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7화 (7/170)

7. 삼 세 개

계속 웃고 있을 순 없기에, 엔크리드는 곧 웃음을 멈췄다.

그걸 본 렘이 엔크리드의 손목을 낚아채곤 품에서 붕대를 꺼내 칭칭 감았다.

“오늘은 내 뒤에만 있으쇼. 손이 이래서야, 뒈지기 딱 좋겠네. 대련하다가 이 모양이 됐다고 하면 소대장 새끼가 지랄 염병을 떨 거요.”

“됐어.”

“되긴 뭐가 됐다고 그러는 거요. 이 손으로 전장 나가면 죽는다니까? 혹시 장래 희망이 자살이슈? 그럼 나도 방해 안 하고.”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손으로 전장에 나서면 뒈지기 딱 좋을 거다.

다만, 엔크리드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 더 죽으면 그만이니.

그럼 백스물다섯 번째의 아침이 밝아 올 테고.

‘지겹지는 않지만.’

반복된 오늘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엔크리드가 그동안 단순히 검술만 단련한 건 아니었다.

백스물네 번의 하루를 반복하며 ‘오늘’을 헤쳐나갈 방법도 궁리해 뒀다.

평범한 병사가 첫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걸 두고, 행운의 여신이 흘린 동전을 주웠다고 말하곤 한다.

딱히 뛰어난 재능이 없다면 목숨을 지키는 데 운이 큰 힘이 된다는 거다.

엔크리드가 계산하기에 죽지 않으려면 그런 운이 몇 번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운에 기댈 순 없지.’

엔크리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특히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다.

그러므로 대비할 수 있고.

그러므로 준비할 수 있었다.

백스물네 번째, 엔크리드는 이번에도 찌르기에 목이 꿰여 죽었다.

손바닥이 엉망이라 칼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래도 단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기 싫었기에, 적병의 찌르기를 눈에 담았다. 마지막까지 숨을 고르고 버텼다.

그는 그렇게 했고.

“아프겠어. 자비다.”

적병의 목소리를 들으며 목을 통해 느껴지는 화끈한 날붙이의 통증을 견뎠다.

혀에 뭔가 걸리기에 죽기 직전 툭 하고 뱉으니 깨진 어금니였다.

고통에 어금니를 꽉 깨문 탓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 지겨운 일은 아니다.

반복되는 오늘을 값지게 보냈기에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뒈지기는 싫다는 거지.’

죽는 게 즐거울 리는 없었다.

그것도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변태 새끼한테 죽어야 했다.

끝낼 수 있다면 끝낼 것이다. 하루에 갇혔다는 걸 깨닫자마자 엔크리드는 그걸 결심했었다.

그리고.

깡! 깡! 깡!

백스물다섯 번째 아침이 밝았다.

* * *

자리에서 일어난 엔크리드는 렘의 신발부터 들고 털었다.

“뭐하슈? 그거 내 건데?”

“알아, 냄새가 고약해. 이대로 적군에게 던지면 발 냄새로 적군 쉰 명은 잡겠다.”

“아침부터 지랄 맞은 걸 보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요?”

툭- 하고 렘의 부츠 안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떨어진 벌레를 엔크리드가 발로 짓이겼다.

“아침에 들어간 거 봤다.”

“……거, 고맙수다.”

렘이 픽 웃으며 부츠를 고쳐 신었다.

렘을 뒤에 두고, 엔크리드는 천막을 젖히며 밖으로 나갔다.

동이 막 텄기에 새벽의 푸른색과 햇볕의 노란색이 섞인 광경이 보였다.

분주히 움직이는 막번 불침번은 냄비를 후리기 바쁘고.

막 일어난 병사는 눈을 비비며 짜증을 내거나, 말없이 할 일을 하곤 했다.

“염병, 그만 두드려. 대가리 깨지겠다.”

“그러니까 누가 어제 퍼마시고 자래?”

뒤쪽 막사였다.

“안 닥치냐? 술 처먹은 거 걸리면 징계라고.”

“지랄한다.”

막번 불침번과 어제 술을 퍼마신 아군의 대화다.

그걸 들으며 엔크리드는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술 처먹은 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부대의 십인대장이자, 분대장이었다. 그리고 저 작자는 좋은 어머니를 뒀다.

예순여섯 번째 날, 그날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저 친구에게 말을 걸어 괜히 친한 척을 했었다.

“아침 당번 아니유?”

“네가 해 줘.”

그리 뒤쪽을 살피는 사이, 뒤따라온 렘에게 엔크리드가 대뜸 말했다.

“내가 왜?”

“한 번쯤 해 줄 수도 있잖아. 그동안 내가 대신해 준 게 다섯 번이 넘는다.”

“치사하게 그런 걸 세고 있었수?”

“응, 네 것만.”

“왜 내 것만 세.”

“얄밉거든, 너.”

백스물다섯 번 동안 렘 새끼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 따윈 없다. 감정이 있다면 오히려 고마움만 남았지.

어쨌든 렘은 해 줄 것이다.

렘에게 아침 당번을 맡기는 건 몇 번이고 반복한 오늘 중 가장 생존 확률이 높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패턴이었다.

“알겠수다. 염병, 내가 하지 뭐.”

대강 몸을 움직여 열을 내니, 오전의 싸늘한 공기에 몸이 떨리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면서도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둘 분대원이 밖으로 나섰다.

처음은 작센이다. 부지런한 쪽에 속하는 분대원이다. 눈을 마주친 작센이 눈인사를 해 왔다.

엔크리드도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몇 명이 줄줄이 나온 뒤다.

엔크리드는 가장 늦게 눈이 반쯤 감긴 채 나오는 분대원을 붙들었다.

“왕눈아.”

“음?”

별명 왕눈이, 본명 크라이스 올맨.

곱상한 외모의 분대원이다.

그리고 꼴통만 모아 놨다고 하지만 전투력만큼은 뛰어난 444분대원 중 유일하게 평범 이하의 실력을 갖춘 분대원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엔크리드와 싸워도 쥐어 터질 놈이었고.

“하암, 아침부터 왜요? 나 같은 고급 인력에게 이른 아침 기상은 고문이라고.”

입을 찢어지게 벌리며 크라이스가 말했다.

눈곱도 떼지 않았고 얼굴에 물기 하나 묻히지 않았지만, 꽤 봐 줄 만한 얼굴이다.

남색에 관심 있는 놈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그런 외모다.

“물건 몇 개 구해 줘.”

엔크리드의 말에 크라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 이럴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문이 들었다.

“연초 배웠어요? 아니면 술? 여자는 안 돼요. 아무리 나라도 이런 시기에는 못 데려온다고.”

크라이스는 구하지 못하는 게 없는 부대 내 암거래상이었다.

“내가 여자를 구할 것 같아?”

“아니요.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쓰로잉 나이프 다섯 자루, 기름 먹인 가죽하고 큰 바늘, 사슴 가죽 장갑, 마지막으로 흰말꽃 열 송이 정도랑 백반(白礬) 한 주먹.”

엔크리드는 가죽 부분을 말할 때 대강 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줬다.

성인 남성 몸통을 감쌀 정도의 크기였다.

“……당최 뭘 할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데요?”

“그래서 못 구해?”

크라이스는 잠시 엔크리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못 구하는 건 없죠. 대신 아무리 분대장이라고 공짜로는 안 돼요. 알죠?”

“얼만데?”

“은으로 열일곱 닢은 줘야겠어요.”

사기꾼이로군.

쓰로잉 나이프 다섯 자루는 대장간에서 은화 한두 닢이면 살 거다.

물론 철값이 치솟으면 세 닢이 넘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랬다.

하물며 크라이스가 구해 오는 건 순수하게 강철을 넣어서 만든 물건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쓸 만한 칼은 구해 올 테지.

질 좋은 가죽이야 부르는 게 값이라지만, 유명한 공방으로 들어가는 가죽을 가져오는 것도 아닐 테고.

여기서 유일하게 금액이 들어가는 건 바늘과 사슴 가죽 장갑인데.

이건 확실히 아무리 조금 줘도 은화 세 닢은 줘야 한다.

흰말꽃은 뭐, 마을로 가면 몇 푼이면 구하는 거고.

백반도 근처에 가죽 공방이 있으면 그리 큰돈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다.

엔크리드도 이런 쪽에 눈이 밝은 편이지만, 따지진 않았다.

일단 여기는 부대 안, 즉 크라이스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닌 열일곱 닢이란 애매한 가격 때문이다.

그게 아마도 크라이스가 정한 적정값일 테니.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침 먹고 나서 바로 받아 볼 수 있겠지?”

“그게 나보고 아침을 거르라는 의미인 건 알아요?”

“어차피 잘 챙겨 먹지도 않았잖아.”

“헹, 그건 그렇죠. 근데 음, 제가 알기로 분대장은 이게 넉넉하지 않을 거란 말이죠?”

크라이스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지금은 없지.”

봉급을 모을 때도 있지만, 최근에는 검을 새로 구한다고 다 썼다.

지금은 빈털터리가 맞았다.

전투가 끝나면 봉급이 나오겠지만, 그걸 지금 달라고 하면 탈영병 취급을 받을 것이다.

“씁, 이러면 곤란하다니까요.”

크라이스의 말에 엔크리드는 미소를 보였다.

믿는 구석이 단단히 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동화 다섯 닢만 빌려줘.”

크라이스는 보통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엔크리드라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분대장이니까.’

그동안 봐 온 엔크리드는 허튼 짓거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아닌가.

크라이스가 동화 다섯 닢을 꺼내 건넸다.

엔크리드는 짤랑거리는 동전을 손에서 굴리며 바로 옆 막사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른 아침부터 판을 벌인 놈들이 보였다.

마지막 불침번과 아침잠보다 도박을 좋아하는 놈 서넛이 모인 주사위 판이었다.

엔크리드를 보며 놀란 눈들이 곧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문을 표했다.

“뭐야? 444분대장 나으리 아닌가.”

“이른 아침부터 아주 열심이네.”

크라이스가 그걸 보더니, 감탄했다. 그는 도박을 싫어했다. 사기꾼에게 걸려서 된통 털리는 것도 싫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기껏 번 돈을 운에 맡겨 불리거나 잃는다는 것 자체도 싫어했다.

불리면 좋지만, 한 번 그 맛을 보면 도박에 빠져들 것이고.

잃으면 손에 든 돈주머니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 아닌가.

크라이스가 보기에 도박은 모자란 놈들이나 하는 놀이였다.

그런 자리에 엔크리드가 꼈다.

“나도 껴도 되나?”

“여길?”

옆 막사의 막번 불침번이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도박꾼 동료를 흘깃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어디나 호구는 환영받는 법이었다.

엔크리드가 들어가 쭈그려 앉으려니, 크라이스가 옷깃을 손으로 쥐었다.

“내 동화 다섯 닢을 여기에 버리려고요?”

눈곱은 꼈지만, 초롱초롱하고 큰 눈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여자 꽤 울렸겠어.’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크라이스의 손목을 잡아 밀었다.

“빌렸으면 이제 내 돈이지.”

그리 말하고 엔크리드는 결국 자리를 차지했다.

모인 도박꾼들이 궁둥이를 움직여 자리를 넓혔다.

“주사위 놀음은 할 줄 아시고?”

나무통에 돼지 뼈로 깎아 만든 주사위를 굴리던 병사가 물었다.

“같은 수가 나오면 두 배, 적거나 높은 수에 걸면 건 만큼 주고. 맞지?”

어깨너머로 스치듯 봤지만, 백스물다섯 번을 봤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주사위는 총 세 개.

합은 18이다.

고로 9보다 높거나 낮은 숫자를 부르면 된다.

가운데 앉은 놈이 딜러다.

이쪽이 주사위를 굴리고 나머지가 거는 쪽이었다.

“그럼 첫판 가 봅시다.”

아침 식사를 마련하기 전까지 잠깐 즐기는 판이다.

판돈은 크지 않았다.

최소 동화 다섯 닢, 최대 은화 두 닢.

엔크리드는 동화 다섯 닢을 걸었다.

“작은 수.”

“큰 수.”

“작은 수.”

“작은 수.”

“큰 수.”

“큰 수.”

“작은 수.”

근 십 분도 되지 않아, 엔크리드의 손에는 은화 두 닢이 쥐어졌다.

주사위 게임의 묘미는 속도다.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 팍팍팍 치고 나가는 재미에 하는 놀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처음 엔크리드는 재미 삼아 나오는 숫자를 외웠다.

과연 주사위는 매일 같은 수가 나올 것인가.

반복된 오늘이지만, 자신 주변에 일어난 일은 미묘하게 달라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알고 있었다.

주사위의 눈은 항상 같다.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흘린 게 아니라 키스라도 갈기고 갔나 본데.”

엔크리드의 손에 든 은화가 열 닢이 넘어가자 딜러를 맡은 병사가 말했다.

“사기 아니야?”

본래라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병사가 할 말을 딜러가 했다.

“사기는 무슨, 오늘 운이 좀 좋네. 여신이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 같거든.”

엔크리드는 의심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들도 따질 수 없었다.

주사위를 굴리는 건 딜러요.

짜고 친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했으니까.

하물며 중간부터는 은근히 엔크리드가 거는 쪽에 같이 걸어 이득을 보기도 했다.

“사기라니, 주사위 굴리는 건 네놈 손목이잖아.”

“염병할 주문이라도 부리는 건가 했지.”

“잘도 그러겠네.”

“다른 날에는 미친 듯이 따도 계속했지? 운 나쁘다고 멈추기 없기다.”

엔크리드 덕에 돈을 좀 만진 병사가 낄낄 웃었다.

딜러는 알았다며 몇 판 더 돌리다가 말했다.

“막판 하자고. 시간 없으니까.”

어느새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손에서 은화 열 닢을 굴렸다.

동화 다섯 닢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됐다.

전부 딜러를 차지한 병사의 돈이었다.

“재밌었어. 막판인데 열 닢 받아 줄래? 털고 그만 가고 싶은데.”

최대로 거는 액수는 본래 은화 다섯 닢이다.

그 말에 딜러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적중률을 보면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동수에 걸고 털고 갈게.”

엔크리드는 상대가 뭐라 답하기 전에 이어 말했다.

주사위 세 개가 같은 수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주사위를 굴리는 병사도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했다.

그것도 실제 판에서는 한 번도 못 봤다.

혼자 장난질이나 치다가 본 게 전부였다.

고로 엔크리드는 제 말마따나 장난이었고, 번 은화를 다 토해 놓고 간다는 거였다. 적어도 그의 귀에는 그리 들렸다.

쿡.

뒤에서 크라이스가 엔크리드의 등을 찔렀다.

크라이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미쳤어요?’

아니, 전혀.

엔크리드는 미치지 않았다.

“동수에 은화 열 닢.”

“……좋아.”

따그르르륵!

병사는 주사위를 돌렸고 바닥에 요란하게 내려놨다.

혹시나 살살 굴려서 생길 불상사를 대비해서다.

“보자고.”

기대감 섞인 미소를 보인 딜러 병사가 주사위 통을 열었다.

“……와, 시발.”

“행운의 여신이 깃들었네, 깃들었어.”

“니미, 이게 말이 돼?”

모인 모두가 놀랐다.

엔크리드만 빼고.

삼 세 개.

주사위는 동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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