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외전 3] 회장님의 육아일기 (1) (173/181)


#173화. [외전 3] 회장님의 육아일기 (1)
2023.05.26.



 


“이유야 어쨌든, 나 두고 또 다른 남자 만나면 화낼 거예요.”

옆 테이블의 맞선남을 슬쩍 쳐다보고, 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좀 괜찮은 사람을 만나든가.”

서현우는 인성은 둘째 치고 외모 하나만은 끝내주는 남자였다. 태하와 레온을 봐서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는 눈으로 봐도 반할 정도였으니까.

보는 눈이야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다. 역시나 다른 테이블 여기저기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두 남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남자가 황급히 따라 나갔다.


“자, 조용해졌으니 우린 식사할까요?”

현우가 자연스럽게 미주의 맞은편에 앉자 웨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식기를 세팅했다.

미주는 시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거, 우리 아빠가 가끔 써먹는 수법인데……?]

어쩐지 예쁘게 하고 가라고 하더니,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구나.

솔직히 전혀 반갑지 않았고, 마주 앉아 밥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물론 박차고 일어나면 그만이었지만, 주위 눈치가 보여서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우가 아니었다면 그냥 속절없이 망신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엉뚱한 말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엄마한테 끌려가서 강제로 가입한 거니까.”

제 귀에도 그지없이 구차한 변명으로 들려서 미주는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냥 말하지 말걸.

그러나 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가입비 돌려달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그럴 생각이에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현우가 물었다.


“친구분은 잘 지냅니까? 임신했다고 하던데.”

“잘 지내요. 아직은 입덧도 없고…….”

말하다 말고 미주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말해두는데 시현 씨 가족에 대해선 아무 얘기 안 할 거니까, 기사에 써먹을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주 씨한테 나는 아주 바닥인가 보네요.”

“아니라고는 안 할게요.”

딱 잘라 말하고, 미주는 태연한 척 식사를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실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사실은 내가 케네디 회장님께 부탁했어요. 어떻게든 미주 씨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현우는 자기 잘못이라는 듯이 얘기했지만 사실 미주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자기가 레온의 앞에서 울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가 마련될 리도 없었다는걸.

아마 자신이 현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걸 보고 레온이 꾸민 일일 터였다. 그야 워낙 다정하신 분이니까.


‘그래도 내가 울었다는 말까지는 안 하셨겠지?’

복잡한 머릿속을 감추며, 미주는 물었다.


“저를 그렇게까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요.”

현우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그때는 특종을 잡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미안할 거 없어요. 기자니까 당연하죠.”

“기자라도 그런 식으로 취재를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 생각을 미리 좀 했으면 좋을 뻔했네요.”

일부러 사과하러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말끝마다 쏘아붙이게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쨌든 상대는 진심으로 사과해줬는데. 이제 괜찮으니까 잊어버리자고 얘기하고 툭툭 털어버리는 게 멋있는 건데.

뻔히 알면서도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찮지 않으니까.

입술을 깨무는 미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현우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눈빛에 후회가 가득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미주 씨 놓치고 싶지 않아요.”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는 가운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만이 느껴졌다. 얼어붙은 것처럼 앉아 있는 미주를 향해, 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미주 씨 속이는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만 나한테 기회를 줄래요?”

네.

당장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미주는 생각했다. 아, 내가 아직도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사과 받을게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 계속 화내고 있어서 나도 미안해요.”

“미주 씨!”

현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러나 미주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

“연인 사이에는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믿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현우 씨를 믿기가 힘들 것 같아요.”

현우는 힘들게 물었다.


“내가 뭘 해도…… 늦은 겁니까?”

“미안해요.”

긴 침묵이 흐르고, 미주는 디저트가 나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오늘은 고마웠어요.”

자칫 마음이 약해질까봐 도망치듯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미주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천하에 씩씩한 척은 다 하면서 정작 이럴 때는 용기가 부족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까짓 거 상처받는 게 뭐가 대수라고. 좋으면 그냥 만나다가, 혹시나 또 속이거든 한 번 더 상처받고 말지 뭐.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없는 자신이.


‘다시는 거짓말하지 말아요. 우리 이번엔 잘해봐요.’

지금이라도 도로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 자신과 싸우느라 미주는 걸음을 빨리했다.


“아.”

우산을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호텔 정문으로 나와서 굵은 빗줄기와 마주했을 때였다. 일기예보를 보고 미리 우산을 챙겨 나왔는데 그만 레스토랑 앞에 비치된 우산꽂이에 놔둔 채로 그냥 나온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주는 도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집어 드는데, 문득 복도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현우였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통화 상대가 어찌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지 여기까지 목소리가 다 들렸다.


- 아니, 거기까지 가서 인터뷰를 못 땄다는 게 말이 돼?

“그렇게 됐습니다.”

- 대체 케네디 회장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엄청나게 흥분한 상대를 향해, 현우는 사죄의 말만 반복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 이걸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질 건데? 사직서라도 쓸 거야?

“예, 쓰겠습니다.”

한참 악다구니를 당하던 현우가 이윽고 한숨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등 뒤에서 묻자 현우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미주 씨.”

“사직서를 왜 써요? 뭐 잘못했어요?”

다그쳐 묻자 현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일하다 좀 크게 실수한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러나 거기 넘어갈 정도로 눈치가 없는 미주가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나랑 관계있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미주 씨랑은…….”

“아까 나한테 두 번 다시 거짓말 안 한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결국 현우는 실토했다.


“회사로 연락이 왔어요. 케네디 회장 부부가 직접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나를 지명했더군요.”

미주는 숨을 삼켰다.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찾아갔더니 둘 중에 고르라고 하시더라고요. 미주 씨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건지, 아니면 인터뷰를 할 건지.”

“…….”

“그래서 미주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듣는 미주가 다 기가 막혔다. 케네디 부부 직접 인터뷰를 포기하는 기자가 대체 대한민국에 어디 있을까. 아까 그의 상사가 전화로 난리를 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왜 그런 바보짓을 했어요? 서현우 씨 특종 좋아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다그치듯 묻게 되었다.


“좋아하죠.”

고개를 끄덕이고, 현우는 덧붙였다.


“……하지만 미주 씨를 더 좋아하게 됐으니까.”

그는 미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대답 대신 미주가 우산을 들어 올리자, 현우가 흠칫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그런 현우를 향해, 미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산 없잖아요. 같이 안 쓸 거예요?”

순간, 현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미주 씨!”

“싫으면 말든가요.”

뒤돌아서 걷기 시작하는 미주의 뒤를, 현우가 황급히 따라왔다.


“같이 가요.”

미주는 피어오르는 미소를 애써 참았다.

*

희선과 레온은 배 속의 아기가 딸이라는 걸 알고 미리 이름을 지어두었다.


[태하 동생이니까 은하라고 하기로 했단다.]

은하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기로, 희선을 닮아서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예쁜 아이였다.

한편 은하보다 5분 늦게 태어난 태하의 아들은 강태준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성은 내 성 따르는 거니까, 아빠 이름에서도 한 글자 주고 싶어.]

엄마인 시현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

태준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로, 검은 머리인 아빠보다도 오히려 더 백인에 가까운 외모였다. 사실 두 아기가 다 혼혈인데, 외모상으로 보면 은하는 영락없이 한국 아기, 태준이는 외국 아기였다.


 
이런 두 아기를, 부모들은 누구 자식 할 것 없이 깊이 사랑했다. 레온 부부에게 태준이는 손자였고, 태하 부부에게 은하는 늦둥이 동생이었으니까.

가끔씩 한쪽이 바쁘거나 부부끼리 단둘이 좋은 시간을 보낼 때면, 나머지 한쪽이 둘 다 맡아서 데리고 자는 일도 잦았다.

워낙 어릴 때부터 이렇게 지내니 아이들도 낯을 가리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어도, 분유를 먹이는 사람이 바뀌어도 울지 않을 정도였다.

공동육아나 다름없이 보낸 1년이 빠르게 흘러가고, 시현의 육아휴직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시현이 아기를 돌보기 위해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레온과 희선 부부가 자식들을 불러서 말했다.


“너희는 마음 놓고 회사 다니렴. 태준이는 우리가 키워주마.”

“아녜요. 엄마 힘드시잖아요.”

시현의 말에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로즈는 낳았으니까 할 일 다 했지. 대학에 가려면 슬슬 공부도 시작해야 하잖니?”

희선은 앞으로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호텔 경영에도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럼요?”

레온이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키울 거야.”

 

*

얼마 후, 그랜드호텔 이사들이 모여 임원회의를 열었다.


“오늘 안건은…… 회장님의 육아휴직 건입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임원 한 사람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어, 회장님. 임원은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근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은 물론이고 남녀고용평등법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회사가 승인할 의무도 없습니다.”

레온은 눈을 한껏 가늘게 뜨고 웃어 보였다.


“여러분이 승인해주면 되지요.”

그래도 임원들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케네디 회장은 그랜드호텔의 오너이자 한편으로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다. 회장님 얼굴 한번 보자고 오는 고객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회장님이 하시겠다는 일에 반대를 할 수도 없고. 개중 한 사람이 말려 보겠다고 한 말이 겨우 이랬다.


“설사 육아휴직을 하시더라도 육아휴직 급여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다른 이사들이 한꺼번에 눈을 흘기자 말을 꺼낸 이사가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수가! 급여가 안 나온다고요? 맙소사, 이 일을 어쩌지?”

갖은 호들갑을 떨고 나서, 레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시치미를 뚝 떼고, 레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또 이의 있으신 분?”

이렇게 공식적으로 두 아이의 육아에 나서게 된 회장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