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외전 4] 회장님의 육아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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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외전 4] 회장님의 육아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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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외전 4] 회장님의 육아일기 (2)
2023.05.30.
레온에게 태준이를 맡기기로 결정하면서 시현과 태하는 나란히 걱정했다.
[잠깐씩이라도 도우미를 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아빠 혼자 힘들어서 애 둘을 어떻게 봐요?]
하지만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걱정 말고 일에나 집중하렴.]
희선 역시 어떻게든 레온을 설득하려 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요? 돈이 없어 사람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약 1년간 은하를 키우면서 가끔씩 태준이를 맡아 돌봤기 때문에 희선은 잘 알고 있었다.
아기가 둘이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로 힘들어진다는 것을. 뻔히 같이 돌보았던 레온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쩌려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 쓰는 게 불안해서 그러는 거면 그냥 나랑 같이 봐요.]
그러나 레온은 희선의 도움조차도 딱 잘라 거절했다.
[당신은 공부해야죠.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드디어 두 아이의 육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전날 밤.
레온은 자다가 문득 눈을 떴다. 곁에서 자고 있어야 할 희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온은 얼른 일어나서 부부 침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아기 방으로 향했다.
원래 처음에 은하는 부부와 같은 방에서 잤다. 희선은 갓 태어난 아기를 다른 방에 재우는 서양식 육아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레온은 그녀의 의견이라면 뭐든 따랐으니까.
그러나 백일이 지난 후부터는 아침까지 깨지 않고 통잠을 자기 시작한 덕분에, 지금은 아기 방에서 재우고 있었다.
희선은 아기 침대 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분유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당신 깼어요?”
레온을 발견한 희선이 얼른 웃어 보였지만 레온은 금세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재촉을 받고서야 희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서요.”
은하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가운데, 희선은 나지막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태하 낳자마자 젖몸살이 너무 심하게 오는 바람에 젖을 금세 말리게 됐거든요. 그래서 분유를 먹였는데 태하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큰 아이였잖아요. 꿀꺽꿀꺽 어찌나 잘 먹는지, 갓난애가 일주일도 안 돼서 한 통을 뚝딱 비우는 거예요.”
“…….”
“잘 먹는 거 보면 뿌듯하면서도, 하루하루 분유 줄어드는 거 보면 자꾸만 걱정이 되지 뭐예요. 이거 다 먹으면 새로 살 돈이 없는데 어떡하나.”
“…….”
“분유통을 보면 자꾸만 그때 불안했던 마음이 떠올라서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이젠 분윳값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머리로는 뻔히 아는데…….”
오래된 습관 같은 불안함을 토로하고, 희선은 남편을 향해 부끄러운 듯이 웃어 보였다.
“바보 같죠?”
고개를 젓고, 레온은 말없이 그녀를 꼭 안고 등을 토닥였다.
*
아기들을 데리고 백화점 앞 놀이터에 매일 모이는 엄마들의 대화는 자꾸만 겉돌고 있었다.
“내가 방금 어디까지 말했지?”
“어, 그러게. 나도 까먹었네?”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건성일 뿐, 신경은 온통 엉뚱한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쌍둥이용 유모차를 밀고 매일 놀이터에 나오는 외국인 남성의 존재 때문이었다.
누군지는 모두가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 유명한 그랜드호텔 케네디 회장 아닌가!
‘아내는 어디 가고 혼자 애를 보지?’
‘애들이 쌍둥인가?’
호기심이 폭발했지만 실제로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한국말을 잘한다는 사실은 뉴스에서 봐서 알고 있지만, 일단 외모부터가 말을 걸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 사십 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저렇게 깎아놓은 것처럼 생겼는지!
게다가 상대는 세계적인 부호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 비서에 경호원들까지 놀이터 주변에 여기저기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다가가서 말을 걸 용기도 없었다.
결국 안 쳐다보는 척 힐끗힐끗 쳐다만 보는데, 이상하게도 케네디 회장 역시 이쪽을 자꾸만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하다 엄마들은 한 가지 점에 생각이 미쳤다. 이 놀이터는 케네디 회장 소유의 백화점 바로 앞에 있다. 즉 부지 자체가 백화점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건가?’
‘자기 애들이 우리 애들이랑 노는 게 싫어서 저러나?’
그렇게 서로 멀찍이서 쳐다만 보는 어색한 대치 상태가 벌써 사흘째.
드디어 먼저 침묵을 깨고 다가온 것은 케네디 회장 쪽이었다.
“저어, 잠깐 실례합니다.”
깜짝 놀란 엄마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정말 나가 달라는 걸까?
가슴이 철렁한 순간, 회장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기 머리 묶는 것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잠시 후, 놀이터의 모든 엄마들이 레온과 아이들을 둘러쌌다.
“세상에, 아기들이 너무 예뻐요!”
아장아장 걷는 돌쟁이 아기들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아기 낳으셨다는 기사는 봤는데, 쌍둥이였어요?”
“아뇨. 이 애는 제 딸, 그리고 이 애가 제 손자랍니다.”
레온이 아이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대답했다. 손자라는 말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본인의 입에서 듣고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엄마들은 며칠 동안 쌓였던 호기심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왜 손자까지 데리고 계신 거예요?”
“힘드실 텐데 어린이집엔 안 보내세요?”
무슨 질문을 해도 케네디 회장은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제 아들 부부가 휴직을 고민해서, 제가 봐주기로 했습니다.”
“아직 너무 어려서요. 최소한 말을 하게 될 때까지는 제 손으로 키울까 합니다.”
아이 둘을 혼자서!
진심으로 감동한 엄마들은 육아 팁 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밥솥 세 칸으로 나누는 칸막이 있거든요? 그거 있으면 한꺼번에 이유식 여러 종류 만들 수 있어서 편해요.”
“아기들도 집에만 있으면 심심해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린이집은 아직 안 보내더라도, 백화점 문화센터 등록하면 좋아요.”
“여기 백화점 영유아 프로그램이 괜찮거든요. 돌쟁이들한테는 도리도리 짝짜꿍 강좌가 좋은데, 워낙 인기라 자리가 안 날 거라서…….”
안타까워하는 한 엄마의 옆구리를, 다른 엄마들이 눈치를 주며 쿡쿡 찔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백화점 오너인데!
그러나 정작 케네디 회장은 진지한 얼굴로 수첩을 꺼냈다.
“전화번호 좀 가르쳐주십시오. 문의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어느덧 엄마들 사이에 완벽하게 끼어든 회장님이었다.
*
한편 레온에게 육아를 맡긴 희선은 본격적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5년도 더 지나서 입시 준비라니,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영어공부만은 꾸준히 계속해왔다는 것이었다.
진학 컨설팅을 받아본 결과, 희선은 아직 영어 특기자 전형이 남아 있는 대학의 입시를 노려보기로 했다.
수능 최저 기준이 없어서, 그야말로 영어에 올인하는 전략이었다. 회화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공인 영어시험 성적조차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리하여 희선은 개인 과외를 받게 되었다.
레온은 희선을 위해서 호텔 사무동에 있는 사무실 하나를 공부방으로 꾸며 주었다. 그곳에서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국내 대학교에서 십 년 가까이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미국인 남성이 희선의 선생님이 되었다. 희선보다 두 살 아래로, 웃을 때면 눈이 한껏 가늘어지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매리언 윌리엄스입니다. 매리언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마도 비서실에서는 그에게 희선의 정확한 신분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랜드호텔 임원이시라고 들었는데, 직함으로 불러드리면 될까요?]
[아뇨, 저도 그냥 로즈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로즈. 그럼 우리 앞으로 같이 열심히 공부해보죠.]
매리언은 낯을 가리는 희선의 성격을 금세 파악했는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게끔 이끌었다.
[로즈는 케네디 회장님하고 만나본 적이 있겠죠?]
하필 레온에 대한 화제가 나오는 바람에 희선은 속으로 살짝 찔렸다.
[네, 같이 일하고 있으니까요.]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며 일단 둘러대는데 선생님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만한 말이 나왔다.
[사실은 케네디 회장님하고는 미국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랍니다.]
[정말요?]
[물론 그는 나를 모르지만요.]
매리언이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웨스트 엘리자베스 대학 동문이거든요.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는데, 또 같은 건물에 수업이 있어서 지나다니며 자주 보았지요.]
남편의 대학 시절 얘기에 호기심이 인 나머지 희선은 어느덧 수줍음도 잊어버렸다.
[저희 회장님, 그때는 어땠나요?]
[엄청나게 유명했죠. 워낙 명문가 출신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생겼잖아요. 데이트 신청하는 여자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래요?]
레온이 대학을 다닐 때라면 이미 자신과 만나서 연애한 후다. 괜히 입이 근질거린 나머지 희선은 슬그머니 말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속상해한 여자들이 많았겠죠?]
레온이 다른 여자를 만났을 리 없다고 희선은 철석같이 믿었다. 역시나 매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거절당한 여자들만 수십 명이라고 들었는걸요.]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실은 그게 저 때문이랍니다!
희선이 그렇게 고백하려는 순간, 매리언이 말을 이었다.
[워낙 여자친구가 미인이었으니까요.]
[네?]
[대학교에 여자친구가 있었거든요. 그쪽도 꽤나 유명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매리언이 잠시 후에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제니퍼였어요.]
*
그날 저녁, 퇴근해서 온 시현과 태하가 태준이를 데려가고 얼마 안 있어 희선도 집으로 돌아왔다.
“당신 왔어요?”
은하를 안고 반갑게 달려나간 레온이, 예쁘게 묶은 은하의 머리를 내보이며 자랑했다.
“내가 묶은 건데, 어때요? 동네 엄마들이 가르쳐줬어요.”
그러나 희선은 별 대꾸도 없이 은하를 받아 안기만 했다. 칭찬을 받고 싶었던 레온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저녁식사 내내 레온은 희선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은 오늘 하루 어땠어요?”
희선과 재회한 이후, 레온은 회사 일을 팽개치고 카레집 아르바이트까지 자청하면서 그녀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결혼한 후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것은, 희선의 임신 초기에 태하의 치료를 위해 미국에 다녀온 후로 처음이었다.
“공부는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은 마음에 들었나요?”
하다못해 점심엔 뭘 먹었는지, 그녀의 하루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싶은데. 정작 희선은 왠지 뭘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냥 그랬어요.”
종일 떨어져 있었는데 보고 싶고 궁금했던 건 나 혼자뿐인가. 내심 서운했지만 레온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랜만에 공부하려니 피곤해서 그러겠지.
빨리 밤이 왔으면 하고 그는 손꼽아 기다렸다. 침대에서 꼭 안아주면 원래의 다정한 아내로 돌아가겠지, 하고.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착하게도 은하는 초저녁에 이유식에 분유 한 병까지 비우자마자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우리도 오늘은 일찍 잘까요?”
은하를 눕혀 놓고 부부 침실로 돌아온 레온이 유혹하듯 말했다. 그러나 희선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나 오늘은 은하랑 잘래요.”
베개를 들고 쌩하니 아기 방으로 가 버리는 희선의 등 뒤를, 레온이 닭 쫓던 강아지처럼 바라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