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내 남편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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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내 남편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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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내 남편의 아이
2023.04.18.
“이유나라고 해요.”
수줍은 듯이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무척이나 초라한 입성을 하고 있었다. 한파경보가 내려질 정도로 추운 날씨에 걸친 거라고는 겨우 보푸라기가 인 임부복에 얄팍한 모직 코트 한 장뿐.
초라한 차림이지만 얼굴은 빼어나게 예뻤다. 긴 머리에 하얀 얼굴, 커다란 검은 눈망울이 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미인이었다.
가녀린 몸에 배만 티가 날 정도로 볼록 나와 있으니, 생판 남이라도 손목 붙잡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서 뭐든 먹이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아마 시현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 남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
호화로운 프레지덴셜 빌라 응접실의 소파에, 여자는 황송한 듯이 엉덩이 끝만 겨우 걸치고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언니는 정말 예쁘시네요.”
할 말을 잃고 있는 시현을, 유나가 감탄이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분이길래 윤 대표님 같은 분이 그렇게 애타게 짝사랑하는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뵈니까 알 것 같아요.”
한참만에야 희선이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우리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 이 말이에요?”
“네.”
유나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만난 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느 날 바에 갔다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를 봤어요. 너무 쓸쓸해 보여서 제가 먼저 말을 걸었던 거예요. 그게 윤 대표님이었어요.”
뺨이 발그레해진 유나가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짝사랑한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부러 그 여자랑 같은 회사에도 들어가고, 옆집에까지 이사 가서 구애했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고 너무 괴로워했어요. 심지어 그 여자의 약혼자가 신혼집에서 바람을 피우다 현장을 들켰는데도 역시 자기를 안 받아준다고요. 그래서 같이 술 마시면서 얘기 들어 주다가 그만…….”
말하다 말고 유나는 제풀에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로 윤 대표님이 저를 좋아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
“그냥, 그땐 그분이 너무 취해서…… 아마도 저를 언니로 착각하신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저어, 침대에서 저를 그렇게 부르셨거든요. 강시현이라고…….”
유나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귓가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저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이 시현에게는 최선이었다.
“두 분이 드디어 결혼하신다는 뉴스 보고 제가 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잘됐다, 너무 다행이다.”
유나는 활짝 웃어 보였지만 눈초리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니까 저 절대로 언니 자리 넘보는 거 아니에요. 저 같은 게 어떻게 감히 두 분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어요?”
부른 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유나는 중얼거렸다.
“그냥 전 이 아이만 지키고 싶어요. ……대표님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놀란 시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태하도 알고 있단 말이에요?”
“네. 아이가 생긴 걸 알고 며칠 고민하다 연락드렸었어요. 명함이 있었거든요.”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태하가 뭐라고 했는데요?”
“낳는 건 제 자유니 간섭하지 않겠다고, 자기 아이라는 게 확인되면 책임은 지시겠다고 했어요. 대신 결혼은 못 하신다고, 자기한테 여자는 영원히 언니 하나뿐이라고요.”
“…….”
“그래서 낳고 나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갑자기 애 안고 불쑥 나타나는 건 가족분들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찾아뵙게 됐어요.”
말을 마치고 난 유나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저어, 그런데 윤 대표님은 출장에서 언제 돌아오세요? 저보다도 대표님한테 얘기 들으시는 게 빠를 텐데요.”
희선과 시현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어봤자 태하가 알 리 없었다. 기억이 없으니까!
“혹시 당장 못 오시면 전화해서 여쭤보세요. 모른다고는 안 하실 거예요. 비록 실수로 가진 아이지만, 그렇게 책임감 없는 분은 아니었어요.”
물론 전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문득 희선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앉아 있어요.”
희선은 시현의 손목을 잡아서 방으로 이끌었다.
“태하가 기억을 잃은 걸 어떻게 알고서 지어낸 거짓말일 거야. 아무리 하룻밤 실수라도, 태하가 너 말고 다른 여자를 가까이할 리가 없잖니?”
시현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태하가 시현을 어릴 때부터 짝사랑했다는 것은 이미 레온이 기자회견에서 다 밝힌 사실이다.
단지 태하가 옆집에 이사까지 왔다든가, 혹은 시현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웠다든가 하는 것은 일반인이 알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어떻게든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도 있기는 했다. 회사까지 쫓아와서 소동을 벌인 정임 덕분에 회사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
[그놈이 네 옆집에 이사까지 와서 살고 있다던데, 그래도 계속 오리발 내밀 거야?]
그때 정임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옆집에 이사 온 것까지도 알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바람피웠다 걸린 장소가 신혼집이라는 것만은 정말 아무도 몰라요.”
사건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곤 모두 정말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레온이라든가, 희선이라든가, 아니면 미주라든가.
그 사실이 아까 저 유나라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심지어 그 여자의 약혼자가 신혼집에서 바람을 피우다 현장을 들켰는데도 역시 자기를 안 받아준다고요.]
희선의 얼굴이 서서히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진짜로 태하 애라는 거니?”
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시현은 태하를 믿었다. 제정신에는 절대 그랬을 리 없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다른 여자를 나로 착각했다면? 그런 일까지 죽어도 없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저 여자가 태하와 사랑하는 사이다, 몰래 사귀었다고 주장했으면 사기꾼이라고 코웃음치고 단번에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그럴듯했다.
만약 내 아이가 맞는다면 책임은 지겠다. 하지만 내게 여자는 강시현 하나뿐이다.
정말 그 상황에 태하가 했을 법한 말이지 않은가.
희선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니, 태하는 기억도 못 하는데!”
대체 어쩌면 좋을까. 묻고 싶은 건 시현이었다.
*
시현은 그길로 빌라를 나와서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회사에 월차를 낸 채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나라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태하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가족들 외에는 그 누구도, 하다못해 미주조차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만약에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다 해도,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들킬 거짓말을 왜 하겠는가.
즉 정말 한순간의 실수가 불러일으킨 비극일 가능성이 컸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태하는 그냥 취해서 사람을 착각한 게 전부다. 그렇다고 저 여자를 탓할 수도 없었다. 애인이 있는 남자를 건드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실수로 생긴 아이라도, 엄마로서 아이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갔다. 자신의 배 속에도 아이가 있으니까.
‘내가 도망치지 않고 진작 태하 마음을 받아줬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시현은 억지로 자신을 탓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보려고 했다. 괜찮다, 그저 실수일 뿐이다. 어차피 태하가 사랑하는 건 나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넓은 시현이라도 이 일만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태하를 닮은 아이가 다른 여자의 배 속에 있다니, 생각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다.
다른 여자의 아이가 내 남편을 아빠라고 부른다니!
괴로워 미칠 지경인데도 정작 태하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질 정도로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남자를 붙잡고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말해봐야 기억을 잃은 태하가 알 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돌아오면 알게 될 텐데, 본인은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그건 그것대로 또 걱정이었다.
죽을 만큼 힘든데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백화점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온 것은, 시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친 지 이틀째의 일이었다.
전에 희선과 함께 쇼핑했던 매장으로 단숨에 달려가자 유나가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언니?”
시현을 발견한 유나는 불장난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했다.
저놈의 언니 소리. 그쪽 같은 동생 둔 적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매장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 여자 분이 옷을 잔뜩 고르시고는, 계산은 회장 며느님께서 해주실 거라면서…….”
계산대 위에 아기 옷과 신발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갔다. 매장 직원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유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언니.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너무 예뻐서 그만 욕심이 났어요.”
“말도 없이 이러면 어떡해요. 차라리 나한테 부탁을 하든지.”
상대도 임신부이니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언니 화나셨어요? 흑……!”
갑자기 유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시현은 당황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했다고?
“제가 잘못했어요, 언니. 전 그냥, 배는 불러 오는데 돈이 없어서 출산 준비는 하나도 못 했고…….”
유나는 서럽게 울먹였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는 새 옷 같은 거 못 입어도 되지만, 우리 아기는…… 예쁜 옷 한 벌 없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말마따나 유나는 너무나 초라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날은 한겨울인데 봄가을용 얇디얇은 임부복, 그것도 몇 번이나 빨아서 색이 바랜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죄송해요, 언니.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얼마나 겁을 먹고 비는지, 눈 감고 들으면 시현이 머리채라도 잡으려 드는 줄 알 지경이었다.
유나의 울음소리에 쇼핑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매장 입구 쪽에 구경하는 무리가 생길 정도였다.
“좀 조용히 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시현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유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유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큰소리로 울며 애원했다.
“저 언니 마음 이해해요. 제가 언니라도 정말 제가 죽이고 싶도록 미울 것 같아요.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하얀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됐다.
“근데 언니, 아기는 아무 죄도 없잖아요. 네?”
갑자기 유나가 시현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왜 이래요?”
흠칫 놀란 시현은 저도 모르게 유나를 뿌리쳤다. 결코 세게 뿌리친 것도 아니었는데, 유나는 마치 종이인형이 바람에 휙 날아가듯 대번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제발, 제발 아기는 미워하지 마세요……!”
유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끅끅거리며 애처롭게 울었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달려들어 유나를 부축했다.
“아유, 이게 무슨 일이래? 얼른 일어나요, 애기 엄마.”
“애 가진 사람이 찬 바닥에서 이러면 안 되지.”
여기저기서 시현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대놓고 가자미눈을 하며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 봐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임신한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시현은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
치료실에서 나온 태하는 말없이 진통제를 삼킨 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치료 후에 으레 찾아오는 지독한 두통과 싸우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버티는 아들을 매일 곁에서 바라보는 레온은 속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한참만에야 눈을 뜬 태하가 안심시키듯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하야.”
레온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혹시 알겠니?”
어제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어제 태하의 대답은 ‘아버지랑 어머니가 사랑에 빠져서 낳아 주신 것 아닙니까?’였다.
힘없이 웃고, 태하는 대답했다.
“황새가 물어다 줬지요.”
“그래, 우리 아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레온은 아들을 부둥켜안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