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24화 (24/170)

24. 셋

“바람이 지금 이쪽으로 불죠? 근데 이쪽 짧은 풀들은 역방향으로 누웠고 동그란 모양인 게 보이죠?”

엔리가 긴 풀의 밑부분을 발로 밟는다. 그렇게 긴 풀을 옆으로 치워 그보다 짧은 풀이 가득한 땅을 보여 줬다.

그 풀밭에 난 흔적을 보고는 엔리가 술술 입을 열었다.

“그러네.”

엔크리드는 답하며 유심히 바닥을 살폈다.

말하니 알겠다만은, 혼자서 찾으라고 하면 글쎄,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키다리 풀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녹색의 향연이다.

대륙을 여행하던 음유시인 하나가 한여름에 이 부근 평원을 보며 여기에 그린 펄이란 이름을 붙였다.

녹색의 진주라는 의미였다.

그중 긴 풀밭은 마치 수위가 깊은 심해와 같이 더 진하게 보였다고 하다.

그럴 만도 하지.

이 빌어먹을 풀밭은 인간이 들어와 헤집고 다니기에는 그리 기분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방심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 볼이고 눈이고 가리지 않으며 탁탁 부딪히고.

사방에서 풀벌레가 몸에 붙는다.

귀뚜라미나 여치 따위가 툭툭 튀어나와 뛰어다니고, 간간이 물이 고인 곳에선 개구리도 보였다.

개구리를 보고 있자니, 자신을 걷어찬 프록이 떠올랐다.

물론 프록은 자신들이 개구리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라 말한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그들 앞에서 개구리를 죽여도 그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심장을 터트려 버리겠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옆구리 한 방.’

반사적으로 막았지만, 딱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프록의 강함과 견주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그 프록과도 싸울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어쩔 수 없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기에.

하지만 또한 의심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럴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 말지.

엔크리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 즉시 털어 냈다.

그따위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므로.

그리 생각하며 엔리의 설명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초원 사냥꾼 출신이라는 이 병사는 다분히 긍정적이었다.

분대장이 어떤 병신 같은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엔크리드를 향해서 되레 참으라고 한다.

물론 엔크리드는 애초에 참을 필요도 없었다.

그도 그러려니 하는 건 익숙하니까.

엔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냥꾼의 장기를 발휘해 이런저런 걸 계속 살폈다.

듣는 재미가 있는 얘기였다.

“짐승의 배설물이 별로 없군요. 왜지?”

엔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문제가 돼?”

엔크리드는 자신의 머리 위로 자꾸 수그러지는 길고 두꺼운 풀잎을 손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이 풀밭은 사람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잡초밭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쪽 풀을 주식으로 삼는 놈들에게는 천혜의 보고 같은 곳이니 보통 짐승의 흔적이 많은 남는 편인데, 지금은 드물군요.”

짐승이 적다. 왜? 흘려듣던 엔크리드는 볼에 붙은 풀벌레를 손가락으로 잡아뗐다.

거머리도 아닌 게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에서 삐죽한 뭔가를 내미는 게 보였다.

벌레와 주변의 시야를 가린 풀을 보자니, 날을 바짝 세운 낫을 들고 와서 싹둑싹둑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왈칵 일어났다.

“쉿, 말이 너무 많다. 너.”

정찰 분대장이 뒤를 보며 말했다.

그는 눈앞을 스쳐 가는 귀뚜라미 따위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평은 없다.

‘이건 또 의외네.’

자기가 오자고 해 놓고 이게 뭐냐며 잔뜩 짜증이나 낼 줄 알았더니.

녹색의 향연이라 하지만, 잘 살펴보면 곳곳에 옅은 갈색으로 색이 바랜 풀도 많았다.

곧 가을이 다가온다는 징조다.

겨울이 되면 이 풍성한 풀밭도 잠들 듯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그리고 다시 날이 따뜻해지면 죽은 풀을 양분 삼아 다시 키다리 풀이 자라고.

매해,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죽고, 다시 자라고.’

자연의 섭리일까.

그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뭘까.

오늘의 반복.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머릿속을 떠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가 반복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순 없으니.

다만, 엔크리드는 노선을 확실히 정했을 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한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마찬가지.

축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주라고 해도 변하는 게 없을 뿐.

꽤 오래 풀밭을 헤치고 걷는 중에 누가 엔크리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엔리가 아니었다.

분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병사다.

“우리 분대장이 너무 철없어 보이겠지만, 이해 좀 해 줘. 사정이 있어서 그래. 공을 세워야 하는데 정찰대 같은 곳에만 보내고 이러니까, 욕구 불만이라고.”

갑자기 이건 또 뭔가.

“그쪽도 분대장이잖아. 그 똥구멍 얘기는 잊어 주면 고맙고.”

생뚱맞은 타이밍이군.

그리 생각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사과를 대강 받아들였다.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얼굴을 붉혀서 좋을 건 뭔가.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엔크리드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쪽에 심력을 소모하느니, 훈련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말겠다는 거다.

“그러지.”

“아량이 넓어. 분대장.”

그렇게 말한 병사가 미소를 보였다. 색이 바랜 금발에 싸움 잘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왕눈이랑은 반대되는 타입이란 거고.

더 쉽게 말하면 못생겼다는 거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리고.

버릇처럼 청각에 집중한다.

딱 그 타이밍에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꽂혔다.

부스스. 하악! 바사삭.

작센에게 배운 뒤 꾸준히 훈련한 것이 빛을 발했다.

‘소리가 다른데?’

정찰대 열 명은 어깨가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서로의 등이 보일 정도로는 붙어 걸었다.

이들이 키다리 풀을 헤치는 소리는 이제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들린 소리는 달랐다.

더 멀리서 들린 소리다.

분명히 사람이 풀을 헤집는 소리였고.

그 사이에 하악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풀을 밟는 소리가 섞였다.

사람이다.

그게 아군일 리는 없었다.

키다리 풀밭 자체는 큰 효용 가치가 없는 땅이다.

이 빌어먹을 풀밭 너머에 적지가 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다만, 키다리 풀밭을 나오면 곧바로 평원인지라, 몸을 숨길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걸 통과해 움직이는 건 그리 영리한 행동이 아니다.

그럼 상대 쪽에서도 이쪽만큼이나 멍청한 분대장이 있어서 정찰대를 보냈다는 건가?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

엔크리드가 말했다. 그러자 앞에 선 싸움 잘하게 생긴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뭐?”

당최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우측에서 엔리가 거들었다.

“뭐라고?”

엔크리드가 아예 발을 멈추자, 앞에 섰던 정찰 분대장이 뒤로 물러서며 다가와 물었다.

“적이다.”

듣자마자 말했지만, 이걸 인지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핑! 퍽!

적이라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적의 공격이 먼저 닿았다.

“으악!”

분대장이 물러서며 선두가 된 병사의 머리통에 짧은 화살이 꽂혔다.

소리로 쏘아진 방향을 잡고.

눈은 화살의 형태를 훑었다.

‘볼트.’

짧은 화살, 근거리에 쓰기 좋은 놈이다. 장궁에 걸어 쏘는 용도가 아니니.

‘쇠뇌.’

결론은 금방이다. 엔크리드는 선두에 선 병사의 머리통에 구멍이 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엎드려!”

동시에 분대장의 멱살을 잡아 밑으로 당겼다.

“억!”

분대장이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그대로 바닥에 바짝 엎드리자, 곧 억, 컥 하는 단말마 따위가 들렸다.

‘전면과 우측, 좌측.’

자세를 낮춰 1차 사격을 피해 봤자,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럼 해야 할 건 무엇인가.

뛰쳐나가야 한다. 방향을 잡고 뚫어야 한다. 그럼 멈춰선 안 된다.

엔크리드는 바닥에 배가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춘 채로 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사사삭!

수풀이 옆으로 비켜나며 그의 움직임을 적에게 알린다.

당연하게도 쇠뇌용 화살이 무수히 날아들었다.

“바보 같은!”

엔리가 놀라 외쳤다. 자살 행위로 보였다.

파바박.

반쯤은 운이겠지만, 엔크리드는 볼트를 대부분 피했다.

한 발이 왼쪽 어깨에 꽂혔지만, 그래도 적이 시야에 잡혔다.

적은 키다리 풀을 적당히 잘라 움직일 공간을 확보했다.

수풀 사이에 녹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쇠뇌를 든 놈이 보였다.

보자마자 검을 뽑는다.

‘언제, 어느 자세에서든.’

최선의 공격을 펼치는 것.

배운 바대로 행동했다.

땅을 박차고 거리를 좁힌다. 적이 쇠뇌를 재장전하려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검이 닿는 거리를 확보하자마자, 엔크리드는 왼발로 땅을 찍으며 한 손 찌르기를 날렸다.

그의 손에 들린 아밍 소드의 끝이 허공을 뚫고 날아가, 적의 목덜미를 훑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얇은 목덜미 가죽을 갈랐다.

칼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팍 하고 뿜어지더니, 곧 진한 선혈을 꿀렁꿀렁 쏟아 내기 시작했다.

목이 베인 병사가 제 목을 그러쥐고 기우뚱 넘어졌다.

엔크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왼쪽으로 튀어 나가듯 움직였다.

볼트를 쏠 거리가 아니다. 창날이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왔다.

엔크리드는 달려드는 척하다가 제자리에 멈춰, 적의 창이 허공을 찌르게 놔뒀다.

보병용 단창과 그걸 들은 병사의 눈이 보였다.

기묘한 흥분과 놀람이 섞인 눈.

전장에 선 병사의 눈이다.

쇠뇌, 단창, 녹색으로 물들인 옷.

매복을 작정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눈에 들어온 정보를 한순간 머릿속에 쑤셔 박고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횡으로 휘둘렀다.

단창을 든 적병이 뒤로 물러나, 검이 그린 궤적을 피하고 회수한 단창을 다시 쭉 내질렀다.

엔크리드는 쭉 찔러오는 단창을 보며 피하는 대신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했다.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돌며 다시 검을 찌른다.

피하고 찌르는 행위, 공수를 하나로 합친 일격이었다.

검이 적의 몸통을 찔렀다. 푹 하고 손아귀에서 묵직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상대의 갑옷은 전부 두툼한 천 갑옷이었다.

적당한 힘과 재주, 날카로운 칼날이 있다면 뚫기 어렵지 않았다.

“끄으르르.”

복부에 검이 꽂힌 적병이 단창을 떨어뜨리며 엔크리드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놈의 손아귀가 베이며 피가 흘렀다.

‘바로 못 빼.’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철칙이다.

상대에게 잡힌 검을 놓고 바닥에 떨어진 단창을 줍는다.

쌩.

그사이 다른 적병이 쇠뇌를 몽둥이 삼아 휘둘렀다.

수그린 자세 덕에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쇠뇌가 스쳤다.

투구 대신 쓰고 온 아밍 캡이 쇠뇌 끄트머리에 걸려 훌렁 벗겨졌다.

차가운 공기가 닿자, 두피가 시원해졌다.

엔크리드는 주운 단창을 보이는 발등에 꽂았다. 쇠뇌를 휘두른 적군의 발등에 멋진 장식을 만들어 주는 행위였다.

퍽!

“끄아아아!”

통증은 비명을 부른다. 비명은 주목을 부르고.

그러므로 상대 적병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하는 방편으로의 비명은 적절했다.

그대로 달려들어 단창이 박히지 않은 반대쪽 무릎을 잡아 역방향으로 꺾었다.

우드득!

“끄어어어!”

종교쟁이 분대원에게 배운 기술이다.

엄청나게 어설펐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넘어진 놈의 허리춤에 있던 숏소드를 뽑았다.

그러곤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잡으며 발등에 단창이 꽂힌 놈의 목에 숏소드를 바짝 들이댔다.

“끄그!”

놈이 반항하기도 전에 칼날을 부드럽게 밀어 넣고 옆으로 당겼다.

스커억.

손아귀에 저항력이 느껴지며 살가죽을 썩둑 벤다.

끄르륵하는 피거품이 끓는 소리가 났다.

목이 베인 병사가 손으로 목을 움켜잡더니 풀썩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엔크리드는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병사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수그려 적병을 방패로 삼은 뒤 숨을 골랐다.

‘일단 한쪽.’

삼면 포위 상태였다.

그중에 한쪽은 열어 둔 셈이다.

이제 수틀리면 도망갈 틈이 생겼다.

“……최하급 병사라면서요?”

그러자 어느새 뒤에 붙은 엔리가 말했다.

“맞는데.”

숨을 고르며 답하자, 엔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솜씨가 최하급 병사라고요?”

“젠장, 내가 똥구멍이잖아.”

그 와중에 정찰 분대장이 머저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건 진짜 무슨 생각인지.

“뒤로, 나서지 말고.”

싸움 잘하게 생긴 병사가 그런 분대장 앞을 막았다.

살아남은 건 이렇게 넷이었다.

남은 정찰대는 다 죽었다.

당장 눈앞에 눈을 부라리는 적병이 대략 스물이 넘는 듯싶었다.

“……뭔, 씹.”

아즈펜의 적병이 입을 연다. 그가 놀란 눈으로 엔크리드를 한 번 보곤 죽은 병사 무리를 한 번 본다.

죽은 병사가 셋이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놀라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고 그대로 행할 뿐.

쇠뇌는 여전히 위협적이며.

적군의 수는 많고.

자신은 검을 잃었다.

“튀어!”

발렌 식 용병검, 줄행랑을 쓸 때였다.

엔크리드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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