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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반갑지 않은 손님 (160/181)


#160. 반갑지 않은 손님
2023.04.11.



 
희선의 손을 잡고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시현은,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기집 크기를 봤을 때 아마도 수정 날짜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즉 둘 다 첫날밤에 생긴 허니문 베이비였다.


“축하한다, 우리 딸!”

희선이 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루만졌다.


“세상에, 그 어렸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엄마가 되는구나.”

기쁨과 대견함, 그리고 안쓰러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엄마가 산후조리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하필 같이…….”

말하다 말고 희선은 갑자기 얼굴을 푹 감싸버렸다.


“자식하고 손자가 한꺼번에 태어나게 생겼으니, 이걸 어쩌면 좋니?”

“옛날에는 결혼들을 다 일찍 해서 흔하게 있었던 일이래요. 자기보다 어린 고모, 삼촌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뭐.”

얼굴도 못 드는 희선을, 시현은 열심히 달랬다.


“최소한 내가 하루라도 빨리 낳아야 할 텐데…….”

“제가 먼저 낳을 것 같으면 꾹 참아볼게요.”

농담처럼 한 말에 희선은 정색을 했다.


“그게 참아지는 줄 아니? 얼마나 아픈지, 제발 빨리 나와 달라고 빌게 된다, 너.”

“그렇게나 아파요?”

“하늘이 다 노래져서야 겨우 나오더라, 얘. 가뜩이나 태하는 애가 컸거든. 4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걸, 그때는 수술비가 없어서 생으로 자연분만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희선이 진저리를 쳤다.


“너는 애가 좀 크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제왕절개 하렴. 괜히 고생할 필요 없어.”

낳을 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했지만 역시 기쁜 마음이 더 컸다. 태하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하루아침에 6년 후의 세상에 떨어진 꼴이 된 남자는, 마치 이 세계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처럼 어딘가 늘 불안해 보였다.

그런 태하에게 자기 아이를 안겨 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렜다. 아기가 이왕이면 태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시현은 벌써부터 생각했다.

*



- 우리 딸!

태하에게 전화를 하자 레온이 반가운 얼굴로 화면에 나타났다.


- 몸은 괜찮니? 밥은 잘 먹고 있고?

레온 역시 시현의 임신 소식을 알고 벌써 한바탕 기뻐한 후였다.


- 절대 무리하지 말고, 뭐든 시킬 일이 있으면 비서들에게 이야기하렴. 알겠지?

“네, 아빠. 그런데 태하는요?”

- 잠깐 자리 비웠는데 금세 올 거야.

레온이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 네가 아기 가진 걸 알고, 태하가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서 많이 애를 쓰고 있단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네가 좀 말해주겠니?

“네, 그럴게요.”

- 아, 오는구나. 태하 바꿔줄게.

잠시 후 태하가 전화를 받았다. 화면으로도 다크서클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피곤한 얼굴에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매일 통화하는데, 왠지 갈수록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것 같다.

스케줄이 힘들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 시현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럼 아빠는 왜 멀쩡해 보이시는 걸까.


“엄청 피곤해 보여. 거기 일이 그렇게 많아?”

태하는 조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견딜 만하니까 걱정 마. 컨디션은 좀 어때?

“그냥 자꾸 졸린 거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직 입덧도 없고. 병원에선 다음 주에 초음파 보러 다시 오라고 했어.

- 어떻게든 그때까지 돌아갈 테니까, 나하고 같이 가자.

아까 레온이 귀띔해준 것이 생각나서 시현은 얼른 말했다.


“나 엄마랑 같이 다니니까 괜찮아. 빨리 안 돌아와도 되니까 괜히 무리하지 마.”

하지만 태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 몸조심하고 있어. 날씨 추우니까 나갈 땐 핸드크림 꼭 챙겨 바르고.

“응, 그럴게.”

- 전에 매운 거 만지고 난 후로 손 피부 더 예민해졌잖아. 조심해야 해.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을 해서는 연달아 제 걱정만 하는 남편을 보고 시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알았다니까. 내 걱정은 말고 제발 너나 좀 쉬어.”

신신당부 끝에 전화를 끊고 나서야 시현은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근데 내가 매운 거 만졌던 건 어떻게 알았지?’

물론 기억을 잃기 전의 태하는 당연히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태하는 알 리가 없을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 말했었나 보지 뭐.’

 

*

같은 날에 신부가 되고, 이제 또 나란히 엄마가 될 두 여자는 전보다도 한층 더 친밀해진 느낌이었다. 손잡고 산부인과도 다니고, 육아 책도 같이 읽었다. 공통의 관심사가 생기니 수다거리가 끝도 없었다.


“엄마는 딸이 좋아요, 아들이 좋아요?”

“태하 아빠는 아들은 이미 있으니까 딸이 좋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건강하기만 해주면 감사하지 뭐. 너는?”

“저는 태하 닮은 아들이 좋을 것 같은데, 태하 생각은 모르겠어요. 오면 물어봐야죠.”

오늘은 시현이 퇴근하고 난 후에 함께 백화점에 가서 아기 옷을 보았다. 어차피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데다 아직 낳을 때도 멀었으니까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던 건데, 일단 보니까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딸이든 아들이든 똑같이 입혀도 될 것 같아요.”

“그러게, 너무 예쁘다.”

“이거 어때요, 엄마? 하나씩 사서 똑같이 입힐까요?”

“쌍둥이처럼 보이면 어떡하니, 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아기 옷과 신발을 고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어머나, 케네디 부인 아니세요?”

돌아보자 잘 차려입은 여자들 대여섯 명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대사관에서 뵙고 처음이죠?”

반가운 듯이 희선에게 말을 걸어온 여자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얼핏 튀어 보이지 않는 단순한 옷차림이었지만 피부와 머릿결에서는 윤기가 흘렀고, 얇은 롱코트 안에는 큼직한 보석 목걸이가 엿보였다. 머리부터 끝까지 부티 그 자체인 여자였다.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면서 시현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좀 뒤로 물러났다.


“그러네요. 이 여사께서 웬일로 저희 백화점을 다 찾아주셨을까요?”

희선의 냉랭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반가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제가 감히 케네디 부인께 실례를 저질렀으니, 사과의 의미로 매출이나 좀 올려드릴까 해서요.”

사과라고 하면서도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그렇게까지 마음 쓰실 필요는 없는데.”

희선은 조용히 대꾸하며 보연의 등 뒤에 호위하듯 서 있는 낯선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백합회 회원들보다 훨씬 나이대가 어려 보여서, 아마 재벌가 사모님들이 아니라 보연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백합회의 다른 사모님들에게서는 다 진작 사과하고 싶다면서 연락이 왔었다. 남편들에게 어지간히 들들 볶인 눈치였다.

연락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보연뿐이었다. 레온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니 친정인 조한신문에도 분명 피해가 갔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비를 거는 거지?’

희선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보연이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혹시 며느리 되시는 분?”

시현이 인사를 건네려 하는데 희선이 가로막아 섰다.


“굳이 제 며느리까지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선의 어깨 너머로 시현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시현 씨죠? 언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반가워요. 나 이보연이에요.”

“죄송하지만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의아하게 쳐다보자 상대가 고쳐 말했다.


“아, 이보라 언니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

“……!”

시현은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더니!

자연스럽게 보라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엉망이 된 웨딩로드 위에 털썩 주저앉아,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깔깔대고 웃던 모습이.


“처음 뵙겠습니다. 강시현이에요.”

시현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보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보라 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한순간, 보연의 얼굴에 욱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네가 감히 내 동생 안부를 물어, 하는 것 같은 표정.


“그럼요, 덕분에요.”

금세 웃으며 대답해 왔지만 시현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보라가 잘 지내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직감이 왔지만 시현은 태연하게 굴었다. 보라가 당한 일은 본인이 저지른 일의 대가일 뿐이니까.


“어머나, 출산 준비를 벌써 하시나 봐요?”

시현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보연은 희선의 손에 든 아기 옷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왕 사시는 김에 두 벌씩 사시지요. 또 모르잖아요? 조만간 손자가 떡하니 생길지.”

시현은 내심 놀랐다. 이 여자가 뭘 알고 말하는 건가?


“그럼 자식하고 손자하고 같이 놀겠네?”

“어휴, 내가 다 창피하다.”

보연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소곤거렸다.

여태 담담했던 희선의 귓가가 서서히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시현은 화를 감추고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쇼핑 계속 즐기세요. 아, 바로 위층에 좋은 주얼리 브랜드가 많이 있으니까 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보연이 턱을 치켜들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자 코트 깃이 살짝 벌어지며 안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큼직한 다이아몬드 펜던트였다.


“고맙지만 나는 보석은 주문제작만 해서. 기성품은 사지 않는 주의예요.”

“기성품이라도 그런 모조품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눈짓으로 목걸이를 가리키자 상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이것 봐요, 모조품이라니?”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보연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뭐하면 같이 올라가서 진짜 다이아몬드인지 아닌지 감정해볼래요?”

다른 여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와, 뒤집어씌우는 거 봐. 저거 보연이가 시댁에서 받은 건데.”

“보연이네 시댁이 어딘지나 알고 하는 소린가?”

시현은 웃으며 설명했다.


“보석이 아니라 디자인이 모조예요. 왜냐면 진짜는 제 금고 속에 있거든요.”

 

 
그제야 여자들이 움찔했다.


“별명은 ‘천사의 눈물’. 원래 마리 앙투아네트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엘리자베스 테일러한테 넘어갔고, 그걸 제 시증조모님이 갖고 계시다가 물려주신 거예요.”

물려받은 보석들에는 카탈로그도 딸려 있었다. 보석 하나하나에 얽힌 역사가 자세히 쓰여 있는 소책자였다.

시현은 그 소책자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달고 다닐 엄두는 안 났지만, 이런 대단한 보석들이 내 소유라고 생각하면 왠지 뿌듯했다.

그래서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연의 목걸이가 모조품이라는 것을.


“뭐, 워낙 유명한 보석이다 보니까 흉내 내서 만든 것들이 많이 돌아다니기는 하죠.”

“…….”

“그래도 아실 만한 분이 떡하니 달고 다니긴 좀 낯부끄러울 것 같아서 살짝 말씀드렸던 건데, 기분 상하셨으면 사과드릴게요.”

목덜미부터 서서히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보연의 얼굴에 대고, 시현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아무쪼록 저희 백화점 매출 많이 올려주세요.”

희선의 팔짱을 끼고 돌아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보라 씨한테 안부 전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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