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오래된 약속
(170/181)
170. 오래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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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오래된 약속
2023.05.16.
“레온? 당신이 여긴 어떻게…….”
“쉿!”
깜짝 놀라는 희선의 입을, 레온이 허둥지둥 손으로 막았다.
“나 여기 온 거 비밀이에요. 데리러 가지 않기로 태하랑 약속했단 말이에요!”
화장실만 가도 없어진 줄 알고 난리를 쳐대는 남자들이 꽤나 대단한 결심을 했구나. 희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약속해놓고 왜 몰래 왔어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레온은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와락 껴안고 싶은 걸 참느라 희선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로즈. 용서해줘요.”
벌써 마음은 다 풀려놓고, 희선은 괜히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탓하겠어요, 속은 내가 바보지. 아침저녁으로 뽀뽀해주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건 정말로 내가 시킨 게 아니에요! 미주가 알아서 말해준 건데.”
레온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그래도 당신, 미주한테까진 화내지 말아요. 미주 덕분에 난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무척 행복했으니까요.”
체념한 듯한 말투에 희선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게 뭐라고 못 해줄까, 내 남편이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앞으로도 해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희선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발돋움을 했다.
“로즈……?”
입술을 빼앗아 놓고, 희선은 침대에 누우며 깜짝 놀란 남자를 향해 옆자리를 툭툭 쳐 보였다.
“뭐 해요. 안 자고 갈 거예요?”
잠시 후, 레온이 침대에 뛰어들어 희선을 와락 껴안았다.
“자고 갈래요!”
커다란 강아지 같은 남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희선은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
모처럼 태하의 팔을 베고 깊은 잠을 잔 시현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깨우기 싫어서 조용히 나갔는지, 이미 태하는 옆에 없었다.
으레 아침에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눈을 뜨기 마련인데, 오늘은 웬일로 속이 고요했다.
눈을 비비며 방을 나오자 저 멀리 주방에서부터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비위가 확 상하기는커녕 맛있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앞치마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희선이 반갑게 시현을 맞았다.
“시현이 잘 잤니?”
늘 하던 아침 인사인데 오늘따라 찔린다. 시현은 눈길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엄마도 잘 주무셨어요?”
“그, 그럼, 잘 잤지.”
왠지 희선도 시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날은 산부인과 검진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희선의 비서가 차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차를 탔는데도 놀랍게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서, 시현은 다시 한번 입덧이 좋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두 사람 다 의사에게서 아기의 성별에 대한 힌트를 받았다.
“아기가 아빠 닮았대요! 엄마는요?”
“아기 옷은 핑크색으로 사라고 하던데. 이게 딸이란 얘기 맞지?”
두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들이어서 기쁘고, 딸이어서 행복했다. 물론 성별이 바뀌었어도 그건 그것대로 기뻤을 것이다.
“태하한테도 알려줘야 하는데…… 좀 더 반성하게 놔둬야겠죠?”
“그, 그럼. 며칠은 더 있어야지.”
서로 쉽게 용서해 주지 말자고 말해 놓은 게 있어서, 당장 남편에게 연락하지도 못하고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두 여자였다.
*
한밤중에 살금살금 집을 나가던 부자는 그만 현관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밤중에 어디 가니?”
“그러는 아버지는 어디 가십니까?”
레온이 헛기침을 했다.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할까 했단다.”
“저도요.”
뻔히 짐작하면서도 둘은 서로 시치미를 딱 뗐다.
남자 대 남자로 맹세했던 것이다. 약속 어기면 남자도 아니라고!
그 순간,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 당신 언제 와요? 우리 아기, 공주님이래요.
- 빨리 와. 우리 아기, 아빠 닮았대!
메시지를 본 두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비장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온이었다.
“아들. 아버지는 오늘부터 남자 아니니까,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렴.”
“그럼 저도 딸 하겠습니다.”
“좋아, 딸. 가자!”
졸지에 모녀지간이 된 부자가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
임신 기간 내내 잘 먹은 덕분에, 만삭이 가까워지자 희선은 살이 통통하게 쪘다. 몸무게도 늘었지만, 부기(浮氣)까지 더해져서 한층 더 동글동글하게 보였다.
“글쎄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몰라보게 변해 버린 제 몸을 내려다보며 속상해하는 희선을, 레온은 찐빵이라 부르며 귀여워했다. 하얗고 토실토실하다는 이유였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살도 잘 안 빠질 텐데. 아이 낳아도 그대로면 어떡해요?”
“나야 좋죠, 내 찐빵.”
한편 시현은 길고 힘들었던 입덧이 끝나고 나서는 더없이 순조롭게 임신 기간을 보냈다.
아이는 체격도 아빠를 닮았는지 주수에 비해 컸지만, 어찌나 순한지 발길질로 잠든 엄마를 깨우는 법 한번이 없었다.
엄마가 자는 내내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가, 잠에서 깰 때에야 겨우 한 번씩 기지개를 켜듯 꿈틀했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알려주듯이.
아기의 발이 있는 부분이 바로 시현의 오른쪽 아랫배였다. 그 부분에 예비 아빠는 수없이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건강히 잘 있다가 만나자, 우리 아기.”
그때마다 아기는 마치 알아듣고 대답하듯이 뻥, 하고 걷어찼다.
두 사람의 출산예정일은 나란히 9월 초였다. 그리고 한밤중에 태하가 전화를 받은 것은 출산예정일 열흘 전이었다.
- 어쩌면 좋니? 네 엄마가 너무 아파해!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레온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희선은 낮부터 벌써 열 시간째 진통 중이라고 했다. 원래는 분만실에 같이 있다가, 너무 우는 바람에 쫓겨났다는 것이다.
“울지 마세요, 아버지.”
“엄마 괜찮으실 거예요, 처음도 아니시잖아요.”
시현과 태하가 열심히 레온을 달랬지만 레온은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처음이 아니니까 더 속상하지. 태하 낳았을 때는 저 지독한 걸 혼자서 견뎠을 거 아니니?”
단순히 산모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워낙 노산이다 보니 진행이 잘되지 않아서, 슬슬 난산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일단 촉진제를 투여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진행이 안 되면 제왕절개로 갈 수 있으니, 보호자께서는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사의 말에 세 사람은 분만실 밖에 앉아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저, 이 와중에 죄송하지만…….”
갑자기 시현이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시작인 것 같아요.”
태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레온도 눈물을 뚝 그치고 황급히 물었다.
“언제부터 아팠니? 응?”
“사실은 아까 저녁때쯤부터 아팠는데…….”
태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은 벌써 새벽녘인데!
“그럼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가진통인 것 같아서 참고 있었어.”
이리하여 시현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입원하게 되었다.
“거의 다 열렸는데요? 바로 분만실 들어가셔야겠어요.”
내진을 해본 간호사가 혀를 내둘렀다.
“무척 아프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어요?”
“참을 만하던데요.”
시현은 웃어 보였지만 태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왜 시현이 아프다고 말을 안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칫 희선이 위험한 상황이니, 자기까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통이라는 게 그렇게 지독하게 고통스럽다던데. 분만 직전이 될 때까지 묵묵히 참았던 여자를 생각하니 목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었다.
‘왜 당신은 늘 그렇게, 괜찮다면서……!’
문득 태하는 머릿속에서 작은 퍼즐 조각이 번쩍하고 빛나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이렇게 똑같이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
다행히 희선은 수술까지 가지 않고 아침나절에 분만에 성공했다. 오히려 초산인 시현은 진행이 훨씬 빨라서, 결국은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각에 아이를 낳게 되었다.
희선이 낳은 아기는 희선을 닮은 여자아이.
그리고 시현이 낳은 아기는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대로, 태하를 꼭 닮은 사내아이였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의젓했던 아기는 울지도 않고 신기한 듯이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기를 안고, 자신과 똑같은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태하는 중얼거렸다.
“……생각났어.”
무슨 소린지 시현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던 마지막 기억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궁금했지만 물을 기운도 없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시현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숙제하고 있어. 누나는 밥할게.”
시현은 주방으로 나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준비를 했다.
오늘의 메뉴는 태하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집에서는 시현이 학원 끝나고 독서실에 갔다가 밤늦게 오는 줄 알고 있다. 사실은 학원 대신 매일 저녁 태하의 집에 들르고,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 독서실만 가고 있었다.
“어때? 완전 맛있지?”
정신없이 먹느라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 태하를 보고, 시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태하의 숙제까지 봐 주고 나자 바깥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누나 이제 공부하러 갈게.”
시현은 얼른 가방을 멨다. 성적이 떨어졌다가는 자칫 학원비를 엉뚱한 데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작은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요즘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숙제 꼭 챙겨서 학교 가고. 내일 저녁에 또 봐.”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태하가 불쑥 물었다.
“누난 무섭지 않아요?”
“응? 뭐가?”
“독서실 가는 길 어둡잖아요.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태하가 사는 집은 주택가에서도 구석에 있어서, 큰길까지 나가려면 어두컴컴한 좁은 골목을 한참 빠져나가야 했다. 솔직히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걱정까지 해주는 게 기특해서, 시현은 웃으며 태하의 부드러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괜찮아. 누나는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
일부러 씩씩한 척 말하고, 시현은 작별인사를 했다.
“늦었다, 빨리 가봐야겠어. 그럼 내일 또 보자, 태하야!”
가방을 추슬러 메고, 시현은 독서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가 뒤를 따라오는 기척을 깨달은 것은 얼마 후였다. 저만치 뒤에서 계속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골목을 몇 개나 지나도 발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신경이 쓰여서 일부러 가방에서 뭔가를 찾는 척하며 걸음을 멈추자 발자국 소리도 따라서 멈췄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발자국 소리도 다시 들렸다.
역시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등골이 싸늘해지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소리를 지를까?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냅다 뛰어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벌써부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고 싶었지만 손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황한 나머지 발걸음 닿는 대로 걸은 탓에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빨간 벽돌집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겨서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저 골목이 그 골목 같았다.
시현이 한참을 헤매는 동안에도 발소리는 계속 거리를 유지하며 들려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시현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걸음을 멈추자 역시 발소리도 멈췄다.
있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 시현은 가방끈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뒤를 홱 돌아보았다.
‘자꾸 따라오면 소리칠 거예요!’
하고 외치려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그림자였다.
희미한 가로등에 비친 얼굴을 보고 시현은 다리에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태하야!”
시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태하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왜 누나 뒤를 따라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자 태하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쁜 사람이, 누나한테 나쁜 짓 할까 봐 걱정돼서…….”
얘기를 듣고 보니 차마 화도 낼 수가 없었다.
“누나 괜찮다고 했잖아.”
하지만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잖아요. 사실은 누나도 많이 무섭잖아요.”
조그만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만약에 누나가 나쁜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네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른하고 싸워서 어떻게 이길 거야?”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는지, 태하는 속상한 듯이 예쁜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앞으론 따라 나오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어. 네가 이렇게 따라 나오면 누나가 더 걱정돼.”
시현은 태하의 손을 잡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로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말없이 걷던 태하가, 불쑥 중얼거렸다.
“내가 빨리 어른이 돼서, 누나를 지켜줄 거예요.”
진지한 표정이 귀엽고 우스워서, 시현은 짐짓 저도 진지한 척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 약속하는 거다?”
태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시현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마저도 부러질 듯 가느다란 이 아이가 어느 세월에 커서 어른이 될까.
도장까지 찍는 시늉을 하면서도 시현은 웃었다.
*
시현은 눈을 떴다.
방금 꿈속에서 만났던 그 아이가, 어느덧 훌쩍 자라서 아기를 안고 어르며 창가에 서 있었다.
“쉿, 아가. 엄마 주무시니까 우리 조용히 하자.”
든든한 남편이자, 내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
기어이 약속을 지켜낸 남자를 바라보는 시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 [어린 상사] 본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