 나머지 레온은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졌다.
희선이 새삼스레 레온의 눈치를 보았다.
“저어, 당신 말이에요. 정말로 둘째 원하지 않아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레온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끌어다 꼭 잡았다.
“그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찾아 헤맸는지 알아요?”
“…….”
“제발 당신이 살아있기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어도, 하다못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 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살아 있는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어떻게 다시 잡은 손인데. 레온은 푸른 핏줄이 비치는 새하얀 손등에 뺨을 비볐다.
“이제야 겨우 찾았는데,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간 자칫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다잖아요. 그래서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예요. 세상에 당신보다 더 중요한 게 나한테 뭐가 있겠어요?”
결국은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넘쳤다.
“당신이 낳은 내 아이가, 필요 없느냐고요?”
레온은 울면서 웃었다.
“내 목숨하고 바꿔서라도……!”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요.
마지막 말은 흐느낌에 묻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물론 희선의 마음에는 정확히 와닿았다.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우는 레온의 머리칼을, 희선이 미소를 짓고 가만히 어루만졌다.
“큰일이네요, 아빠가 이렇게 울보라서.”
*
물론 케네디 회장은 울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레온은 곧바로 비서를 시켜 백합회 회원 명단을 입수했다.
하나하나가 대단한 집안 사모님들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레온의 안중에도 없었다. 설령 그 안에 미국 대통령 부인이 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낭패를 보게 만들어 줬을 것이다.
명단을 들여다보던 레온의 눈에 한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잠깐, 조한신문 장녀면…… 이보라 씨 언니군요.”
“우리 시현이를 괴롭혔던 그 아가씨 말이에요?”
희선이 놀라 묻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재벌가 며느리가 된 모양인데. 어쩌면 동생 때문에 당신을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하고 시현이 사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세상에……!”
“잘됐네. 저번에는 시현이가 말려서 그만뒀지만, 이번에야말로 광고를 다 끊어야겠어요.”
종이를 꽉 쥐어 구겨 버리며, 레온은 다짐하듯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아주 단단히 망신을 줄 테니까, 당신은 보고만 있어요.”
“저기, 그러지 말아요.”
말리려 드는 희선을 보고 레온은 울화통이 터졌다.
“로즈. 당신이 얼마나 마음씨 고운 사람인지 나도 잘 알고 사랑해요. 하지만 이건 내 자식이 걸려 있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내가 절대 용서 못 해요.”
평소 희선의 부탁이라면 마음에 안 들어도 결국은 들어주던 레온이지만, 이번에는 그도 물러설 수 없었다.
얼마나 귀한 아내이고 얼마나 귀한 아이인가. 파리한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희선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살의가 치밀었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제대로 보여줄 셈이었다. 두 번 다시 누구도 희선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그러나 희선은 레온의 팔을 붙잡으며 달래듯 말했다.
“나한테도 친구가 필요해요.”
“그런 사람들하고 친구가 돼서 뭘 하려고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레온은 아내가 임신부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얼른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은 내 아내예요. 굳이 싫은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걸 왜 모르죠?”
착해 빠진 여자가 답답했다. 여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만 주위에 두고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나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날 무시하고 괴롭히는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겠어요?”
“…….”
“내 자식이 잘못될 뻔했어요. 나도 당한 만큼 돌려줄 거예요.”
그제야 레온은 희선에게 뭔가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자식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여자인데.
“그럼 왜 말리는 거죠?”
“모두가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희선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까 딱 일주일만 기다려줘요. 그 뒤에는 당신이 뭘 해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요.”
*
케네디 회장은 분명 살기가 도는 얼굴로 말했었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마음을 졸였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별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케네디 부인은 그런 일을 겪고도 백합회에서 탈퇴한다는 말이 없었다. 다음 모임에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는 말을 듣고 사모님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잘 넘어갔구나.’
한번 위기를 넘겼으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사람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먼저 시험 삼아 툭 쳐봤다가, 상대가 반항하지 않으면 점점 폭력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 사람의 습성이었다.
대놓고 골탕을 먹여줬는데도 보복은커녕 앞으로도 꿋꿋이 모임에 참석하겠다니. 백합회 회원들은 더욱더 케네디 부인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우리들 사이에 끼고 싶어 죽겠나 보지?’
‘하기야 식당에서 일하던 여자가 오죽하겠어.’
그녀들이 이렇게까지 희선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아이비리그 출신이니 미스코리아니 하는 헛소문이 퍼졌던 것은, 그 정도는 되어야 케네디 회장 부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뛰어난 미인도 아니고 젊지도 않은 식당 아줌마라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가 감히 저희들 사이에 끼려고 하다니!
‘케네디 회장 부인이니 대놓고 쫓아낼 수도 없고.’
사모님들은 결심했다. 앞으로는 티 안 나게 괴롭혀 줘야겠다고.
공교롭게도 다음 모임은 미국 대사 부인과의 티타임이었다. 대부분 부잣집 따님이라 학벌도 좋은 사모님들은, 하나같이 영어도 잘했다.
대사 부인에게는 상시 수행하는 통역이 있지만, 이쪽에서는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다. 물론 대사 부인과 대화할 때도 통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영어로 이야기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케네디 부인뿐일 터였다.
‘식당 아줌마가 언제 영어 회화를 배웠겠어.’
확신하는 근거도 있었다. 만약에 부인이 영어를 할 줄 알았다면, 케네디 회장이 한국어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배웠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사모님들은 손꼽아 다음 모임을 기다렸다. 혼자서만 대화에 끼지 못하고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을 케네디 부인의 얼굴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대망의 미국 대사관에서의 티타임 당일.
“정 여사,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우리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일단 케네디 부인을 향해 더없이 반가운 척 인사를 해 놓고, 모여 앉아서 대사 부인을 기다리는 동안 사모님들은 슬슬 시동을 걸었다.
“아유, 오랜만에 영어 회화를 하려니 말이 잘 나올까 모르겠네.”
“오시기 전에 우리 잠깐 입 좀 풀고 있을까요?”
사모님들은 곧바로 짠 듯이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근데 혹시 여기 영어 못하는 사람은 없죠?]
[왜 없겠어요.]
[그러게요, 한 사람쯤은 있겠죠.]
슬쩍 눈치를 봤지만 역시나 케네디 부인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
그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찻잔만 들어 올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