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25화 (25/170)

25. 키다리 풀밭

“이대로 풀밭을 뚫고 나가서 정찰대 흔적을 쫓는 거다. 어때?”

다시 보니, 이 말을 할 때의 정찰 분대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대감과 자신감, 적당한 긴장이 뒤섞인 모습이다.

새로운 오늘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줄행랑은 실패였다.

엔크리드는 눈을 뜬 뒤, 하루를 곱씹는 것으로 새로운 오늘을 맞이했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동쪽으로 간 게 실수였을지도.

‘아니, 거기까진 괜찮았던 것 같은데.’

복기는 엔크리드의 버릇이다.

동쪽으로 튀다가 쇠뇌 부대를 다시 만나서 몸에 볼트를 다발로 꽂고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틀거리다 머리통에 볼트가 꽂혀 죽었다.

그때의 고통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하지만 이걸 되뇌지 않으면 계속 죽어야 한다. 그건 더 싫다.

복기, 계속 되짚어 문제를 찾는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반복했다.

‘들을 수 있어서 먼저 기회를 잡았어.’

이질적인 소리를 잡아챘다.

작센에게 배운 게 도움이 됐다.

이후 야수의 심장이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게 했다.

한쪽을 택해서 뚫어야 했다.

실패했지만.

‘다시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격하는 부대에게 잡힌 게 아니라 운이 나쁘게 대기하던 부대와 만난 거니까.

‘길을 다시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엔리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너무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슬쩍 둘러만 보고 가면 그만이니까, 참아요.”

뭘 자꾸 참으라는 건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말하며 엔리가 눈으로 슬쩍 앞을 가리켰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분대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인상 험한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부라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비를 걸기 위해 보는 건 아닐 것이다.

‘분대장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사리 분별이 있는 쪽이지.’

아마도 지금쯤 기회를 봐서 자신을 잘 타일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말을 걸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인상 험한 병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엔크리드는 알았다며 엔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었다.

풀을 손으로 치우며 안으로 들어섰다.

곧 익숙한 광경이 눈 앞을 가린다. 녹색의 키다리 풀이 시야를 극단적으로 제한했다.

확실히 이 안쪽에서 매복한 상대를 맞이하는 건 안 좋다. 목숨 걸고 굳이 이 안에 들어가는 건 보통이라면 할 짓이 아니다.

‘애초에 여길 안 들어가면?’

그건 안 된다.

키다리 풀밭을 정찰하는 게 이 부대가 이곳에 온 이유요, 목적이다.

그걸 무시하고 돌아가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들어가기도 전에 적의 매복을 눈치챘다고?

어떻게 정찰 방향을 돌린다고 쳐도.

여기에 있는 열 명이 잘도 그 말에 입을 맞춰 주겠다.

피할 수 없다. 보통 새로 맞이한 ‘오늘’은 언제나 이렇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곤란하다고 묻는다면야.

‘나쁘지 않아.’

제대로 싸운 건 딱 한 번이었지만.

엔리가 자신을 보며 그게 무슨 최하급 병사냐고 물었고.

분대장은 자기 자신을 비하했다.

‘실전.’

단 한 번의 전투였지만, 그 한 번의 경험이 값졌다.

야수의 심장이 당황할 겨를도 없게 해줬다.

틈을 쪼개며 검을 휘둘렀고 찔렀다.

상대의 행동 패턴을 예측해 움직였다.

그 사이사이 배운 걸 써먹었다.

두근.

심장이 뛴다. 짜릿한 무언가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좋은 기회다.’

정찰 임무를 떠나기 전, 렘과 라그나가 번갈아 가며 자신의 검술을 봐 줬다.

그들에게 배운 것.

홀로 깨달은 것.

전부 소화하기 딱 좋다.

“여기 보이십니까? 풀이 누운 곳?”

“짐승 발자국이네.”

엔크리드는 배운 걸 써먹을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아는 척을 했다.

엔리가 엔크리드를 보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

“사냥 경험이 있으시군요?”

없다. 엔리에게 배운 거였다.

“그냥 오가며 들은 게 있어서.”

엔리에게 들은 거였다.

정직히 답한 뒤, 시답잖은 얘기를 이어 갔다.

그러며 걸음을 조금 재게 놀려 앞으로 붙었다.

분대장의 바로 뒤다.

엔크리드는 지금 정찰대의 진형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분대장이 앞, 우측으로 둘, 좌측으로 둘.

분대장의 바로 뒤는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맡는다.

나머지 인원은 후위처럼 뒤따랐다.

‘그냥 머저리는 아니란 말이지.’

진형이 그럴듯했다.

만약 적이 나온다면 대응하기 좋은 형태.

쇠뇌를 무장한 부대를 만나면 진형 따위는 별 소용 없겠지만.

죽었던 오늘에서 정찰 분대장은 더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엔크리드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거기에 칼솜씨도 꽤 괜찮았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아주 능숙한 병사였고.

‘최소 중급 이상.’

나우릴리아 병사 수준으로 보자면 그렇다.

분대장도 인상 험악한 병사도.

둘 다 실력이 괜찮다.

엔리도 나쁘지 않았다. 숏보우 하나를 왼손에 든 채로 걷는 그는 속사로 화살을 쏠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볼트 수십 발을 피하며 살아남을 수준은 아니지만.

‘쇠뇌 부대는 무조건 피한다.’

엔크리드는 일부러 분대장 뒤로 바짝 붙어 걸었다.

분대장 눈치를 보는지 인상 험한 병사는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부스스. 하악! 바사삭.

그리고 다시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숙여.”

일단 분대장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처음에는 넷만 살아서 도망갔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살릴 것이다.

“으억!”

분대장이 뒤로 넘어지며 비명 비슷한 걸 내질렀다.

“적이다!”

적군이 외쳤다. 곧 볼트가 날아들었다.

그사이 엔크리드는 아군 병사 둘의 오금을 순서대로 걷어찼다.

쓰러진 병사의 머리 위로 볼트가 휙휙 하고 날아갔다.

엔크리드도 발을 앞뒤로 벌리며 몸을 바짝 낮췄다.

눈앞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놀랐는지 잽싸게 뛰어서 달아났다.

엔크리드는 앞뒤로 다리를 찢었다가 허벅지 근육과 척주기립근의 탄력으로 일어나며 쓰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팽- 하고 나이프가 공기를 찢었다.

나이프는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지만, 적군이 잠깐 몸을 움츠리게는 했다.

짧은 틈, 그거면 충분했다.

빡.

팔꿈치를 뒤로 뻗으며 살짝 분대장의 이마를 때리고.

“정신 차리고.”

말하며 앞으로 튀어 나간다.

파바박.

흙과 풀을 짓밟으며 검을 뽑는다. 뽑으며 자세를 잡고 한 손 찌르기다.

‘전심전력.’

반드시 꿰뚫겠다는 마음은 담되, 찌르고 나서 근육에 힘이 빠지면 안 된다. 전력으로 찌르면서 힘은 어떻게 남기는데?

“그건 감이 있어야 해. 감은 어떻게 얻냐고? 계속해. 하다 보면 돼.”

대련 중 렘이 해 준 말이다.

엔크리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소화하는 중이었다.

퍽!

검 끝이 상대의 가슴 어림을 뚫었다.

비틀어 뽑는다.

근육과 신경, 심장을 쪼갠 칼날이 뽑혔다.

그대로 횡으로 휘두르는 척하다가 거리를 좁히고 발을 휘둘러 다른 적병의 정강이를 끊어 찼다.

막 쇠뇌를 들고 조준하려던 적병이다.

“꺽!”

맞은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리고, 엔크리드는 폼멜로 수그린 병사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콰직!

그 동작은 어설픈 가죽 투구 위를 둔기로 때린 것과 같았다.

단단히 생나무를 쪼갠 감각이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그대로 두 놈째를 쓰러뜨린 후다. 몸에 일반적인 것보다 배는 두꺼운 천 갑옷을 두르고 큼직한 원형 방패를 든 놈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핑핑핑!

엔리가 속사로 화살 세 발을 쐈다.

하지만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꽂힌 자리에 피가 배어 나오지 않는다. 어설프게 꽂힌 화살 한 발은 아래위로 흔들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너무 급히 쏘는 바람에 활의 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거다.

엔크리드가 급히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쥐고는 그대로 휘둘렀다.

까-앙!

칼날과 방패의 모서리가 만나며 불똥이 튀었다.

방패 틀을 찌그러뜨리긴 했지만, 엔크리드도 손이 저렸다.

“크아아!”

적군이 고함을 내지르며 엔크리드의 머리 위를 덮쳤다.

두근.

잠깐의 방심이 곧 죽음이 되는 곳.

당황하면 죽는다.

그게 바로 전장이다.

야수의 심장이 빛을 발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담담하게 만들어 주는 대담함.

두꺼운 근육으로 이뤄진 심장이 제 역할을 해내기에.

엔크리드는 방패를 내리찍는 궤적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잘 보고, 잘 피해.”

렘의 가르침이다.

보고 피한다.

“검에 쓸데없는 부분은 없습니다. 손잡이부터 검 끝까지, 다 쓰는 겁니다.”

이건 라그나의 가르침.

엔크리드는 잘 보고 있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뒤로 물러났다.

붕 하고 방패가 코앞을 스치며 풍압으로 머리칼이 휘날렸다.

“후욱, 후욱!”

방패를 내리찍은 놈이 근육에 힘을 줘 방패를 다시 치켜들었다.

거친 숨결이 방패 너머에서 들렸다.

숨소리와 어깨의 움직임을 통해 상대가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방패 위로 빼꼼히 내놓은 눈알을 굴리며 엔크리드를 주시한다.

방패를 때려서는 싸움이 길어질 것이다.

엔크리드는 검을 던져 손잡이가 위로 검날이 손으로 오게 바꿔 쥐었다.

바꿔 쥔 채, 허리와 무릎의 회전을 통해 전력으로 휘둘렀다.

방패를 든 적이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이뤄진 동작이었다.

훙, 퍽!

곧 삐죽한 검의 날 밑, 콧등이 끄트머리가 상대의 눈에 박혔다.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피와 함께 맑은 물이 줄줄 흘렀다.

“끄아아악!”

애꾸가 된 병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엔크리드는 검날을 쥔 덕에 피가 흐르는 손으로 숏소드를 뽑았다.

그대로 애꾸가 되어 발광하는 상대의 목에 칼날을 꽂았다가 뽑는다.

팍!

동작에 맞춰 피가 솟았다. 꾸르륵, 목에서 피거품이 일며 방패병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여기로!”

무지막지한 장면의 연속이었기에.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몇 명을 해치운 거지?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찌른 검을 회수했다.

검 손잡이까지 피가 질척하게 묻었다.

그걸 대강 닦아 내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그를 따라온 숫자는 여섯이었다.

둘을 더 살린 거다.

“……너 뭐야.”

달리는 와중에 옆에 찰싹 달라붙은 정찰 분대장이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이런 말 할 시간에 달리는 게 나을 텐데.

엔크리드는 다시 동쪽으로 뛰었다.

이후에도 보이는 족족 적군을 때려눕혔고 죽였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깊게 들어왔으나.

‘방향을 잘못 잡았어.’

동쪽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창병 오십을 만났다.

단련된 창병 오십이면 소대 규모다.

고작 셋이서 상대할 수 없었다.

오면서 나머지를 잃고 정찰 분대장과 인상 험한 병사만 남았다.

“재수가 없었네.”

험악한 외모의 병사가 말하고.

“젠장.”

정찰 분대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울상을 지었다.

엔크리드는.

“다섯은 데려간다.”

각오를 다지고 덤볐다.

상대 쪽에서 보자면 가히 미친놈이었으리라.

오십의 창병을 보고 덤벼?

창병 무리가 보기에 이건 완벽하게 미친놈이었다.

기사 또는 기사단에 속한 이라면 모를까.

이건 무슨 짓인가.

검을 쓰는 걸 보면 싸울 줄 아는 건 알겠지만,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잘해야 숙련된 병사 소리나 들을까.

제 목숨을 안 돌보고 덤비는 모습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렇게 달려든 엔크리드는 창병 셋을 죽였다.

그리고 배에 창에 꿰어 죽었다.

물론 끔찍하게 아팠다.

창병 무리 뒤로 기다란 깃발이 누워 있는 게 보였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이쪽으로 가자. 풀밭 너머 적군을 죽이면 공적이잖아? 아니, 생포하는 게 나으려나?”

분대장의 말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다시금 하루를 곱씹었다.

복기다.

‘동쪽에서는 활로가 안 보여.’

그럼 이번에는 북쪽이다.

실전은 좋은 자양분이었다.

이건 그토록 사이 안 좋은 렘과 라그나도 같은 의견이다.

하물며 그 작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오감을 단련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목숨 걸고 싸우는 거라고.

죽는 그 순간에 인간의 집중력은 한계를 깨 버린다고 했다.

그 말을 엔크리드는 몸소 증명하는 중이었다.

‘늘었다.’

오만이 아니고 자만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실력이 꽤 늘었다.

그리고 지금도 느는 중이었다.

반복된 오늘에서 엔크리드는 북쪽에서 아홉 번 더 죽었고.

동쪽에서 여섯 번 더 죽었으며.

서쪽에서는 열두 번 더 죽었다.

전투가 이어진다.

단숨에 실력이 늘진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나갈 순 있으니.

엔크리드는 다시금 환희를 느꼈다.

지금도 성장하고 있으니까.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이 있으니까.

“으아아아!”

퍽!

반복된 하루 중 꽤 용맹한 병사의 창날이 볼을 스친다.

이전의 엔크리드라면 피하지 못했을 일격이었다.

가히 찌르기 병사의 그것과 닮은 일격이었으나, 피했다.

피한 것에 그치지도 않았다.

수 없는 실전이 엔크리드에게 좋은 버릇을 심어 줬으니.

그는 피하며, 검을 위에서 밑으로 내려쳤다.

수직으로 내리치는 검이다.

투-웅.

그리고 그 순간, 엔크리드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검을 내리쳤는데, 손에 남은 감각이 없다.

아니, 너무 미약하다.

분명 상대의 팔을 베고 내려갔는데, 마치 썩은 나뭇가지를 벤 것 같았다.

그만큼 손쉬웠다.

반면에 상대의 팔은 깨끗하게 잘려 허공에 날았다.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더없이 깨끗한 일격.

흔히 말하는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수없이 해내는 그 일격.

“아.”

한순간 집중이 깨질 정도로 엔크리드는 놀랐다.

전투 중에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손에 쥔 검의 무게가 충실히 느껴진다.

손에 남은 짜릿한 감각이 희열을 느끼게 했다.

“하, 진짜.”

너무 신난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웃는다. 더 없이 차오른 만족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새끼!”

적군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그야말로 미친 새끼일 따름이었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는 수없이 또 죽었다.

그리고 수없이 또 오늘을 반복했다.

그 반복된 오늘에서 대련으로 배운 게 몸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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