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고소한 콩가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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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고소한 콩가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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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고소한 콩가루 집안
2023.05.05.
파티가 끝나고 그다음 날 저녁, 그랜드호텔 한식당의 조용한 룸에 가족이 모두 모였다.
태하는 오늘따라 유난히 잘 먹었다. 미국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식을 전혀 먹지 못했고, 그나마도 두통이 심해서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흔한 한식당 하나가 없었단 말이야?”
태하가 대답했다.
“그 근처가 다 대학교랑 연구실밖에 없었거든. 한국 식당은커녕 한국 마켓도 없었어.”
“그래, 치료는 다 마치고 온 거니?”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희선이 자기 몫의 갈비찜을 태하 앞으로 밀어놓아 주며 물었다.
“마지막 한 번이 남았었는데 아버지가 전화해서 사실은 이런 상황이라며, 빨리 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비행기도 수배해주셔서 듣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달려간 겁니다.”
시현이 레온을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우리끼리 해결하기로 했잖아요, 아빠.”
유나에게 배후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증거를 잡을 때까지 당분간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자고 제안한 것은 시현이었다.
전문가를 고용해서 유나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고 뒷조사까지 한 것은 레온. 보연을 포함한 백합회 사모님들까지 모두 파티에 초대한 것은 희선이었다.
그러니까 시현과 레온, 희선까지 셋이서 꾸민 일이었다.
신년 파티에서 폭로하기로 한 것은, 이미 알 만한 집안들 사이에서는 케네디 회장 아들이 세컨드를 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아는 일이니만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했다.
즉 미리 꾸며놓은 연극 무대 같은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태하까지 등장한 것은 시현도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어떻게든 태하도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최소한 자기를 애 아빠라고 주장한 여자가 어떤 여잔지는 직접 봐야 할 거 아니니?”
레온이 설명했다.
“제 눈으로 본 건 좋은데, 너무 수준 이하더군요.”
말만 들어도 밥맛이 떨어진다는 듯, 잘 먹고 있던 태하가 숟가락을 놓았다.
“나도 첫눈에 거짓말이란 걸 알았단다. 날 보자마자 아버님, 하는데 이건 뭐지 싶었어. 내 아들이 이런 여자하고? 절대 그럴 리 없지!”
“역시 아버지십니다.”
레온과 가볍게 하이파이브까지 하고 나서 태하는 시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찔린 시현이 얼른 말했다.
“나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은 했어. 그런데 신혼집에서 그 인간이 바람피우다 걸렸던 걸 그 여자가 알고 있더라고. 그건 정말 여기 있는 우리 빼면 미주 씨밖에 모르는 거잖아.”
“그래서, 당신은 언제 알게 된 건데?”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네가 그랬을 것 같지 않은 거야. 그래서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고민하다 보라 언니랑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게 생각났어.”
시현은 희선과 쇼핑하다 백화점에서 보연을 마주쳤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보라한테 들었다면 보라 언니도 알 수 있는 일이잖아. 그래서 혹시 보라 언니가 그 여자 뒤에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던 거지. ……결국은 그 생각이 맞았고.”
말하다 보니 면목이 없어져서, 시현은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보라 언니는 동생 때문에 그런 일을 꾸몄다고 했죠. 백화점에서 저한테 망신도 당했고요. 그러니까 결국은 다 저 때문이에요.”
하지만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꼭 너 때문이라곤 할 수 없어. 그 여자, 나하고도 한바탕했었단다.”
“엄마가요?”
희선이 백합회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친하게 지내는 백합회 언니들이 있거든. 그 언니들 말로는, 그 일 이후로 다른 회원들한테도 따돌림당하고 있었대. 그러니까 더 화가 나서 꾸민 짓이겠지.”
희선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시현이 너 때문이 아니야. 설령 그렇다 해도 저지른 사람이 나쁜 거지, 왜 그게 네 잘못이겠니?”
시현은 내 딸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며 보연의 머리 위에 와인을 끼얹던 희선을 떠올렸다. 유나에게 싸늘하게 대하던 모습도.
누가 나한테 엄마가 없다고 할까. 여기 이렇게 우리 엄마가 있는데. 가슴이 따뜻해졌다.
“하여튼 저 없는 동안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당신이…….”
태하가 시현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레온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니, 내가 제일 고생했는데!”
쌓인 게 많은 얼굴이었다.
“시현이나 로즈는 그냥 무시해버리면 됐지만, 나는 그 여자한테 억지로 다정하게 대해야 했다고. 그놈의 김밥, 억지로 먹었다 체해서 이틀이나 고생한 걸 생각하면……!”
레온은 새삼 분통이 치밀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 두 사람 다, 형사는 물론이고 민사로도 걸어서 끝까지 응징해줄 테니 두고 보렴!”
그런 남편을 달래듯, 희선이 등을 토닥이고는 말했다.
“고양이 언니들이 그러는데, 벌써 어제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이 다 퍼졌대요. 이제 오해도 다 풀렸을 테니 뒷일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잊어버려요.”
“아니, 아직 남은 문제가 있어요.”
레온이 고개를 젓고는 불쑥 물었다.
“태하야, 네 이름이 뭐니?”
엉뚱한 질문에도 태하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물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윤태하입니다. 미국 이름은 아버지 이름하고 같고요.”
“그래, 윤태하지. 그럼 당신은요?”
“나야 정희선이지요.”
희선이 영문을 모르는 채로 대답하고, 이어서 시현이 냉큼 말했다.
“저는 강시현이에요, 아빠.”
“그래, 윤씨, 정씨, 강씨. 그리고 사람들이 나더러는 김레온이라고 하더구나.”
그제야 모두들 레온의 말뜻을 깨달았다. 가족들 성이 다 제각각인 것이다.
레온이 머리를 감쌌다.
“대체 이게 밀가루 집안이 아니면 뭐니?”
드물게 튀어나온 한국어 실수에 나머지 세 사람이 합창을 하듯 입을 모았다.
“콩가루!”
“어쨌든 가루잖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문제는 문제네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나는 희선 케네디…… 뭐 이렇게 해야 하나요?”
“아니, 여긴 한국이잖아요. 내가 한국 이름을 만들어서 당신 성을 따르면 되지요. 그럼 우리 아이들도 정 씨가 될 거고.”
레온이 말하자 태하도 흔쾌히 나섰다.
“그럼 저도 어머니 따라서 정 씨로 바꾸면 되겠군요.”
희선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태하는…… 이제 와서 바꾸면 불편하지 않겠니?”
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윤 씨라는 건 생판 남의 성이고, 별로 좋은 기억도 없으니 진작 바꾸는 게 맞았습니다.”
시현도 말했다.
“태하는 복수국적자잖아요. 그러니까 한국 이름은 어머니 성으로, 미국 이름은 아버지 성으로. 딱 좋네요.”
그렇게 의견이 일치되었다.
“아이들 태어나기 전에 당신이 그 생각을 해내서 다행이에요.”
희선이 새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느리하고 같이 애를 낳는다고 사람들이 웃을까 봐 걱정했는데, 성까지 계속 이 모양이었으면 정말 콩가루 집안 소리 들을 뻔했어요.”
“콩가루가 뭐 어때서요?”
시현이 마침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인절미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고소하기만 한데!”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두들 모처럼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자식들이 돌아가고 나서, 빌라로 돌아온 희선과 레온은 테라스에 나가 야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담요를 가져다 희선의 어깨 위에 덮어주며 레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 숨어 사는 동안에 한수연이란 가명을 썼었잖아요.”
아까 이름 얘기가 나와서 문득 떠올랐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왠지 묻기가 어려워서 둘이 남을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혹시 그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지은 이름인가요?”
희선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게…… 우리 엄마 이름이었나 봐요.”
레온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잖아요. 엄마가 나를 보육원에 맡기고 가면서 적어놓은 이름이 한수연이었대요. 그 후로 다신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게 진짜 이름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아파서 레온은 희선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자란 여자니까, 자식만은 자기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을 텐데. 결국은 그녀의 자식마저도 같은 길을 걷게 만들었다.
“믿어줘요. 이 아이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만들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웃음기 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될 거예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니까.”
*
“정태하, 정태하…… 입에 되게 안 붙는다. 익숙해지려면 좀 오래 걸리겠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되뇌어 보다, 시현은 제 배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럼 우리 아기도 정씨가 되겠구나.”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 성으로 하자.”
“응?”
“아기는 당신이 낳는 거잖아. 당신 혼자 몸 무겁고, 당신 혼자 아플 텐데. 고생은 당신이 다 해놓고 내 성을 붙일 이유가 없어.”
요즘은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 성을 따르게 하는 부부들도 늘어나고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운하지 않겠어? 너야 미국 이름은 아버지 성 따른다지만, 우리 아이는 미국 이름도 필요 없을 텐데.”
태하는 고등학교 때 친부인 레온을 찾은 이후로 미국 국적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복수국적 유지를 위해서 군대도 다녀온 것이었다. 그러나 태하는 미국에서 실제로 거주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식까지는 미국 시민권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서운하다니. 마음 같아선 아버지처럼 내 성도 당신 성으로 바꾸고 싶은데, 그랬다간 진짜로 동생 취급할까 봐 참는 거야.”
동생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기억을 잃은 동안의 태하가 떠올라서였다.
“너 한동안 누나, 누나 할 때 되게 귀여웠는데.”
“뭐?”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갑자기 태하가 정색을 하는 바람에 시현은 움찔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당신, 내가 기억이 없는 동안에 더 불탔던 거 같아.”
태하는 조금 분한 얼굴을 했다.
“솔직히 말해봐. 스무 살의 내가 더 좋았어?”
스물여섯 살의 태하는 여유롭고 능숙했고, 스무 살의 태하는 서툴지만 정열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사실 애초에 같은 사람인데 뭐 그렇게까지 차이가 날까.
그래서 시현은 살아남는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예전이 더 좋았다고 말하면 분명히 승부욕이 불타올라서 더 하려 들겠지?
“당연히 지금이 좋지.”
시현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좋은 사람이랑 좋은 거 하자.”
태하가 성큼 다가서더니 대번에 시현을 달랑 안아들었다.
뭐야, 결국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잖아!
“태하야, 아기, 아기! 아직 초기라 조심해야 한다니까?”
지레 겁을 먹고 버둥거리는 시현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태하는 속삭였다.
“걱정 마. 부담가지 않게 할 테니까.”
잘라 말하자마자 태하는 시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거 알아?”
시현의 옷자락 안으로 슬그머니 손을 넣으며, 태하가 속삭였다.
“마지막 치료를 못 받고 돌아오는 바람에, 딱 한 가지가 기억이 안 나.”
“그, 그게 뭔데?”
“……당신이 어떻게 해줘야 좋아하는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을 듣고 시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어.”
그게 단순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시현은 얼마 가지 않아서 깨달았다. 기억이 안 난다는 핑계로 끝없이 그녀만 예뻐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거였다.
“이러면 네가…… 괴롭지 않아?”
시현은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결을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괴롭다니.”
태하가 웃어 보였다.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은데.”
시현이라고 그동안 왜 남편이 그립지 않았을까. 단지 아기 생각이 먼저였을 뿐.
그런 마음까지도 헤아려주는 남편의 넓은 품에 안겨, 시현은 그 밤 내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