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 내 남편의 여자 (161/181)


#161. 내 남편의 여자
2023.04.14.



 


“건방진 계집애가!”

보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목걸이를 빼서 내동댕이쳤다. 다이아몬드가 바닥의 대리석에 부딪치며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다이아몬드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난대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 백화점에서 당한 망신을 생각하면!


[보석이 아니라 디자인이 모조예요. 왜냐면 진짜는 제 금고 속에 있거든요.]

미소 짓던 시현의 표정을 생각하니 새삼 격렬한 증오가 치밀어서, 보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뜩이나 보연은 지금 케네디 부인 때문에 입지가 위태로워져 있었다.

백합회에서 제일 어린 축에 속하는 보연은 원래 다른 사모님들에게 동생처럼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보연과 어울려 주지 않았다. 케네디 부인이 보연을 싫어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백합회 사모님들은 모두 케네디 부인 편으로 돌아섰다.

몇몇은 아예 친해졌고, 나머지는 케네디 회장이 열 예정이라는 신년 파티에 초대받지 못해서 남편에게 지청구를 듣는 바람에 어떻게든 케네디 부인의 마음을 돌리려 애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누가 보연과 어울리려고 할까.

그래서 보연은 요즘 애매한 집안의 부인들과 어울리는 중이었다. 재벌가 사모님들 틈에 끼고 싶어 몸살을 하는 부류들이었다.

평소에는 격 떨어진다고 거들떠도 안 보던 여자들이지만 왕따나 다름없게 된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들 앞에서 또 망신을 당하다니!

케네디 부인과 그 며느리에 대한 증오가 전보다 더 심하게 불타올랐다. 둘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만 같았다.

목걸이를 내동댕이치고도 분이 채 안 풀려서 또 꽃병을 집어 드는데, 마침 비서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의료 기록은 입수했어요?”

보연은 꽃병을 내려놓고 다급히 물었다.

김우진의 어머니는 윤태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윤태하가 다니는 병원을 알아내서, 병원 직원을 매수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것이다.


“예. 기억상실이 맞습니다.”

비서의 말에 보연은 숨을 삼켰다.


“확실한 거예요?”

“스무 살 때부터의 일을 전혀 기억 못 한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경우 한참 떨어져 있었다가 최근에야 찾게 된 케이스인데, 어머니조차 기억을 못 했답니다.”

보연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좋았어!’

복수의 가능성이 생겼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고 보연은 신중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기억은 언제쯤 돌아오는 건지 알 수 있다던가요?”

“기약이 없고 딱히 치료 방법도 없는 모양입니다. 최면치료도 시도해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평생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합니다.”

그제야 보연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차 대기시켜요. 친정에 가봐야겠어요.”

“다녀오신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가십니까?”

“소송 취소해주기로 했으니 부모님한테 부탁드려야죠. 약속은 지켜야지.”

김우진이 결혼식을 망쳐놓는 바람에 동생이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연의 목소리는 관대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보연의 마음속에서 그 사건은 강시현이 저지른 일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우진의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벌써 소송이 걸려 있는 것만 몇 건에다 음주 사고를 내는 바람에 현재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 어차피 그 남자의 인생은 끝났다.


“보라한테도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고요.”

동생은 강시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나갔던 정신도 도로 붙잡을 아이다. 보연은 그렇게 확신했다.

*

유나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임신중절 약을 구매하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찾은 판매자와 접촉했는데, 약은 안 주고 갑자기 납치하듯 웬 빈 사무실 같은 곳으로 데려오더니 신상을 적어내라고 했다.

겁을 먹은 유나는 사복형사라고 지레짐작했다. 인터넷에서 불법으로 약물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함정수사 같은 건가 보다고.

신상을 적어서 주고 한참을 혼자 남아 기다리자 이윽고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여자는 아름다운 외모에다 온몸에서 귀티가 흘렀다. 아무리 봐도 경찰 같지는 않아서, 그제야 유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유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가, 문득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미인이네요. 청순하고 가녀린 이미지에다…… 딱 좋네.”

칭찬이라기보다는 평가하는 듯한 말투에 유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다.


‘날 어디 팔아넘기려는 건가?’

간이 콩알만 해졌지만 원래 대담한 편인 유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은가.


“임신중절 약 구매하는 거, 불법인 건 알고 있죠?”

여자의 말에 유나는 마주 쏘아붙였다.


“뭐래. 판다고 사기 쳐서 사람을 납치하는 게 더 큰 불법 아녜요?”

한참 어린 유나가 건방지게 구는데도 여자는 오히려 기꺼운 듯했다.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대담한 아가씨네. 마음에 들어요.”

소리 내어 웃고 나서, 여자는 의자를 끌어당겨 유나와 마주 앉았다.


“그래, 직업이 배우라고요?”

아까 경찰인 줄 알고 신상을 곧이곧대로 적어낸 것을 후회하며 유나는 대꾸했다.


“그런데요?”

“예명으로 검색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걸 봐서는 무명배우인 것 같은데, 생활이 힘들겠어요.”

“그래서 그게 아줌마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아줌마라는 말에도 상대는 화내지 않고 타이르듯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큰돈 벌고 싶은 생각 없어요?”

사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유나는 순간적으로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는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사람, 누군지 알겠어요?”

유나는 대번에 사진 속의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 무슨 회사 대표 아니에요? 일곱 살 많은 여자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다 결혼했다던.”

한동안 인터넷에서 떠들썩했고, 얼마 전에는 부자가 같은 날에 결혼했다는 기사가 온 언론을 장식하는 바람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귀찮아서 악플 따위는 달지 않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인 여자가 일곱 살이나 어린 연하에다 미남인 부자를 잡았다는 얘기에 속으로 살짝 짜증이 났었다. 저렇게 운 좋은 여자도 있는데 왜 내 인생만 이 모양일까, 하고.


“이름이 뭐더라…… 윤태하? 맞죠?”

“잘 알고 있네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으로 유나의 살짝 불러 오기 시작한 배를 가리켰다.


“당신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금부터 이 남자 애예요.”

“네?”

“찾아가서 그렇게 주장하란 말이에요.”

유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줌마,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 난 이 남자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예요?”

“어차피 이 남자는 몰라요. 왜냐면…….”

여자가 몸을 기울여 유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억이 없거든.”

“……?”

눈이 커다래진 유나에게, 여자는 차근차근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계획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다. 그 남자가 기억이 없다는 전제 하에.


“할 수 있겠어요?”

설명이 끝나자마자 유나는 물었다.


“하지만 태아 친자확인 검사인가, 하는 게 있다고 하던데요?”

유나가 만났던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이혼하고 오겠다더니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내 아이라는 증거 있느냐고 다그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알아본 거였다.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어차피 국내에서는 검사가 불법이라 결과가 나와 봤자 법적으로 인정받기도 힘들다고 해서 그만뒀지만.

이미 거기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여자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이 거부하면 그쪽도 억지로는 못 해요. 그러니까 너무 모욕적이라 못 하겠다, 낳은 후에 검사해보면 알 거 아니냐고 우기면 돼요.”

“낳으면 바로 들킬 거 아녜요!”

유전자 검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윤태하가 혼혈이니, 그의 아이도 얼굴을 보면 바로 티가 날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 있게 대꾸했다.


“어차피 낳을 거 아니잖아요?

“아……!”

숨을 멈추는 유나에게, 여자가 설명했다.


“생각해봐요. 저쪽은 신혼이고,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예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낳지 못하게 당신을 설득할 거예요. 그럼 못 이기는 척 수술해주고, 위로금으로 한 재산 챙기고 떨어져 주면 그만이지.”

“한 재산이면, 어느 정도……?”

“윤태하도 물론 부자지만, 그 아버지인 케네디 회장은 세계적인 거부예요. 겨우 몇억 정도는 아니겠죠.”

그제야 유나는 여자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필요 없었던 아이, 큰돈까지 챙길 수 있다니!


“어때요, 해볼래요?”

유나는 흥분을 감추려 애를 썼다.


“그래서 몇 대 몇으로 나누자는 건데요?”

위험을 감수하고 연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최소 7대 3 이하로는 안 한다고 버텨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뜻밖의 말을 했다.


“유나 씨 혼자 다 가지면 돼요. 난 한 푼도 필요 없으니까.”

유나는 깜짝 놀랐다.


“그럼 대체 왜…….”

돈 때문이 아니면 왜 이런 짓을 꾸미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여자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유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워낙 대단한 집안이 상대이고 보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기 싫으면 됐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죠. 그럼.”

몸을 일으키는 여자를, 유나가 놀라서 황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래, 어차피 망가진 인생, 역전 한번 해 보는 거야.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그제야 여자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

12월 31일 밤, 시현은 미국에 있는 태하와 영상통화 중이었다.


“이제 5분만 있으면 서른네 살이네.”

울적하게 말하고 시현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있잖아, 네가 기억하는 나는 스물일곱 살일 거 아냐.”

- 그렇지.

“그럼 나 많이 변하지 않았어?”

요즘 세상에 서른넷도 많은 나이가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스물일곱 살일 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체력부터가 확 꺾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지는데 외모야 오죽할까.

태하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 변했지.

역시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태하가 덧붙였다.


- 지금이 더 귀여워. 예쁘고.

화면 너머의 아내를, 어린 남편은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 마흔이 돼도, 쉰이 돼도 당신은 늘 예쁠 거야.”

“…….”

-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많이 먹어, 나이.”

얼굴이 달아올라서 시현은 화면을 향해 괜히 눈을 흘겼다.


“또 당신이래. 기억 찾을 때까지는 누나라고 하랬지?”

태하가 쿡쿡 웃고 고쳐 말했다.


- 그래, 누나.

평소에 부르던 누나, 와는 어딘가 뉘앙스가 달라서 듣고도 시원치가 않았다. 뭐랄까, 조르니까 해준다는 듯이 여유로운 말투랄까.


“언제 올 거야? 진짜 한 달 걸려?”

- 아니,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지. 아버지가 주최하시는 신년 파티 준비도 해야 하니까.

태하가 대답했다.


- 당신, 아니 누나.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돌아갈 때 사갈게.

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을 그렇게 바쁘게 하는지 몰라도, 태하는 겨우 며칠 사이에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제 선물까지 신경을 쓰다니, 시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너만 건강하게 돌아오면 돼.”

- 그래. 내가 가서 깜짝 선물 줄게.

“뭔데?”

- 기대해.

태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

1월 1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시현과 희선이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떡국을 먹고 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려서 나가 보니 희선의 비서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최 비서님?”

“저어, 사모님, 그게…….”

왠지 비서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비서의 등 뒤에서 웬 젊은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강시현 씨 되시나요?”

“그런데요.”

영문도 모르고 대꾸하자, 여자가 반가운 듯이 다가서며 불렀다.


“언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