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36화 (36/170)

36. 몰살의 안개

라그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생각하는 걸 때려치웠다.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눈으로 보기에 엔크리드도 정상인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부터?”

엔크리드가 묻는다.

“그러죠.”

라그나가 답하고.

둘은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검을 쥐는 것부터 새로이 시작했다.

아니, 맞는 무기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힘이 좋은데 굳이 가벼운 무기를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무거운 롱소드로 무장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랑 바꿉시다.”

라그나가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을 건네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파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를 이리 쉽게 넘기나?

“저도 아직 손에 익을 때까지 쓴 게 아니니까.”

라그나가 이어 말했다.

받아 보니 그리 좋은 검은 아니었다.

자신이 쓰던 게 더 나아 보이기도 했으나, 수긍했다.

지금 가르쳐 주는 사람은 라그나다.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다.”

아밍소드에서 롱소드로.

손잡이가 더 길어 양손으로 잡고도 휘두를 수 있는 검이었다.

검날도 한 뼘은 더 길었고, 무게도 더 나갔다.

그렇다고 엉망인 검은 아니었다.

좋은 철로 만든 건 아니지만, 무게 중심을 비롯해 검의 마감은 괜찮아 보였으니.

“오른손을 앞에 왼손을 뒤에.”

검을 바꾼 뒤, 쥐는 법부터 새로이.

엔크리드는 그 시간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그건 라그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대장의 존재만으로도 자극이었다. 직접 가르치니, 그도 의욕이 치솟아 그 시간에 심취했다.

둘은 점심이 지날 때까지 그리 시간을 보냈다.

끼니를 거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챌 정도로 집중했다.

“끼니도 거르는 소꿉장난이라니, 뭐하슈?”

렘이 찾아오고 나서야 엔크리드는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너 이 새끼 우리 분대장 괴롭혔냐?”

“꺼져라. 야만인.”

“너나 꺼져라. 게으름뱅이 새끼야.”

둘이 투덕거렸다.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검을 늘어뜨렸다.

꽤 지쳤다.

새로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게 곧바로 되는 건 아니었다.

‘부족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본래라면 센스 있게 기술만 빼먹을 생각이었다.

오늘을 반복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실력이 늘 거라 예상했는데.

‘정반대로군.’

기본기가 부족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은 것 또 하나.

검을 잘 다루는 이가 봐주며 기본기를 쌓는 건 홀로 하는 것과는 궤가 달랐다.

“발끝 방향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습니까?”

“쥐는 힘이 빠졌습니다.”

“찌르려고 한 겁니까? 베려고 한 겁니까?”

“지금 하고 싶은 게 뭡니까?”

“안 되겠군요. 제대로 걷는 것부터 배워야겠습니다.”

잔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그 하나하나가 자산이 된다.

렘과 투덕거리던 라그나가 대뜸 엔크리드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검 실력을 늘려서 으스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라그나는 어릴 때 자신이 검을 잡은 이유를 떠올리며 물었다.

드러내고 돋보이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거짓말일 터.

엔크리드에게도 당연히 공명심과 호승심, 욕망이 있었다.

그의 망상 중에는 레이디 앞을 지키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받는 것도 있었으니.

어찌 그러지 않을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런 거 많아. 엄청나게 으스대고 싶다.”

엔크리드가 답했다. 누군가의 환호를 받고 음유시인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당연히 그런 욕구도 있었다.

라그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대답이 된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하여간 소집이유. 적군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수다.”

다시 전투였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는 그런 엔크리드를 보며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오늘을 넘길 수 있으려나?’

만약 엔크리드가 이대로 전장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

익숙하지 않은 검, 어설프고 어색한 수준의 검.

그가 오늘 쌓은 검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죽으리라 예상했다.

‘재능이 없다.’

기본기를 다시 쌓는 내내, 엔크리드의 실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라그나는 잠깐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죽음으로 내몰았나?’

후회다. 자신의 입이 문제였다.

자기가 나서서 제대로 된 일이 뭐가 있었다고.

오늘 또 나섰나.

라그나는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근처에 있자.’

되도록 오늘 하루는 지켜 주고 싶었다.

“적군이다!”

전투의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임시로 구축한 진지를 정리하기도 전, 키다리 풀밭 너머와 전면에 적의 보병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묘할 정도로 빠른 행군이었다.

각 부대가 모여 적군을 보는데, 적군의 부대가 모인 방식이 특이했다.

점점이 덩어리가 떨어졌으며 각 부대가 긴 깃대를 들고 있었다.

빠라라라락!

그들이 든 깃대 위로 깃발이 나부꼈다.

갑자기 적지에서 이쪽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눈꺼풀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채로 깃대와 적병을 본 순간, 엔크리드는 이 전장이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다.

수년간 그를 살려 준 생존 본능이 주는 직감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맞다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뭐야?”

정렬한 보병대 선두, 소대장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벤젠스 소대장.

의무 막사에서 헤어질 때 퍽 어색한 표정으로 보병대 식 인사를 나눴던 그 소대장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던 소대장과 엔크리드 사이로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 * *

“당했습니다!”

부관이 말하기도 전에 요정 중대장은 상황을 파악했다.

요정의 예민한 감각은 전장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마법? 주술?’

전장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자연의 벗, 숲의 친구라는 요정의 감각이 이질감을 알렸다.

인위적인 안개가 짙게 깔리더니 곧 한 치 앞도 안 보이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당황한 부관의 목소리에서 요정 중대장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도 대비하지 않았겠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당황했으리라.

4중대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이게 인위적으로 만든 안개라면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고.

그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됐다.

투두두두둥!

쿼렐과 화살이 날아왔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다. 안개 너머에서 갑자기 우수수 쏟아진 사신의 부름이다.

퍼버벅 하고 주변에 있던 병사의 전신에 쿼렐이 꽂혔다.

부관도 머리통에 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요정 중대장은 자신의 감각을 더없이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도 화살이 꽂혔다.

물러나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티디딩!

두 발의 화살이 검에 걸려 튕겨 나갔다. 중대장은 곧 죽은 부관의 시체를 들어, 몸을 가렸다.

이러지 않으면 눈먼 화살에 죽을 터였다.

안개와 화살.

‘준비된 전략.’

된통 당한 거였다.

* * *

“먹혔군!”

아즈펜 공국 지휘관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곧 이 전장을 승리라는 이름으로 장식할 수 있을 테니.

이걸 위해 소모한 자원이 만만치 않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안개가 짙어지자마자 지휘관이 외쳤다.

“쏴라!”

기쁨과 흥분이 섞인 명령이 떨어졌고, 준비된 화살과 쿼렐이 적군을 향해 떨어졌다.

아즈펜이 준비한 건 주술이었다.

상대의 눈을 가리는 ‘몰살의 안개’라는 이명의 주술!

지휘관의 외침에 주술사는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주술이 성공했다.

갓 태어난 양과 송아지, 망아지 백 마리의 피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호수의 물을 매개로 만든 주술이었다.

평범한 재료만 들어간 게 아니다.

주술을 위해 희생한 게 많다. 지휘관은 거기까지는 몰랐다.

어쨌든 주술사는 그동안 열과 성을 다했다.

지형과 기후, 그동안 비를 부르는 주술을 부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땅이 젖어 있어야 발동되니까.

피로 적신 깃발과 깃대가 주술의 매개였다.

깃대에 보호를 받는 병력은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이게 주술사가 부린 수작의 전부다.

다만, 이걸 고작이라고 할 순 없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으나, 이쪽은 볼 수 있다.

그게 대규모 전장에서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어지간한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잘 알 터였다.

주술사는 싸움의 향방이나, 성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주술의 성공이 기꺼울 뿐이었다.

“성공해서 기쁜 거요?”

깃대를 지키는 소대의 지휘관이 물었다.

일전에 엔크리드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검 잘 쓰는 소대장이었다.

“잘못하면 실패할 뻔했으니까, 그러니 기쁘지.”

주술사는 일전에 적군이 야습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부정이 타서 지금껏 준비한 주술력이 다 사라질 뻔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했다.

소대장은 주술사의 말을 들으며 야습을 감행했던 놈을 떠올렸다.

‘그 새끼.’

그레이 독, 집요한 사랑꾼의 일원으로서 그 새끼만은 꼭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적진 어딘가에 그놈이 있을 거 아닌가.

아즈펜의 소대장은 횃불에 비친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 곱상하게 생긴 적군의 낯짝이다.

그는 놈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 * *

확 퍼진 안개가 다가오자, 물 냄새가 났다.

동시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눈에 보였던 벤젠스 소대장이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었던 라그나도 안 보인다.

“주술!”

누군가 외쳤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다. 렘의 목소리였다. 그는 짜증을 쏟아 냈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주술? 무슨 주술?

엔크리드는 생각과 함께 몸을 숙였다.

어느새 머리 위로 화살과 쿼렐이 날아들었다.

“잘했습니다. 고개 들지 마십시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라그나였다.

티디딩! 투둥!

따위의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주술이라니.’

주술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서부 개척지의 이민족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만 존재한다는 주술사가 왜?

왜라는 질문은 사실상 지금 의미가 없었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접었다.

갑자기 눈앞에 창날이 훅 찔러 들어왔다.

두근.

야수의 심장이 반응한다. 대담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몸이 굳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틀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딱!

기름 먹인 창대를 어설픈 칼질로 잘라낼 수 없었다.

창대가 튕겨 나갔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창날이었다.

엔크리드는 창날이 날아온 위치를 가늠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자 다른 창날이 또 날아왔다.

딱!

이번에도 간신히 막았다.

막으며 생각했다. 자세가 흐트러졌으며, 무게 중심 이동도 엉망이라고.

잘한 거라고는 검을 꽉 쥔 것뿐이었다.

라그나가 몇 번이고 잔소리하며 가르쳐 준 걸 다 날려 먹었다.

‘이거 참.’

당연하게도 한 번 배운 거로 숙달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뒤로.”

라그나가 말한다. 엔크리드는 그 말의 반대로 움직였다.

작센 덕분에 청각이 예민해졌다.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들렸다.

“으악!”

“끄악!”

“죽엇!”

“빌어먹을!”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욕설 사이로 엔크리드는 몸을 날렸다.

“……분대장!”

엔크리드의 뒤로 놀란 라그나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푹!

창날이 목을 뚫었다.

‘정확하군.’

어설프게 몸에 구멍을 내느니 이쪽이 낫다.

끔찍한 통증이 목부터 전신으로 퍼졌다.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엔크리드를 찌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목을 내밀고 덤비는 바람에 당황한 탓이다.

“뒈져.”

병사는 엔크리드를 발로 밀었다. 창날이 쑥 빠지며 두 번째 극통이 찾아왔다.

엔크리드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이대로 숨 몇 번 내쉴 시간이면 그대로 암흑이 자신을 감싸리란 걸 알았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만족했다.

끔찍한 통증과 수없이 반복해도 적응되지 않는 죽음의 공포가 대수일까.

‘이걸로.’

라그나에게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오늘’이 시작됐으니.

그게 어찌나 즐겁던지.

“끄끅.”

엔크리드는 피를 줄줄 흘리며 웃었다. 그걸 본 적병은 혀를 내둘렀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을 본 거다.

암전, 암흑이 찾아온다. 눈을 뜨니 다시 시작된 오늘이다.

* * *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라그나가 묻는다. 이번에는 이마를 긁는 대신 곧바로 답했다.

“검을 잘 쓰고 싶으니까.”

본래와는 다른 답이지만, 그래도 목적지는 같았다.

“검 배우고 싶습니까?”

물론이다.

라그나가 다시 제안했고 엔크리드는 받아들였다.

기본기 수행 이틀 차, 두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

그리고 전장에 섰고.

안개가 펼쳐졌다.

“어? 지랄?”

렘이 또 짜증을 낸다. 엔크리드는 이번에 창대를 세 번 쳐 내고 다시 창날에 목을 맡겼다.

재수 없어서 비켜 맞았다. 목 가죽이 뜯어지며 바닥에 피를 후두둑 뿌렸다.

‘젠장.’

이대로 과다출혈로 죽는 건 너무 괴로운데.

그리 생각하기도 전에 적병 중 하나가 창날을 다시 찔렀다. 고마웠다.

퍽.

다시 또 죽는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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