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외전 1] 로맨틱하시네요 (171/181)


#171화. [외전 1] 로맨틱하시네요
2023.05.19.



 


“너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천하태평하게 있을 거야?”

새해 초. 연락도 없이 불쑥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가 미주를 들들 볶아댔다.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네 친한 친구, 그 부잣집에 시집간 애는 시어머니랑 나란히 허니문 베이비 가졌다고 기사도 났던데!”

시현의 얘기였다. 결혼까지는 어찌어찌 참았는데, 임신 기사를 보고는 더는 못 참고 폭발해서 당장 쫓아온 모양이었다.


“네가 얼굴이 못났어, 학벌이 뒤처지길 해, 직장이 변변치 못하길 해? 대체 왜 멀쩡한 애가 연애도 결혼도 못 하고 있느냐고!”

엄마는 말 그대로 펄펄 뛰었다.


“너 벌써 서른넷이야, 이것아. 이러고 조금만 더 있다간 결혼해서 애 낳기도 힘들어, 알아?”

요즘 세상에 남자고 여자고 꼭 결혼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아이가 꼭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 옳은 말 따위, 엄마의 분노 앞에서는 다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잔말 말고 너, 잠자코 엄마 말대로 해.”

엄마는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결국 미주는 엄마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가 난생처음으로 결혼정보회사라는 곳에 등록을 하고 말았다.

*

등록한 지 일주일 만에 첫 번째 만남이 잡혔다. 장소는 공교롭게도 그랜드호텔에 있는 카페였다.

결혼정보회사 중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곳에 가입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드라마 같은 데서 많이 보았던 대로 대머리나 극단적으로 키 작은 남자, 아니면 멍멍이 같은 매너를 가진 남자가 나올까 봐 잔뜩 긴장했는데 상대는 외의로 꽤나 괜찮은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이미주입니다.”

“김현수입니다. 반갑습니다.”

키를 포함한 외모도 준수하고, 나이나 직업도 미주와 비슷한 데다 예의를 갖추면서도 유머 감각이 있었다.

어차피 성사되지도 않을 의사니 변호사니 하는 전문직보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괜찮은 조건을 가진 남자를 만나기가 사실은 더 어렵다는 걸 미주도 알고 있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서 미주는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었다.


“미주 씨는 주식은 좀 하고 계신가요?”

“그럼요.”

마침 장소가 그랜드호텔이다. 미주는 주위를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원래 이것저것 다양하게 갖고 있었는데, 작년에 다 정리하고 그랜드호텔에 몰빵, 아니 집중 투자했어요.”

“이야, 정말 잘하셨네요! 요즘 그랜드호텔 주식 장난 아니게 오르던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신을 갖고 투자하신 거죠?”

“회장님 얼굴 보자마자 아 이건 반드시 떡상…… 아니 오른다고 생각했죠!”

미주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상대는 박수까지 쳤다.


“미주 씨, 투자 감각이 좋으시네요. 다음에 또 그런 거 있으면 저도 좀 알려주십시오.”

싹싹한 데다 상대를 띄워줄 줄도 아는 남자였다. 대화가 즐거운 나머지 커피가 식는 것도 잊고 있던 미주는, 한참 만에야 겨우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다.


“저는 주식 대신 코인으로 좀 재미를 봤습니다. 우리 같은 직장인들이야 월급이 빤하다 보니 결국은 재테크밖에 없죠.”

화제가 계속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 씨는 주말엔 주로 뭘 하시나요?”

티 나지 않게 슬쩍 화제를 돌려 보려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제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서 주말엔 주로 임장을 다닙니다. 지난주에는 송도 쪽 신축을 보러 갔었는데, 분양가 대비 엄청 잘 빠져서 욕심이 나더라고요. 참, 미주 씨도 청약통장은 갖고 계시죠?”

무슨 얘기를 해도 결국은 부동산, 주식, 코인…… 그러니까 돈 얘기뿐이었다.

물론 미주도 재테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주택청약도 일찍부터 부어 놔서 청약 정보도 가끔씩 찾아보고 있고, 레온을 믿고 투자한 덕분에 주식도 크게 재미를 봤다.

하지만…… 결국 미주는 대놓고 얘기했다.


“저, 재테크 말고 다른 얘기도 좀 하면 안 될까요?

“예?”

“너무 돈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럼 무슨 얘기를 합니까?”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에 왠지 미주는 말문이 막혀서 살짝 더듬거렸다.


“저어, 취미라든가, 인생영화라든가, 아니면 자주 가는 맛집이라든가…… 뭐 그런 거요.”

“…….”

“저도 그렇지만, 현수 씨도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거니까…… 상대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비록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만남을 갖고 있지만 그건 계기일 뿐, 어쨌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소한 미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로맨틱하시네요, 미주 씨.”

그러나 남자는 픽 웃고 되물었다.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연애는 20대 때 벌써 졸업하는 거 아닙니까?”

한순간에 나잇값도 못 하고 핑크빛 환상에 빠져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린 미주는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대화가 단절되자마자 남자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단 1분도 허비하기 아깝다는 듯한 태도였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매니저님 통해서 또 연락드리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건 말하는 남자도, 물론 미주도 잘 알고 있었다.


“…….”

가까이서 시현을 보면서, 미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도대체 스펙이니 돈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 틈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은 또 어떤가.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있었어도 서로에게만 오롯했던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며, 미주는 모처럼 받은 비싼 메이크업이 다 지워지도록 울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결혼과 사랑을 묶어서 생각했던 것인데…….


‘결정사 통해서 만나가지고 사랑타령 하는 게 아니었나.’

마치 찬물이 확 끼얹힌 듯한 느낌이었다. 부끄럽고 민망한 나머지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미주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문득 지난번에 바로 이 카페에서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시현의 결혼식 날이었다.


[미안해요, 미주 씨. 나는…….]

그때 현우는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덕분에 기자님처럼 멋진 분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즐거웠는데요.]

자칫 더 앉아 있다가는 그 얼굴에 또 속아넘어갈 것 같아서, 눈이 쌓인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먼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회사 앞까지 찾아왔었다.


‘설마 진짜로 나한테 미안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다 미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기껏 찾아온 남자를 우산으로 두들겨 패기까지 해서 쫓아낸 것은, 사실 분풀이가 아니라 제 마음에 남은 한 가닥 미련마저도 없애고 싶어서였다.

그 정도로 얻어맞았으면 다신 안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었고, 역시 그 후로 한 달이 훌쩍 지나도록 현우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현우는 기삿거리를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마음을 갖고 놀 수 있는 남자다. 좋아했으니까 알면서도 속아 줬지만, 같은 짓을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싸늘해진 커피를 앞에 두고 한참을 혼자 앉아 있다가, 미주는 터덜터덜 카페를 나왔다.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등 뒤에서 놀란 듯이 말했다.


“미주?”

흠칫 놀라 돌아본 미주의 얼굴이,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확 밝아졌다.


“어, 아버님!”

레온이 반가운 얼굴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호텔엔 웬일이니? 연락도 없이.”

모종의 사건으로 미주를 유난히 예뻐하게 된 레온이었다. 몇 번 만난 후로는 시현에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카페에서 친구 좀 만났어요.”

“그래? 저녁은 어떻게 하고?”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어요. 이제 집에 가려고요.”

그러나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 집에 왔는데 밥도 안 먹이고 보낼 수 없지. 같이 저녁 먹고 가렴.”

“어머님도요?”

“아니. 로즈는 오늘 친한 언니들하고 저녁식사가 있다고 거기 갔거든. 나 혼자 심심하게 먹을 판이었는데 마침 잘됐구나.”

이렇게 해서 미주는 레온과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라운지에서였다.

비록 친구의 시아버지이긴 하지만, 눈부시게 잘생긴 회장님과 멋진 식당에 마주 앉아 있으니 꿀꿀했던 기분도 절로 나아졌다.


“왜, 남자친구가 기자라고 했었잖니? 그런데 정작 결혼식 기사가 안 나갔던데.”

식사 도중에 레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잘됐죠, 뭐. 시현 씨나 어머님이나 얼굴 공개하는 거 부담스러우셨을 텐데요.”

미주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케네디 회장 부인 될 사람이 언제까지 숨어 살 수 있겠어요? 나도 다 각오한 일이에요.]

[한 군데쯤은 팩트로 나가는 게 낫지. 미주 씨 남자친구면 예쁘게 잘 써줄 거 아냐?]

희선과 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허락해줬지만, 그거야 제 남자친구가 기자라니까 배려해준 것뿐이라는 걸 모를 미주가 아니었다.

소심한 희선이나, 한번 스캔들로 크게 골머리를 앓았던 시현이 언론에 얼굴이 알려지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남자친구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괜찮거든 나한테 털어놔 보렴.”

미주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사실 남자친구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잠깐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려는데 갑자기 말문이 콱 막히면서 뭔가 뜨거운 것이 왈칵 흘러넘치는 바람에 미주는 스스로도 당황했다.


“어, 죄송해요. 갑자기 왜 이러지?”

금세 테이블 위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른 냅킨을 집어 들어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

결국 미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처받지 않았던 게 아니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런 일쯤 금세 잊힌다고.

스스로에게 애써 이야기해 왔을 뿐.

어깨를 들썩이는 미주를, 레온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많이 좋아했나 봐요. 그 사람은, 그냥 아버님 결혼식 기사를 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저한테 접근했던 것뿐인데…….”

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그랬다면 허락까지 받은 기사를 왜 안 내보냈겠니.”

미주는 흐느끼며 대답했다.


“큰 그림 그리느라 일단 한발 물러선 건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저하고 잘되면, 앞으로 계속해서 시현 씨나 아버님 댁에 관한 기사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미주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왜 기껏 잡은 특종을 내보내지 않았을까. 왜 굳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회사까지 찾아왔을까.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처음부터 취재를 위해 자기 신분도 속이고 접근한 남자니까, 이번에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 끝에 찾아낸 이유가 저것이었고, 물론 미주는 거기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


“…….”

조용히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실컷 울고 나니까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미주는 마지막 남은 눈물을 닦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버님. 모처럼 맛있는 거 사주시는데 괜히 제가 청승이나 떨고.”

“괜찮단다. 그보다도 내 생각엔,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려다 레온은 금세 고개를 젓고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 어서 밥 먹으렴.”

 

*

주말에 한바탕 울고, 월요일에 출근할 때는 또 씩씩한 미주 씨로 돌아와 있었다.

레온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점심때 시현과 사이좋게 감자탕에 공깃밥 두 그릇 해치우고 난 후였다.


- 미주야. 혹시 주말에 시간 되면 우리 호텔에 좀 와주겠니?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서비스할 봄 메뉴를 시식해 보고 소감을 말해달라는 거였다.

그랜드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은 호되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약이 힘들기로 천하에 유명하다. 그런 곳에서 공짜 밥을 먹여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미주는 냉큼 받아먹었다.


“당연히 가야죠! 시현 씨랑 같이 갈까요?”

레온이 황급히 말했다.


- 아냐. 시현이는 주말에 바쁘다고 했으니까 혼자 오렴.

전화를 끊고 나서 사무실로 돌아간 미주는 시현에게 물었다.


“시현 씨, 주말에 본부장님이랑 데이트 있어?”

“무슨 소리야?”

“아까 아버님이 나한테 전화하셨던데? 주말에 레스토랑 시식 좀 해달라고. 시현 씨는 바쁘니까 혼자 와달라고 하시더라고.”

얘기를 들은 시현은 왠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우리 아빠가 가끔 써먹는 수법인데……?”

“응? 뭐라고?”

“어, 아무것도 아냐.”

영문을 모르는 미주가 되묻자, 시현은 금세 손을 내저었다.


“가서 시식 맛있게 해. 프렌치 레스토랑이니까 꼭 예쁘게 하고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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