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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외전 5] 회장님의 육아일기 (3) (175/181)


#175. [외전 5] 회장님의 육아일기 (3)
2023.06.02.


레온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니!

희선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에 빠졌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차마 시현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글쎄 네 아빠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지 뭐니!’

명색이 부모가 돼서 자식을 붙들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결국 하소연할 데라고는 친하게 지내는 고양이 사모님들뿐이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평생 여자라곤 저밖에 없었다고 해놓고!”

늘 조용하고 차분한 희선이 얼굴까지 빨개져서 씩씩거리는 것을 보고 고양이 사모님들은 웃음을 꾹 참았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회장님이 나쁜 마음으로 속인 게 아니잖아. 다 정 여사 속상할까 봐 그런 거지.”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그러려니, 하고 덮어두고 사는 거지.”

“그래서 그 남자 지금 누가 데리고 살아? 제니퍼가 아니라 정 여사잖아.”

언니들이 돌아가며 위로를 해줘도 희선은 좀처럼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니는 레온의 모습을 상상하자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나는 그때 태하를 빼앗기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었는데, 정작 당신은……!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희선은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각방 쓸 거예요.”

그녀가 남편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징벌이었다.

*

돌쟁이 두 아기들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저지레도 부쩍 늘었다. 고모인 은하가 앞장서서 사고를 치면, 조카인 태준이는 따라서 같이 사고를 쳤다. 잠시만 눈을 떼도 어김없이 사건이 벌어졌다.

레온이 일 때문에 한 2, 3분 정도나 통화를 했을까. 웬일로 조용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새 둘이서 커다란 로션 통을 반이나 짜내서 거실 바닥에 온통 처덕처덕 발라놓았다.

비서까지 동원해서 함께 열심히 닦아내고 있는데 그사이에도 두 아기는 레온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좋다고 꺄꺄거렸다.


“압빠!”

“하부지!”

 

 
겨우겨우 다 치우고 이유식까지 먹이고 나자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재촉이 날아왔다.


“회장님, 문화센터 가실 시간입니다.”

제 옷은 갈아입을 엄두도 못 내고, 겨우 아기들 옷만 챙겨 입혀서 쌍둥이용 아기 띠로 둘러매고 나서는 레온을 보고 장 비서가 왠지 움찔했다.


“그러고 가시는 겁니까?”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도착해서는 또 아기 둘을 데리고 강좌를 듣느라 또 한바탕 혼이 쑥 달아났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같이 강좌를 듣는 엄마들이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였다.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문화센터를 나오던 레온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한 무리의 여자들 속에서 희선을 발견한 것이었다.

멀찍이서도 아내의 모습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보는데도 밖에서 마주치니 왜 이렇게 반가운 건지. 레온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


“로즈!”

희선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은하야, 엄마한테 가자!”

얼른 아기띠를 추슬러 메고 희선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희선은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반대편으로 가버렸다.


“…….”

뒤에 남은 레온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

그날 밤, 레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즈,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요?”

그러나 희선은 대답 대신에 한참 흘겨보더니 베개를 끌어안고 또 아기방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레온은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다. 짚이는 게 있다면 단 하나…….


‘혹시 내가 부끄러웠나?’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선 레온은 제 모습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아기들에게 쥐어뜯긴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면도도 며칠이나 거르는 바람에 얼굴은 까칠하고, 옷은 아기들이 잡아당겨서 목 부분이 늘어나 있는 데다 이유식까지 여기저기 말라붙어 얼룩투성이였다.


‘이 꼴을 하고 돌아다녔단 말이야?’

레온은 반성했다. 친한 언니들 앞에서 이런 꾀죄죄한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히 창피했겠지!

이래서야 남자로서 매력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희선 자기를 싫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좋아, 오랜만에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다행히도 마침 다음날이 금요일이었다.


“시현아, 혹시 내일 태준이 데려갈 때 은하도 같이 좀 데려가줄 수 있겠니?”

레온이 전화해서 부탁하자 시현은 흔쾌히 대답했다.


- 아빠 주중에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가 주말 내내 은하 데리고 있을 테니까, 엄마랑 단둘이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우리 딸, 눈치도 빠르지. 레온은 신이 났다.

대망의 금요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아들 부부가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자마자 레온은 잽싸게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새 옷과 구두를 고르고, 백화점 내의 헤어숍에 들러 머리 손질도 받았다.


“최대한 멋지게 부탁합니다.”

“어디 중요한 자리 나가십니까?”

미용사의 물음에 레온은 대답했다.


“아내하고 데이트할 겁니다.”

꽃다발도 준비했고, 레스토랑에 좋은 와인도 마련해놓으라고 일렀다.

머리 손질을 받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 나서야 레온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것은 육아에 지친 남자가 아니라, 미모로 유명한 케네디 회장이었다.


‘이 정도면 로즈도 싫어하지 않겠지?’

만족스럽게 씩 웃고, 레온은 꽃다발을 들고 백화점을 나섰다. 호텔 사무동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희선을 데리러 가는 것이었다.

백화점을 나와 호텔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소리 죽인 탄성이 들려왔다.


“케네디 회장 아니야?”

“세상에,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멋있네!”

모처럼 자신감이 차올랐다. 레온은 가슴을 활짝 펴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들뜬 기분도 잠시. 공부방으로 쓰는 사무실 유리벽 안의 희선을 보고, 레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웬 외국인 남성과 단둘이 마주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저 사람은 누구죠?”

깜짝 놀란 레온이 묻자 장 비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사모님 영어 담당인 윌리엄스 교수님입니다. 진작 보고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매리언이라고 안 했나요?”

“저분 이름이 매리언 윌리엄스인데요.”

이름만 보고 당연히 여자인 줄 알았던 레온은 뒤늦게 땅을 쳤다. 남자인 줄 알았으면 절대 채용하지 않았을 텐데!


“장 비서님, 솔직히 말해봐요. 저 사람이 잘생겼어요, 내가 잘생겼어요?”

유리벽 안을 노려보며, 레온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회장님께서 훨씬 미남이시지만…….”

“말끝은 왜 흐리죠?”

“저쪽은 젊은데요.”

레온이 노려보자 장 비서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분하지만 그 말대로였다. 상대는 미남에다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희선은 시종일관 영어 선생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 희선을 보며 레온은 가슴이 다 무너질 지경이었다. 나한테는 며칠 동안 웃어주기는커녕 눈도 안 쳐다봐 줘놓고!

밖에서 남편이 질투로 눈이 반쯤 돌아가 있는 것도 모르고, 희선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어 가며 영어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당장 뛰어들어서 손목을 끌고 나오지 않기 위해, 레온은 자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했다.


‘참자. 질투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은 끝에 겨우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책을 덮더니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매리언 선생님.]

희선의 인사를 들은 레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야, 이름으로 불러?

그러나 더 기함할 노릇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수고했어요, 로즈. 그럼 월요일에 만나요.]

로즈.

다른 남자 입에서 나오는 아내의 애칭을 들은 순간, 그렇지 않아도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었던 인내심이 기어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온은 꽃다발을 장 비서에게 팽개치듯 건네고, 성큼성큼 다가가서 희선의 손을 붙잡았다.


“레온?”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깜짝 놀란 희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레온은 남자를 향해 영어로 말했다.


[월요일부터는 수업하러 오지 않아도 됩니다. 비서실에서 연락이 갈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예?]

[그럼 실례.]

당황한 영어 선생을 뒤로하고, 레온은 희선의 손을 잡은 채 돌아섰다.


“왜 이래요, 당신?”

희선이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레온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요!”

[안고 갈까요?]

레온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희선은 그 이상 뻗대지 않고 순순히 따라왔다.

빌라에 들어서자마자 희선은 레온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공부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한국말로 쏘아붙이는 희선을 향해, 레온은 영어로 대꾸했다.


[앞으로 영어는 나하고 공부해요.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희선도 영어로 맞받아쳤다.


[당신은 하도 한국말만 해서 이제 영어 가물가물하다면서요?]

레온은 이를 갈았다.


[당신더러 다른 놈이랑 영어로 얘기하라고 내가 여태 한국어를 배운 게 아니지.]

후회가 막심했다. 그냥 처음부터 영어로 이야기할걸. 누구 좋으라고, 내가!


[선생님이 뭘 잘못했다고 갑자기 해고 통보예요?]

[당신을 로즈라고 불렀잖아요.]

로즈라는 이름은 단순히 희선의 영어 이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부르는 애칭이었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도 그래요. 어떻게 다른 사람이 당신을 로즈라고 부르게 만들 수 있죠?]

이쯤 되면 움찔하며 미안해할 줄 알았는데, 왠지 희선은 더욱더 화가 난 듯했다.


[그럼 당신을 레온이라고 부른 여자는 여태 나밖에 없어요?]

[그건 문제가 다르잖아요!]

제 이름은 애칭이 아니라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붙여진 이름 아닌가. 그러나 희선은 막무가내였다.


[아, 그래요? 당신 이름은 아무 여자나 다 불러도 되고, 내 이름은 안 된다 이거죠?]

희선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늘 사랑스러웠던 아내가 대체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건지, 레온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여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이러는 거예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모른다. 속이 터지는 것은 이쪽인데, 오히려 희선이 울먹거렸다.


[거짓말쟁이. 진짜 싫어.]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사랑하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한 것을 보니 레온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로즈. 울지 말아요.]

허리를 꼭 껴안고 입술을 가져가자 희선이 버럭 화를 내며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저리 가요!]

그러나 레온은 못 들은 척 입을 맞췄다. 영어고 한국어고, 이럴 때는 몸의 대화가 제일이다.

울지 말아요, 내 사랑.

마음을 담아 키스하자 결국 희선이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미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매달리듯 목을 감아 오는 팔에, 레온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

아침에 먼저 눈을 뜬 것은 희선이었다.

제 팔을 베개 대신 내주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흘겨보다 희선은 그만 혼자 픽 웃었다.


‘하여튼 저놈의 얼굴.’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왠지 오늘은 평소보다도 한층 더 잘생겨 보인다 싶어서 자세히 바라보니 머리 손질을 받은 티가 났다.

어제 레온의 등 뒤에서 장 비서가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었던 것도 뒤이어 떠올랐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데이트하려고 잔뜩 꾸미고 자신을 데리러 왔다가, 영어 선생하고 사이가 좋아 보여서 질투가 난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 같은 아줌마를 두고 뭘 그리 질투를 한담.

마음이 풀리려다가도 제니퍼를 떠올리자 또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자고 생각해도 제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속 좁은 자신에게 한숨을 지으며, 희선은 살짝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TV를 켜려는데,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의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 그랜드호텔 케네디 회장, 미혼모 지원 단체에 100억 쾌척

희선은 깜짝 놀랐다. 그런 말 없었는데?

레온은 평소에 무슨 일을 하든 희선에게 먼저 상의하거나 미리 이야기해주었다. 하물며 이 정도 규모의 일이면 얘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희선은 얼른 신문을 집어 들고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 한편 단체는 이번 대규모 지원에 힘입어 미혼모뿐 아니라 저소득 가정의 영아들에게도 분유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케네디 회장은 ‘대한민국의 어느 엄마도 분유 때문에 불안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하며 향후로도 꾸준한 지원을 약속했다고…….

얼마 전, 레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분유통을 보면 자꾸만 그때 불안했던 마음이 떠올라서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이젠 분윳값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머리로는 뻔히 아는데…….]

그때 말없이 그녀를 꼭 안아 주었던 남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희선은 깨달았다.


‘나 때문에…….’

희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신문을 집어던지고 달려가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 남편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잠이 덜 깬 레온이 몽롱한 와중에도 기쁜 듯이 그녀를 마주 안았다.


“……로즈.”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자 여태 차마 못 하고 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제니퍼, 많이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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