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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신년 파티 (2) (166/181)


#166. 신년 파티 (2)
2023.05.02.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당신을.”

멍해진 유나를 향해, 태하는 쉬지도 않고 줄줄이 말했다.


“결혼 전에 술에 취한 나와 하룻밤을 함께했고, 그래서 아이가 생겼고. 나한테 말했더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낳으라고 했지요.”

한쪽 팔로 아내의 어깨를 단단히 껴안은 채였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반응에 유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만 머릿속이 정지해버렸다.


‘내가 그랬단 말입니까?’

분명 윤태하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해야 했다. 만에 하나 기억이 돌아왔더라도,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반박해야 정상인데.


‘대체 이건 뭐지?’

태하가 말하는 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시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의 아이면 제 아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낳으세요.”

“…….”

“혹시 유나 씨가 키우기 힘들면 나한테 맡겨도 돼요. 내 자식처럼 잘 키울게요.”

쥐죽은 듯 보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도 모두 놀랐지만, 그중 가장 놀란 것은 유나였다.


[블러핑하는 거예요.]

그때 그 여자는 겁먹지 말라며 그렇게 말했지만, 유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안 낳을 거 뻔히 알고 배짱을 튕기는 게 아니다. 진심이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사기라는 게 들키고 마는데!

이제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 여자가 귀띔해 줬듯, 실수인 척 유산시키는 수밖에 없다.

궁지에 몰려 출구를 찾던 유나는 퍼뜩 생각했다.


‘이왕 하는 거, 최대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게 더 효과가 크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이 터지면 쉬쉬하면서 묻어버릴 수도 없어질 것 아닌가. 한 푼이라도 확실하게 건지려면 그쪽이 안전하다.

유나는 곧바로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언니,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또 화나셨어요?”

유나의 검은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그렁해졌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따위가 감히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연회장의 2층 발코니로 향하는 계단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유나는 울먹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돌아서서 그대로 계단을 향해 뛸 셈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뛰어올라가다 그만 발을 헛디뎌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죄송해요, 당장 나갈게요!”

그러나 돌아선 유나는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경호원 몇 명이 유나의 앞을 철통같이 막아섰다.


“아, 미리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등 뒤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경호원들이 24시간 유나 씨 곁을 지킬 거예요. ……혹시라도 유산되지 않게.”

유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를 낳게 되면 난 끝장인데!

나아갈 길도, 물러날 길도 모두 차단당했다. 당황한 나머지 유나는 저도 모르게 보연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아까부터 보연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지만, 보연이 알은체하지 말라는 듯이 눈치를 보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니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달리듯 쳐다보자 보연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이쪽 보지 말라니까!’

움찔해서 시선을 돌린 유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케네디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늘 예뻐해주던 사람을 보자 한 줄기 희망이 비치는 것 같았다.

유나는 당장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버님, 어떻게 좀 해주세요. 언니가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섭게 홱 뿌리쳐졌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유나를, 경호원들이 잽싸게 부축했다.

유나를 뿌리친 케네디 회장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불쾌한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아, 아버님……?”

“나는 그쪽 같은 딸을 둔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듣는 차디찬 목소리에 유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얼어붙은 유나를 향해, 이윽고 시현이 다가왔다.


“유나 씨, 한 달 전까지 애인이 있었던데요. 그 남자한테도 그 남자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다던데.”

“……!”

“그래서 아이 아빠가 내 남편인가요, 아니면 그 남자인가요?”

시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귓가에 울렸다.


“기억이 안 나면 어디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해볼까요?”

그새 내 뒷조사까지 했구나.

유나는 이제 다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시현이 무릎을 굽혀 유나와 시선을 맞췄다.


“혼자 뒤집어쓸 필요 없어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유나의 눈을 바라보며, 시현은 조용히 물었다.


“사주한 사람이 있잖아요. 누구죠?”

“…….”

“용서까지는 못 해주겠지만, 하는 거 봐서 어느 정도 배려해줄 수는 있어요. 그동안 당신이 쓴 돈에 숙박비만 해도 벌써 수천만 원인데, 그거 다 물어낼 수 있겠어요?”

방금 전까지 한배를 탄 사이였지만, 그 배는 이미 구멍이 뚫려 침몰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붙들고 있는 나뭇조각이라도 빼앗아서 매달려야 했다.


“……저 여자예요.”

유나는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연을 가리켰다.


“전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했어요. 얼굴도 못 본 사람 아이를 어떻게 가졌다고 하겠느냐고요. 그런데 저 여자가, 윤태하 대표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모를 거라면서……!”

유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중간에 보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이것 봐요, 대체 날 언제 봤다고 이러는 거야?”

보연은 누명이라도 쓴 사람처럼 펄펄 뛰었다. 태도만 보면 정말 천하에 켕기는 것 하나 없는 사람 같았다.


“말해봐요. 케네디 부인이 나한테 뒤집어씌우라고 시키던가요? 응?”

오히려 유나를 잡아먹을 듯이 따져 묻던 보연이 문득 제 옆에 있는 남편에게 매달렸다.


“여보, 하늘에 맹세코 난 저 여자 몰라요. 케네디 부인이 나한테 앙심을 품어서 꾸민 일 같아요. 알잖아요, 우리한텐 초대장도 안 보냈었던 거?”

보연의 남편이 얼굴을 굳히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안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딱히 사이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내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기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 일이면 단순히 체면 문제를 떠나서 사업에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시현은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게요. 부인께서 왜 그런 짓을 하셨을까요?”

그때, 연주되고 있던 음악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대신에 어디선가 스피커를 타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칫 시간 끌다가 아이가 더 크면 나도 위험하다고요!

신경질적인 유나의 목소리에, 어떤 여자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방법이 있죠. 실수로 유산을 한 걸로 처리하면 되잖아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보연은 숨을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목소리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그게 무슨 뜻이에요?

- 누군가와 실랑이하다 그만 아이를 잃는 거죠. 예를 들면 강시현이라든가.

파티에는 보연처럼 뒤늦게 초대받은 백합회 사모님들도 모두 참석해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이 여사잖아?”

보연의 남편의 얼굴이 서서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오히려 그 편이 낫겠네요. 아이를 잃으면 남편도 이렇게 독한 여자였나, 하고 아내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겠어요?

보연과의 통화 내용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서야 유나는 겨우 깨달았다. 케네디 회장이 호텔에서 지내도록 해준 것이, 호의가 아닌 함정이었다는 것을.


-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돈 때문은 아니라면서요.

유나의 질문에, 보연이 대답했다.


- 강시현, 그 여자가 내 동생의 인생을 망쳤어요.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만큼 괴로워 봐야죠. 아니, 그 몇 배로 괴로워야지.

거기서 목소리는 멈추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제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꾸민 것이 누구인지.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석상처럼 굳어져 있는 보연을 향해, 그녀의 남편이 다그치듯 물었다.


“처제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거야?”

“……여보.”

“동생 결혼식에서 그 망신을 당하는 걸 보고도 모자랐어? 응?”

왜 이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는 걸까. 답답한 나머지 보연은 남편을 향해 소리 질렀다.


“당신 모르겠어요? 그때 우리 보라 결혼을 망친 게 바로 저 여자란 말이에요!”

그러나 남편은 말 그대로 남의 편이었다.


“그걸 왜 남의 탓을 해? 처제가 남의 남자 건드렸다 벌어진 일인데!”

대놓고 시현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보연은 깨달았다. 남편이 재빠르게도 자신을 손절했다는 것을.

앞으로의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 자신을 남편이 용서할 리 없었다. 물론 케네디 회장과 척지고 싶지도 않겠지.

이혼을 당해도 또 그 뒤가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은 자신 때문에 광고가 끊겨 망하기 일보 직전이니, 거기서도 환영받을 리 없었다.

이렇게 된 거, 하고 보연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이판사판이었다. 어떻게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주고 말겠다고 마음먹고, 보연은 태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부인 되시는 분이 작년에 다른 남자랑 청첩장까지 돌렸다고 하던데요.”

“이봐!”

말리려는 남편을 뿌리치고, 보연은 비웃듯이 말했다.


“듣자니까 꽤 오래 사귀었던 것 같던데, 혹시 알고 결혼하신 건가요?”

그러나 태하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가 오랫동안 원하고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여태 꼭 잡고 있던 아내의 손을 들어 손등에 가만히 입 맞춘 남자가, 똑바로 보연을 바라보았다.


“설령 제 아내에게 열 명의 남자가 있었더라도 저는 상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마지막 열한 번째가 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당당한 태도에 보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속도 좋으셔라. 과거 있는 여자랑 결혼해서 부모님도 참 좋아하시겠……!”

문득 정수리에 차가운 것을 느낀 보연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보연의 머리 위에, 희선이 와인을 병째로 붓고 있었다.


“방금 내 딸에 대해서 더러운 소리 지껄인 거, 책임져야 할 거야.”

소리조차 못 지른 채 얼어붙어 있는 보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와인을 끝까지 부은 희선이 이어서 지시했다.


“치워주세요.”

더러운 쓰레기라도 보는 듯한 말투였다.


“…….”

흉하게 얼룩진 드레스에서 피처럼 붉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두 사람은 채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태하의 눈짓에 시현이 따라 나왔고, 그대로 손을 꼭 잡은 채 미리 태하가 잡아 둔 객실로 향했다.

드디어 단둘이 되는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때맞춰 왔어?

어떻게 저 여자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았어?

서로에게 그런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유나고 보연이고 다 지워져 있었다. 그저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껴안았다가 놓고 한참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다시 껴안았다가 풀고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시현이 두 손으로 태하의 뺨을 감싸고 눈물을 글썽였다.


“치료, 많이 힘들었지?”

영상통화로도 나날이 수척해지는 게 눈에 보였는데, 실제로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한층 더 안쓰러웠다.


“별로.”

고개를 젓고, 태하는 시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고 속삭였다.


“기억났어. 내가 왜 하필 그때로 돌아갔는지.”

궁금하지 않아? 하고 묻듯 갈색 눈동자가 지그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입대하기 직전에 당신에게 했던 말, 기억하지?”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했잖아. 너 제대해서 돌아올 때까지.”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몰라서, 주식 투자 얘기라고 엉뚱하게 오해했었다.


“난 두고두고 그 순간을 후회했었어.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 내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고 정면으로 부딪쳤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당장 받아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최소한 내가 제대할 때까지 다른 남자 만나지 말아달라고 애원이라도 했다면 뭔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당신은 내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줬으니까, 하고 태하는 조금 웃었다.


“그래서 그놈이 운전하는 차에 부딪치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아,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애초에 이런 악연도 없지 않았을까.”

그랬던 거구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아서 시현은 눈을 감았다.


“너는, 왜, 늘 그렇게……!”

왜 늘 그렇게 뭐든 다 네 탓으로 돌리는 거야.

흐느낌에 묻혀 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마지막 말을, 태하는 마치 들은 것처럼 부드럽게 대답했다.


“당신 남편이니까.”

이어서 커다란 손이 다가와, 아직 밋밋한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의 아빠니까.”

그렇게 말하고, 남편은 팔을 벌려 넓은 품에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아무 걱정 마.”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하고 안심시키듯 그는 아내의 등을 어루만졌다.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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