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 부전자전 (169/181)


#169. 부전자전
2023.05.12.



 
태하를 가졌을 때 희선은 입덧으로 꽤나 고생을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언제쯤 시작되려나, 하고 긴장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정작 희선은 멀쩡하고, 대신 레온이 입덧으로 생고생 중이었다. 식사는커녕 물조차도 비린내가 난다고 얼음으로 겨우 수분 보충을 하는 마당이었다.


“정말 당신이 내 입덧 대신해주나 봐요.”

출근도 못 한 채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레온을 보고 희선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당신 대신이라니, 고생하는 보람이 있네요.”

굶어서 핼쑥해진 얼굴로 레온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희선은 입덧은커녕 입맛이 너무 돌아 큰일이었다. 원래 식탐이 있는 타입이 아닌데, 거짓말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맛있게 보였다.

그래도 입덧 때문에 고생하는 남자와 함께 있으니 차마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남몰래 속앓이를 하던 어느 날 밤.

하필이면 TV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보는 순간 군침이 돌았지만, 역시나 레온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밥 냄새도 못 맡는 사람이 라면 냄새를 어떻게 견딜까.

결국 꾹 참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라면만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무 먹고 싶은 나머지 한심하게도 눈물까지 났다.

괜히 레온이 걱정할 것 같아서 살짝 침실을 빠져나온 희선은 소파에서 혼자 소리죽여 훌쩍훌쩍 울었다.


“로즈?”

곁을 비우자 귀신같이 깨서 달려온 레온이, 울고 있는 희선을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


“당신 왜 울어요? 응? 무슨 일 있어요?”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말투였다. 하기야 그녀가 우는 걸 보고 미국에서도 당장 달려온 남자니까.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요.”

희선은 흐느끼며 말했다.


“그럼 먹어야지 왜 울 정도로 참고 있어요. 아기한테 나쁠까 봐?”

스스로도 한심해 죽을 지경인데, 레온은 웃기는커녕 덩달아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엄마가 행복해야 해요. 참지 말고 먹어요, 응?”

“당신이 생으로 굶고 있는데 어떻게 먹어요?”

“아, 나 때문이었어요?”

레온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장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그는 말했다.


“컵라면 말고 봉지 라면이 먹고 싶은 거면 말해요, 비서 부를 테니까.”

희선이 부엌일을 하지 못하도록, 레온은 빌라의 주방에 취사도구를 다 치워버렸다. 그러니 해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컵라면이나 전자레인지로 데워먹는 음식 정도가 전부였다.


“아니에요, 컵라면이면 충분해요!”

자칫 한밤중에 비서를 깨울까 봐, 희선은 황급히 고개를 젓고 물었다.


“그런데 당신, 라면 냄새 맡아도 괜찮겠어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안 괜찮아도 당신은 먹어야 해요.”

손수 컵라면에 물을 붓고, 젓가락까지 쪼개 주면서 레온은 재촉했다.


“자,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요.”

미안했지만 솔솔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희선은 결국 젓가락을 들었다. 한 입 먹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희선은 반쯤 정신을 놓고 컵라면을 먹었다. 그런 희선을 곁에서 지켜보던 레온이, 갑자기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나 한입만 먹어봐도 돼요?”

“먹을 수 있겠어요?”

귀가 번쩍 띈 희선은 당장 젓가락을 넘겨주었다. 욱,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가지 않을까 두근거리며 지켜보는데, 라면을 꿀꺽 삼킨 레온이 이윽고 입맛을 다셨다.


“하나 더 끓일까 봐요.”

 

*

희선은 처음부터 입덧이 없었고, 레온도 한밤중의 컵라면 파티를 계기로 점점 나아져서 결국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반면에 레온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시현의 입덧은 꽤 오래가고 있었다. 세상 모든 냄새가 다 역하고, 시도 때도 없이 토하는 입덧이었다.

이러니 제대로 직장 생활인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차를 다 쓰고도 모자라서, 결국은 육아휴직까지 당겨쓰고 쉬어야 할 정도였다.

임신 중기에 접어드는데도 여전히 고생하는 시현을 보고, 태하는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제발 조금이라도 먹어봐, 응?”

어차피 못 먹을 걸 알면서도 그는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 갖은 요리를 만들어서 시현의 앞에 갖다 바쳤다.


“글쎄 도저히 못 먹겠다니까. 난 됐으니까 너나 먹어.”

시현도 미안했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결국 태하는 선언했다.


“당신이 먹을 때까지 나도 안 먹어.”

처음에는 며칠이나 갈까 싶었는데, 태하는 정말로 그날부터 식사를 딱 끊어버렸다. 가끔 시현이 먹을 때만 함께 먹고, 그나마도 시현이 숟가락을 놓으면 미련 없이 함께 놓아버렸다.


“제발 그러지 마. 나야 입덧 때문에 그런 거지만, 넌 멀쩡한데 왜 덩달아 굶어?”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태하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화가 난 시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너 두고 봐. 가서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저 혼내달라고 가는 건데도, 태하는 자칫 시현이 멀미를 할까 걱정스러워하며 조심조심 운전했다.

차 안에서도 헛구역질을 하며 겨우 빌라에 도착한 시현은 한바탕 태하의 행동을 일러바쳤다.


“엄마, 아빠. 태하 좀 혼내주세요!”

레온은 냉큼 아들 편을 들었다.


“당연하지, 아내가 굶고 있는데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가겠니?”

딸 편인 희선은 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멀쩡한 사람이 생으로 굶는데 시현인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입덧하는 것만도 힘들 텐데 걱정까지 끼치고 그러니, 너는.”

사실 레온이 아들과 더 가깝고, 희선이 딸과 더 가까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레온은 태하를 먼저 만났고, 희선은 시현을 먼저 만났으니까. 거기다 남자로서, 여자로서 공유하는 부분까지 더해지니 아빠 아들이고 엄마 딸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레온과 희선도 각자 자식들 편을 드느라 티격태격하게 되었다.


“태하도 얼마나 지켜보기가 힘들면 저러겠어요.”

“힘들어봐야 어디 입덧하는 사람만 하겠어요?”

“하긴 로즈, 당신이 입덧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도 모르잖아요? 정작 나 입덧할 땐 보지도 못했으면서.”

한마디로 레온을 시무룩하게 만들어놓고, 희선은 뺨이 홀쭉해진 시현을 보고 새삼 안타까워했다.


“자꾸만 그렇게 말라서 어떡하니. 넘어가는 게 하나도 없어?”

시현은 며칠 전부터 자꾸만 떠올랐던 음식을 말했다.


“저 그거 먹고 싶어요, 엄마. 저 어렸을 때, 엄마가 가끔 김치콩나물국에 밥이랑 계란 넣고 끓여 주시던 거 있잖아요.”

“당장 해주고 싶은데, 여긴 도대체 뭘 해먹을 수가 없게 돼 있어서…….”

희선이 안타까운 눈으로 휑한 주방을 쳐다보았다.


“엄마가 너희 집에 가서 며칠 지내면서 밥해줄까?”

“정말요? 엄마 바쁘시지 않아요?”

“바쁘긴, 같이 살았으면 엄마가 삼시 세끼 다 해줬을 텐데.”

희선은 한숨을 지었다. 그놈의 무당만 아니었어도 진작 합가했을 텐데.


“그냥 눈 딱 감고 같이 살아버릴 걸 그랬나 봐.”

레온이 긴장한 얼굴로 얼른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되죠! 자칫하면 우리가 이혼할 수도 있다는데.”

희선이 흠칫하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레온이 찬찬히 타이르듯 말했다.


“무당이 그랬잖아요. 합가하면 자칫 우리는 이혼하고, 태하는 크게 아플 수도 있다고.”

“맞아요. 근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희선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난 당신한테 그 얘기 한 적 없는데요.”

헙.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레온이 허둥지둥 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어……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나요? 그랬던 것 같은데.”

레온이 식은땀을 흘리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희선은 넘어가지 않았다.


“아뇨, 확실해요. 여자들끼리 점집이나 다닌다고 한심해할까 봐 절대 얘기 안 했어요.”

“그럼 태하한테 들었나 보죠.”

레온이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자 태하가 냉큼 아버지를 구하려 끼어들었다.


“예,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시현 씨한테 얘기 들었거든요.”

그러나 이번에는 시현이 얼굴을 굳혔다.


“난 너한테 우리 얘기만 했지, 부모님 이혼수 있다는 얘긴 안 했는데?”

두 남자의 얼굴이 한꺼번에 흙빛이 되었다.

희선과 시현이 동시에 다그쳤다.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요?”

“사실대로 말해.”

결국 부자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두 여자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둘이 짜고 속인 거란 말이야?”

태하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결혼식 올리고 나면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서 그만…….”

미주까지 연루돼 있는 걸 알고, 시현은 기가 찬 나머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가자, 시현아. 당분간 엄마가 같이 지내면서 밥해줄게.”

“네, 엄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희선의 뒤를, 시현이 냉큼 따라나섰다.


“로즈!”

레온이 붙잡으려 했지만 희선은 단호하게 뿌리쳤다.


“따라오지 말아요. 태하 너도 아버지랑 같이 지내면서 반성 좀 하렴.”

 

*

이렇게 해서 모녀는 신혼집에서, 부자는 빌라에서 각각 따로 지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희선의 음식을 먹고 자란 시현이었다. 요리라면 태하도 만만치 않게 잘했지만, 희선의 요리는 그야말로 엄마의 손맛이었다. 희선이 해준 밥을 먹자 그토록 울렁거리던 속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속이 좋아지니 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드라마도 보고, 남편 흉도 보았다.


“밤에 화장실도 잘 못 가요. 잠깐이라도 없어지면 귀신같이 알고 깨서 쫓아온다니까요?”

시현은 하소연을 했다.


“아니, 한밤중에 없어져봐야 어차피 집안일 거 아녜요? 기다리면 올 걸 뭘 그렇게 놀라서 찾아 헤매고 난린지.”

희선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그런 것까지 닮았다니.”

“아빠도 그러세요?”

“말도 마. 낮에 일하다가도 불쑥불쑥 집에 온단다.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대.”

모녀가 그러고 있는 동안 남자들에게서는 이상할 정도로 연락이 없었다.


“밥이나 먹고 있을까 걱정이네. 내가 옆에 없으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인데.”

“태하도요. 출근은 제대로 하고 있을까 모르겠네요.”

사흘째가 되자 슬슬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벌써 용서해주면 안 되겠죠?”

“그럼. 이참에 제대로 반성해야 두 번 다시 속일 생각을 못 하지.”

그러면서도 서로 눈치가 보여서, 남편이 보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 하는 두 사람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그래. 너도 잘 자렴.”

희선은 2층 손님방으로 향하고, 시현은 혼자 침실로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오늘따라 휑한 옆자리가 신경 쓰여서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가물가물 잠이 들 무렵.

갑자기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시현은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시현의 입술을, 태하가 제 입술로 허둥지둥 막았다.

잠시 후 입술을 떼고, 시현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뭐, 뭐야? 언제 왔어?”

“쉿. 목소리 낮춰. 어머니 들으시면 안 돼.”

태하가 소곤거렸다.


“아버지랑 약속했단 말이야. 절대 데리러 가지 말자고.”

어쩐지 두 남자가 짠 듯이 연락이 없더라니 그런 거였구나. 시현은 웃음이 났다.


“속은 좀 어때? 오늘은 뭐 좀 먹었어?”

보자마자 그것부터 묻는 걸 보니, 지난 이틀간 태하가 얼마나 걱정을 하고 애를 태웠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 밥 먹으니까 많이 나아졌어. 나 아까 저녁은 밥 한 그릇 다 먹었다? 토하지도 않고.”

“그랬어?”

태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윤태하가 로또 1등을 맞은들 저렇게 기뻐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도 스르르 누그러졌다.


“너 또 그럴 거야?”

“아니, 절대 안 그래. 이미주 대리님한테도 약속했어. 다시는 절대 당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워낙 사이좋은 부부는 화해도 빨랐다.

시현은 냉큼 태하의 팔을 베고 누웠다. 달랑 며칠 떨어져 있었던 건데, 남편의 넓은 품에 안기니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있잖아, 너 마지막 치료 못 받고 와서 딱 하나가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그게 뭐야?”

시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태하가 대답했다.


“난 당신을 너무 오래 전부터 좋아해서,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나.”

“그건 원래 그랬잖아?”

“하지만 내가 당신 곁에서 지켜줘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은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 그게 크면서 점점 사랑이 됐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아.”

태하의 목소리에 짙은 아쉬움이 배어났다. 자신과의 기억 한 조각도 놓치기 싫어하는 마음이 보여서, 시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너무 고민하지 마. 살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나겠지.”

위로하듯 가볍게 입 맞춘 후, 시현은 태하의 품에 안겨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그 시각, 희선이 머물고 있는 2층 손님방.


“레온? 당신이 여긴 어떻게…….”

“쉿!”

깜짝 놀라는 희선의 입을, 레온이 허둥지둥 손으로 막고 있었다.


“나 여기 온 거 비밀이에요. 데리러 가지 않기로 태하랑 약속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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