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6화 (6/170)

6. 손아귀가 찢어졌어야 했다.

반복되는 오늘.

그 하루하루를 엔크리드는 전부 값지게 보냈다.

그 어느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난 범재.’

검술로 치자면 수재도 영재도 될 수 없다.

천재는 당연히 못 되고.

여덟 번째 실패 후,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포크질 한 번에 식사를 끝내려고 했어.’

천재는커녕 수재, 영재도 안 되는 주제에 그랬다.

엔크리드는 할 일을 나눴다

‘반의반 걸음씩 간다.’

지겨울 일은 없었다. 반복되는 오늘, 그와 동시에 늘어나는 기량.

그것은 마약이었다. 엔크리드는 이 상황이 더없이 즐거웠다.

‘좋은 점이 많아.’

무엇보다 좋은 점은 끊임없이 실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목숨을 대가로 겪는 농후한 경험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십분 활용했고,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는 하루를 알차게 쓰기도 했다.

야수의 심장을 단련하고.

검술을 새로이 익히고.

그와 함께 반복되는 시간은 그에게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외우게 하기도 했다.

아침 식사와 함께 일어나는 옆 막사의 도박판 같은 게 좋은 예였다.

“이런 씨발! 너 사기 쳤지?”

“사기라니, 이 새끼야. 운이 좋은 거지.”

정겨운 아침의 광경이다.

사기는 아니다. 몇 번을 봤기에 안다. 주사위는 항상 같은 수가 나오고, 엔크리드는 그걸 알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하루를 보낸다. 반복한다.

거듭되는 실전은 엔크리드의 개념을 넓혔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할 시간은 많았기에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벨을 구하려고 굳이 화살을 쳐 낼 필요는 없지.’

그건 일류 용병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엔크리드는 깨끗하게 포기했고, 그럼으로써 벨을 구할 수 있었다.

팍!

그저 더 튼튼한 방패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화살이 원형 방패에 꽂혔다. 아무리 솜씨 좋은 궁수라도 방패 뒤에 숨은 병사의 머리통을 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왔어?”

자빠진 벨이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언제까지 땅에서 뒹굴래? 냉큼 안 일어나?”

엔크리드는 흐르는 땀을 대충 손등으로 털어 낸 후, 발로 벨의 궁둥이를 걷어찼다.

궁둥이를 쓰다듬은 벨은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살린다고 내일 저 새끼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모른다. 그저 여기를 첫 번째 포인트로 삼았을 뿐이다.

전장을 헤집고 벨을 구하는 것, 그게 엔크리드가 정한 작은 목표였다.

그걸 해낸 건 스물다섯 번째의 오늘이었다.

“어이구. 수도원의 마더 납셨네. 시간 나면 나도 구해 주쇼. 다른 부대 놈팽이 구할 시간에.”

렘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 일상이었다.

벨을 구할 때마다 다른 레퍼토리로 미친 소리를 뱉어 내곤 했으니.

그럴 때마다 엔크리드도 받아쳐 주긴 했다.

마더는 수도원을 책임지는 수녀를 칭하는 말이었다.

“넌 파문이다. 생긴 게 더러워.”

수도원은 신자(信者)가 아니면 받질 않는다. 파문은 마더의 품을 떠나라는 말, 즉 수도원에서 내쫓는다는 소리다.

렘이랑 하기에는 꽤 고차원적인 농담이다.

“생긴 거로 차별하는 더러운 세상, 카악 퉤.”

렘은 언제나처럼 굴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매의 눈깔인지 뭔지 하는 놈을 잡으러 가는 것일 터,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 쉰 번쯤의 하루를 반복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찌르기 적병을 이기지 못했다.

운 좋게 공격을 여러 번 막은 적은 있었으나, 그 순간에 옆에서 튀어나와 해머를 휘두르는 놈한테 머리통이 터졌다.

“시간 끌 거 없잖아.”

엔크리드의 머리통을 깬 놈이 말했고.

엔크리드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바닥이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휘저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얼굴을 따라 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걸 느꼈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이 검을 놓친 채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고통스럽겠네, 자비다.”

곧바로 칼날이 목을 꿰뚫음에 통증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목에 칼날이 파고든다. 익숙해질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치달린다.

달군 쇠꼬챙이로 목을 헤집은 통증이 뇌를 헤집었다.

죽어가며 엔크리드는 눈을 깜빡였다. 눈에 들어간 핏물 때문에 세상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 빨갛게 물든 시야 너머, 투구 사이로 검을 든 적병의 빨간 눈이 보였다.

실제로 빨간색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그리 보였다.

적병의 눈에는 얄팍한 희열이 어려 있었다.

하도 죽다 보니, 별것이 다 보였다.

단련된 야수의 심장 덕분이리라.

‘변태 새끼구나.’

자비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살인에 희열을 느꼈기에 그리 죽인 거였다.

놈은 항상 목에 칼날을 쑤셔 넣었고 천천히 뺐다.

검을 통해 타인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발기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걸 깨달았음에도 엔크리드는 담담했다.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겼기에 절로 담대함이 자리 잡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 몰래 밀회라도 즐기는 거유?”

여든여섯 번째, 렘이 불쑥 말했다.

렘의 말에 엔크리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일까.

“뭐?”

“야수의 심장, 나한테 배운 거잖수. 근데 혼자서 이렇게 단련이 될 리가 없거든.”

도끼날이 눈알에서 고작 손가락 한 마디 거리에 멈춰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왔다면 풍압만으로 각막이 상했을 거리다.

그 덕분에 엔크리드의 시야에는 날이 잘 갈린 도끼날 너머로 렘의 얼굴이 반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이런 순간임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이 가져다준 힘이자.

고통이 찾아올 걸 알면서도 견디게 해 준 담대함이다.

엔크리드는 도끼날 너머로 의문을 표하는 렘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오늘을 반복함으로써 야수의 심장이 단련되었으니, 그걸 가르친 장본인으로서는 황당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평소에 렘이 워낙 앞뒤 안 가리는 타입의 부대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렘은 시답잖은 얘기는 많이 해도 뭘 따지는 부대원이 아니다.

그런데 야수의 심장만큼은 다른 얘기일 것이다.

그가 직접 가르친 것이므로.

엔크리드는 같잖은 핑계는 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내내 생각한 뒤, 다시 시작되는 오늘에서 수습하면 되니까.

툭, 렘이 도끼를 뒤로 당겼다. 엔크리드의 시야가 열렸다.

얼굴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렘은 묵직한 도끼를 제 손처럼 다뤘다.

도끼를 당긴 렘은 도낏자루 끝으로 제 머리를 긁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말이요, 혹시 나 말고 딴 놈한테 더 배웠나 해서.”

말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얼굴이다.

엔크리드는 사사사 분대장이고, 이 빌어먹을 분대는 그가 없으면 통 말을 듣지 않는 꼴통 모임이었다.

엔크리드는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배운 뒤로 이 분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

고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시간이 없었을 거다.

렘은 그런 엔크리드를 쭉 지켜봤고.

혹시 불침번이라도 서면서 몰래 배웠다면 모르겠지만.

그 또한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

“검 쓰는 건 당장 오늘 오후에 뒈져도 ‘아, 그렇구나’ 할 정도인데, 어째 심장 가죽만 두꺼워질 수가 있는 거요?”

말을 해도 새끼가.

오늘 오후에 뒈지긴 뒈진다. 렘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지만, 괜히 말에 뼈가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을 고비를 여든 번쯤 넘겼거든.”

대강 답하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더 배울 순 없을 거라고.

어떤 핑계도 지금 저 야만족 출신 사내의 의문을 완벽하게 해결할 순 없다.

‘오늘이 반복될 때마다 매일 너한테 배우고, 거기에 죽으면서 배우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말할 순 없잖아.’

하지만 대강 넘어갈 순 있을 것이다.

렘은 그리 깐깐한 사내가 아니니까.

과연 그랬다. 시간을 들일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가끔 행운의 여신은 자기도 모르게 동전을 흘린다고 하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우연이 겹쳐 살아난 병사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그게 이런 비기를 익힐 때도 통용이 되나?

안 되면 또 어떤가.

렘이 넘어갔으면 된 거다.

“덕분에 전보다는 재밌네. 실력이 좀 늘었수다.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요?”

“죽을 만큼 아픈 짓.”

엔크리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남자가 비밀이 좀 있어야지. 그래야 남자다운 거요. 내 좀 알지.”

렘은 이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처럼 제 할 말만 하고 도끼를 들었을 뿐이다.

“한 판 더?”

도끼를 든 렘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말없이 검을 들었다.

자빠지는 병사 벨을 살리는 게 첫 번째 목표라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찌르기 잘하는 변태 새끼를 죽이는 거였다.

그걸 위한 준비는 착실했다.

그리 맞이한 백열한 번째의 날, 렘과의 대련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팔을 당기며 근육을 부풀렸다.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렘의 발을 밟으려 했다.

렘은 눈치 빠르게 발을 쏙 뒤로 뺐고 그걸 본 엔크리드는 렘의 발 대신 땅을 밟은 왼발을 중심으로 허리를 틀며 전력으로 검을 내질렀다.

발은 속임수였다.

렘이 물러나는 걸 노린 한 수다.

근육에 힘을 줘 검을 내질렀다.

찰나의 순간, 엔크리드의 눈에 렘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지는 게 보였다.

어찌나 비현실적인 모습인지, 손에 든 도끼까지 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깡!

한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도끼날은 휘어지다 벼락처럼 위로 치솟았고.

그건 그대로 엔크리드가 쥔 검을 때렸다.

검이 위로 날았다.

엔크리드의 손에서 빠져나가 위로 솟은 검은 공중에서 휘릭 돌더니, 바닥에 딱- 하고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돌에 검면이 우연히 부딪쳐 난 소리였다.

검이 바닥을 구르는 게 눈에 보였다.

“좀 봅시다.”

대뜸 다가온 렘이 엔크리드의 손목을 쥐었다.

검을 놓치며 생긴 충격에 손이 떨렸다. 렘은 엔크리드의 손을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이게 피가 좀 나 줘야 하는데.”

“뭐?”

힘 조절 좀 할 것이지, 무식하게 도끼를 휘둘러놓고 한다는 말이 이게 뭔가.

“그 찌르기 괜찮았는데, 괜찮은데, 거, 좀 부족하단 말이지. 내가 이런 설명은 못 하는데, 방금은 손아귀가 찢어졌어야 한다는 거요. 검을 놓치는 게 아니라.”

“죽어도 검을 손에서 떼면 안 된다?”

엔크리드는 오른손을 잡힌 채로 말끝을 올렸다. 검술 선생에게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새는 건 힘겨운 일이다.

엔크리드는 하루의 시작을 조금씩 달리 하는 거로 그걸 기억했다.

어릴 때부터 기억력은 남다른 편이기도 했으니까.

이제까지는 그 기억력이 검술에 크게 도움이 안 됐다.

물론 이제는 도움이 된다.

특히 선생들에게 배운 걸 되새길 때.

지금 그 배움을 되새김질하며 말한 거고.

“그건 무슨 개소리유? 필요하면 검을 상대 낯짝에 던지기도 하는 거지. 이, 아우, 좋수다. 좀 쉽게 갑시다. 조금 전에 찌르기, 어디 노렸수?”

렘은 그 말에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 찌르기는 비장의 한 수였다.

적병에게서 백 번을 넘게 목을 찔리며 훔쳐 배운 기술이었으니까.

전체적인 자세부터, 발의 위치와 검을 쓸 때의 무게 중심 이동, 근육의 움직임, 발끝의 방향, 검을 쥔 손 모양까지.

모든 걸 훔쳤고 흉내 낸 거다.

“조금 전 검격, 그거 겉보기는 그럴싸한데, 그, 염병할. 설명하기 더럽게 어렵네. 자, 이거 보슈.”

렘이 도끼를 밑으로 늘어뜨리더니 흙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대강 사람 머리통만 한 원이었다.

“우리 목적지가 여기 어디쯤이라고 칩시다.”

말하며 렘은 원 위로 도끼를 돌리다가 쿡 하고 점을 찍었다.

“근데 사실은 여기로 갈 거요.”

엔크리드는 처음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검술 선생에게 배운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개똥 같은 설명임에도 혀 안에 감기는 절인 과일처럼 착 하고 알아들었다.

‘목표점.’

조금 전 자신이 내지른 찌르기에 깃든 건 무엇이었나?

잘한다고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나?

흉내 잘 냈으니, 자신도 재능이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있다고 인정받고 싶었던가?

요는 무엇인가.

검은 무엇을 위한 물건인가.

상대를 베고 찌르는 것, 살상 무기다.

그중 찌르기는 한 점을 노리고 쓰는 검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세검술에서 많이 쓰인다.

갑옷의 틈새를 찌르는 얇은 검날을 주 무기로 삼는 기사도 있다고 들었다.

“나 진짜 더는 잘 설명 못 하겠고. 내가 당연히 피하거나 막을 거로 생각하니까 검을 그리 쉽게 놓친 거요. 근데 조금 전 그 찌르기는 확실했어야 한다는 거지. 딱, 널 찌르겠다. 넌 못 피한다. 이걸 화끈하게 보여 줘야 했다고.”

말하고 나서도 렘은 자기가 제대로 설명했는지 되새기는 중이었다.

제 페이스대로 노는 놈인 터라 설명에는 젬병이었다.

다만, 상대가 얼추 알아들었다면 이 옆집 강아지가 짖는 것 같은 설명도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엔크리드에게는 훌륭한 설명이었다.

‘내 검에 확신이 없었기에.’

조금 전 찌르기는 삼류 용병의 찌르기였다.

백열한 번째의 날에 엔크리드는 깨달았고.

백스물세 번째의 날까지, 전력의 찌르기를 행했으며.

백스물네 번째의 날에 렘의 벼락같은 도끼질에 손아귀가 찢어졌다.

찢어진 정도가 아니라 터져 나갔다.

손아귀를 타고 피가 질질 흘렀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고 웃었다.

바라는 걸 이뤘으므로.

“이제 완전히 미친 거요? 전장에서 미친 아군만큼 위험한 놈은 없다는 거 아슈? 아니, 왜 계속 처웃냐고.”

그걸 본 렘은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나, 엔크리드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시발, 그만 웃으라고. 미친 새끼 같다니까?”

그걸 본 렘이 말했다.

백스물네 번째의 ‘오늘’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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