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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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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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결심
2023.04.07.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시현은 목소리를 높여 태하를 찾았다.
“나 왔어, 태하야.”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태하야? 어디 있어?”
집이 워낙 넓어서 한참 구석구석 찾아다니고 나서야 태하가 외출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시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합의해달라고 매달리는 정임을 방금 뿌리치고 들어온 길이었다. 지금 얼굴을 보면 태하는 분명히 이상한 낌새를 챌 것이다.
시현은 기억을 잃은 태하에게 아직 우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6년이나 만난 남자가 있다고, 그 남자와 결혼식장 들어가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남편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가 앙심을 품고 일으킨 사고에 남편이 하마터면 죽을 뻔한 후라면 더욱더.
딱히 숨기거나 속일 생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말해도 자신에 대한 태하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김우진이라는 인간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하고 싶은 일을, 굳이 태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하는 지금 우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물론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라는 것도 알지만…….
한숨을 짓고 있을 때 저만치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얼른 달려갔다.
“어, 벌써 퇴근했어?”
태하가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미안, 줄 서느라 좀 늦었어.”
태하가 내민 것은 집 근처에 있는 빵집 로고가 박힌 봉투였다.
지나는 길에 사 봤다가 맛있어서 한 개 더 사 올걸, 하고 아쉬워하며 먹었었는데, 그 후로는 볼 때마다 가게 앞에 줄이 길게 생겨 있어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좋아하잖아, 이거.”
하필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귀에 마음이 아팠다.
“바보야, 추운데 뭐하러 나갔어. 이까짓 빵이 뭐라고.”
안으려 했지만 태하가 어,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 나 지금 너무 차가워.”
하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하를 꼭 안아 버렸다. 네가 얼음으로 깎은 조각이라고 한들 내가 너를 피할까.
“나 퇴근했을 때 집에 너 없는 거 싫어. 그러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응석을 부리듯 말하자 태하가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지었다.
“이러면 내가 어떻게 미국을 가.”
미국행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함께 식사할 때 레온이 제안한 것이었다.
[태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니. 어차피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면, 차라리 내 사업을 같이하다가 나중에 물려받는 게 빠르지 않을까?]
태하는 먼저 얘기를 듣고 동의한 후였고, 시현도 찬성했다. 그렇지 않아도 태하가 자기 회사 일을 공부하느라 매일같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걸 보기가 힘든 참이었다.
하필이면 업종이 IT다. 개발자로서의 일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업을 배우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쪽은 든든한 아버지가 붙들고 가르쳐줄 것 아닌가.
[마침 우리 투자자들 대부분이 모이는 중요한 자리가 있단다. 일도 배우고 사람들에게 소개도 시킬 겸, 잠시 태하 데리고 미국에 다녀오마.]
[얼마나 걸릴까요?]
시현의 물음에 레온은 확답을 하지 못했다.
[일단 가 봐야 알겠는데. 최소 일주일, 어쩌면 한 달도 걸릴 수 있을 것 같아.]
레온은 임신 초기인 희선을 남겨두고 가는 것을 못내 걱정스러워했다. 그래서 두 남자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시현이 빌라로 가서 희선과 둘이 지내기로 했다.
“그냥 가지 말까?”
태하가 물었다.
“누나가 싫다면 안 가도 괜찮아.”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아빠도 엄마 두고 가시는데.”
레온은 원래도 출장을 갈 때마다 희선과 떨어지기 힘들어했다. 임신까지 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희선의 곁을 비울 정도로, 태하를 위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난 엄마랑 둘이 잘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잘 갔다 와.”
*
케네디 부자는 주말에 미국으로 떠났다. 공항에서 한바탕 영화를 찍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열심히 해서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태하는 왠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레온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미안해요. 내가 지금 당신 곁을 비우면 안 되는 건데…….]
그런 레온을, 희선은 전처럼 유난이라고 눈을 흘기는 대신에 꼭 안아주었다.
[우리 태하를 위한 거잖아요. 오히려 내가 고마워요.]
두 남자를 보내고 나서 시현은 희선이 있는 호텔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시현아, 잠깐 이것 좀 봐줄래?”
같이 지낸 지 이틀째 되던 날, 희선은 시현을 조심스럽게 노트북 앞으로 이끌었다.
“자료를 그래프로 나타낸 건데, 아무래도 한눈에 확 들어오지가 않아.”
엑셀로 만든 그래프를 보고 시현은 내심 놀랐다. 희선이 이런 것과 인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엑셀도 할 줄 아셨어요?”
“그냥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고 흉내만 내는 거지 뭐.”
희선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꺾은선보단 막대형 그래프로 그리는 게 더 잘 보일 것 같긴 한데…… 근데 이게 뭐예요?”
“아버지한텐 아직 얘기하지 말아줘.”
희선이 설명했다.
“그랜드호텔 룸메이드들이 정직원이 아니라 용역업체 소속이거든. 그런데 얼마 후면 다른 업체로 계약이 바뀌게 돼서, 지금 있는 룸메이드들이 싹 나가게 생겼대.”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희선이 결혼식에 룸메이드들을 초대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직접고용으로 전환하는 게 사업주에게 유리하다는 자료를 모으고 있어. 이건 해외 호텔 사례인데, 아웃소싱에서 직접고용으로 전환했을 때의 효과를 그래프로 나타내본 거야.”
희선이 뭘 하고 싶은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방법이 이해가 안 갔다.
“엄마,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지 않아요?”
굳이 이렇게 머리 싸매고 힘들게 자료까지 만들어 가면서 레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그냥 엄마가 한마디 부탁만 하시면 아빠는 들어주실 텐데요.”
“알아. 아니까 안 하는 거야.”
“네?”
희선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거야. 그런데 그게 꼭 좋은 일이 아니었어.”
희선은 레온이 아현을 그랜드호텔 인턴십에서 자르려고 했을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당시 희선은 반성한 척하는 아현에게 넘어가서, 남은 기간을 채우고 나가게 해달라고 레온에게 부탁했었다.
[아현이도 많이 반성한 것 같았어요. 사과도 받았으니까 한 번만 넘어가 줘요, 네?]
[하여튼 로즈, 당신은 너무 다정해서 탈이에요.]
레온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희선의 부탁이니 결국 들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니? 아현이 그 애가, 열쇠까지 훔쳐서 태하 방에 숨어들고……!”
새삼 끔찍하다는 듯, 희선이 진저리를 쳤다.
“다시는 그 사람한테 섣불리 부탁하지 않겠다고 그때 결심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타당한 근거를 갖춰서 설득할 거야.”
그제야 시현은 희선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런데 자료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설마 직접 만드신 거예요?”
희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에선 사례를 찾기가 힘들었어. 영문 사이트랑 서적들 뒤져서 해외 사례는 몇 가지 찾았는데, 아무래도 직접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자료는 잘 없더라고. 그래서 직접고용 전환 후 영업이익 변화 추이를 따져서 자료를 만들어본 거야.”
“엄마가 이런 데 재능이 있으신 줄 몰랐어요!”
자신도 어느덧 희선을 식당 아줌마 취급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현은 감탄하는 한편으로 속으로 반성했다.
“PPT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빠 깜짝 놀라시게요!”
원래는 UI디자인을 했던 시현이다. 즉 이런 자료를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은 전문분야나 다름없었다.
한참 둘이서 의견을 나누며 자료를 제작하다, 희선이 문득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았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봐. 가서 좀 누워야겠어.”
“그럼요, 쉬셔야죠!”
시현은 화들짝 놀라서 얼른 희선을 침실로 데려갔다.
“조심하셔야 해요.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참지 말고 누우세요.”
부축까지 해서 눕히는 시현을 향해, 희선이 살짝 눈을 흘겼다.
“너까지 너무 수선 떨지 마. 정말이지 창피해서…….”
“그래도 기쁘시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침대에 누운 채로 희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쌍둥이가 아닐까?”
레온은 초음파로 아기집이 잘 자리 잡은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떠났다. 그때 시현도 병원에 같이 갔었기에 의사가 하는 말을 곁에서 들었다.
[혹시 쌍둥이 아닌가요?]
희선의 물음에 의사는 대답했다.
[아직은 초기라 나중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일단은 쌍둥이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 쌍둥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어, 그게…… 내가 태몽을 꿨거든.”
희선은 사과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로 띄엄띄엄 꿈 얘기를 해주었다. 탐스러운 열매와, 그 안에서 나온 아기용까지.
“와, 신기하네요. 진짜 태몽이라는 게 있네.”
“분명히 열매를 내가 하나 더 땄거든? 그러니까 쌍둥이일 줄 알았는데…… 잠깐만!”
갑자기 희선이 외치면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현은 깜짝 놀랐다.
“따긴 땄는데, 하나는 내 거가 아니었어.”
“네?”
“이건 우리 시현이 줘야지, 하면서 땄거든!”
늘 차분하던 희선이 흥분한 얼굴로 빠르게 뇌까렸다.
“그래, 맞아. 그래서 한 마리만 내 품에 안겼던 거야.”
어안이 벙벙해 있는 시현을 향해, 희선이 다급하게 물었다.
“시현이, 혹시 이번 달에 생리 했니?”
시현은 생각해보았다.
“늦어지고 있긴 한데요…….”
평소에도 피곤하면 가끔 있던 일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가슴이 붓거나, 몸살기처럼 축축 처지거나 그렇지는 않고?”
“좀 그렇긴 하지만……. 생리 전에는 원래 그렇거든요.”
설마 정말 임신일까? 혼란스러워하는 시현의 얼굴을 보고, 희선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시험해보면 알겠지.”
희선은 침대 머리맡 서랍에서 임신 테스터 상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저번에 테스트해보고 남은 거야.”
*
바짝 긴장해 있는데 마침 시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왔다. 태하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 짠! 이거 누구게?
시현이 화면에 새까만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초음파 사진인 것을 알아보고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이네.”
시현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 틀렸어.
“……?”
- 우리 아기야.
순간, 태하의 숨이 멎었다.
- 알고 보니까 나도 아기 가졌더라고. 아마 허니문 베이비인 것 같아.
둔해서 여태 몰랐지 뭐야, 하고 시현이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바보처럼 한참 멍하니 있다가 겨우 몸조심하라고, 돌아가서 보자고 말했던 것 같다.
마음 넓은 여자는 왜 기뻐하지 않느냐고 속상해하지도 않고 활기차게 말했다.
- 바쁠 텐데 슬슬 끊어야겠다. 사진 메신저로 보내줄게, 힘내서 일해!
전화를 끊고 나서도 태하는 눈 깜빡거리는 것조차 잊은 채 시현이 보내준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이게 아기라고.
나와, 강시현 사이에서 생긴…….
태하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시현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던가.
그녀가 하루아침에 제 아내가 된 후에도 늘 이게 다 한바탕 꿈이 아닐까, 하고 불안했는데.
지금, 시현과의 사랑의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아직 바늘 끝처럼 작은 점에 불과한 아기가, 그에게 처음으로 강한 확신을 안겨주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현실이었다.
문득 뺨에 뜨거운 것이 느껴져서, 그제야 태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하, 준비됐니? 이제 들어가자.”
문득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하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이미 젖은 눈을 들킨 후였다.
영문을 모르는 레온은 새삼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리할 필요 없단다. 걱정되면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괜찮아.”
여기까지 태하를 데려와 놓고도, 레온은 계속해서 걱정했다.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구나.]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태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방금 받은 전화 한 통으로, 두려움 따위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어떤 괴로움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온전한 아빠로서 내 아이를 안을 수만 있다면.
“아뇨, 할 겁니다.”
태하는 단호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