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37화 (37/170)

37. 주술의 매개는 무엇인가?

“그 스텝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다섯 번째 오늘에서 라그나가 대뜸 물었다.

물론 네가 가르쳐 줬지.

엔크리드는 솔직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닌 교습소만 스무 군데가 넘어.”

그중 사기꾼에 가까운 놈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가르친 곳도 많다.

“음.”

라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에게 배운 스텝을 토대로 움직이니, 어느새 라그나의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라그나는 훌륭한 선생은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천재는 자신의 발밑을 보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지나온 길을 가르치는 게 어렵다.

그냥 하면 되는 걸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검을 내리치라고 하면 내리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필요한 스텝과 무게 중심의 이동 따위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할 수 없다.

검술 교습소를 차리기에는 최악의 타입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첫 번째 오늘에서 깨달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가르치는 사람이 엉망이라면 배우는 사람이 잘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대륙 최고라고 해도 무방했다.

“발은 어디로? 발끝은 어느 방향으로 하지?”

“그거까지 말해 줘야 합니까?”

비난하는 어조가 아니다. 진정 궁금해서 묻는 거다.

“응.”

라그나는 발끝 방향을 말해 주며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자신의 자세를 보여 줬다.

그 자세는 기본기의 표본과도 같았다.

안목이 있는 이들이 본다면 누구나 침을 흘릴 만한 재능일 것이고.

엔크리드는 라그나의 자세를 반복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무게 중심은?”

“네, 그 타이밍으로 하면 됩니다.”

엔크리드는 물었고, 라그나는 답했다.

열두 번의 오늘을 반복하는 내내 라그나는 엔크리드에게 스텝과 자세만 가르쳤다.

“자세와 발이 먼저, 기본기는 다음입니다.”

“가끔은 괜찮게 휘두르기도 하는군요.”

“지금은 장작도 못 팰 수준이었습니다.”

“조금 전 내려치기에 적병이 죽는다면 그 병사에게 죽어 줘서 고맙다고 세 번 말하십시오.”

“지금은, 그러니까 춤을 춘 겁니까?”

“춤이 맞군요. 검을 들고 췄으니 검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군요. 작대기 춤이라고 이름 지읍시다.”

라그나는 조곤조곤 독설을 날렸다.

‘이 새끼 이런 타입이었나?’

렘이 몇 배는 더 부드러운 선생이었다.

가끔 말하는 걸 보면 돌았나 싶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하루하루,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으니.

사선 베기를 시작할 때쯤, 라그나는 말했다.

“대치하고 있는 상대와 나 자신을 잇는 선을 공격선이라고 합니다. 이 선은 보통 두 사람 사이의 최단 거리이자 공격 시 무기가 지나가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공격선을 막고 내 공격선을 뻗어 내는 것, 이 또한 기본입니다. 이해했다고요?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게 그겁니까?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는 것?”

“다시 말하죠. 분대장은 입으로만 이해했습니다.”

라그나는 독설을 뱉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배우고 또 배운다.

스무 번의 오늘이 지나고.

스물다섯 번의 오늘이 지나갔다.

“……기본기가 형편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발은 쓸 줄 아는군요.”

서른다섯 번째 오늘에서 들은 얘기였다.

이때쯤이 돼서는 엔크리드의 행동 양식이 조금 바뀌었다.

안개가 낀 뒤 곧바로 죽지 않았다.

첫 번째 창질은 피한 뒤에 그 안으로 돌진하고 죽었다.

몸에 창이 고슴도치처럼 꽂히곤 했다.

퍽 괜찮은 방법이었다.

창 한 자루는 가끔 빗나가곤 했으니까.

죽여 달라고 달려드는데 왜 창을 도로 빼냔 말이다.

이해는 한다. 갑자기 죽여 달라고 덤비는 걸 보면 황당할 테니까.

그리 창질이 빗나가면 1시간 동안 꿈틀거리다 죽어야 했다.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통증의 연속이었고 끔찍한 순간의 이어짐이기도 했다.

라그나는 그때마다 엔크리드를 부르거나 외쳤다.

“분대장!”

“미친!”

“야!”

나중에는 어찌나 급하던지 그냥 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오늘을 충실히 채웠다.

“자세가 생각보다 좋군요.”

조금씩 나아진다. 그렇게 변할 때마다 라그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는 분명…….”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어디서 뭘 배운 겁니까?”

백 번의 오늘이 지나갈 때쯤에 라그나가 말했다.

“당신 누구야?”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쳐다보니.

“분명 어제까지는 개판이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마법인가?”

라그나가 놀랐다. 엔크리드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예상보다 내 실력이 좀 나은 것 같아?”

“조금이 아닙니다. 진짜 분대장이 맞나 싶을 정도니까.”

라그나는 진짜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이곳은 사고뭉치 분대, 라그나도 괴짜였다.

“그래서 안 가르쳐 줄 거냐?”

“그건 아닙니다.”

라그나는 긴가민가한 태도로 다시 시작했다.

이후는 가상의 대련 상대를 두고 검을 휘둘렀다.

공격선의 개념, 검을 쥐는 법, 검을 방어 수단으로 쓸 때의 방법.

“질이 좋은 검이라면 옆면으로 막아도 되고 그게 아니라면 칼날로 막습니다.”

“베기, 찌르기, 자르기, 이 세 개가 기초입니다. 스텝이랑 자세는 나쁘지 않으니, 세 가지 기본 검술을 중점적으로 연마하십시오.”

라그나가 알려 준 스텝은 종류가 많았다.

전진하는 것, 지나치는 것, 파고드는 것, 피하는 것, 옆으로 도는 것, 돌아서는 것, 크게 돌아서는 것.

외우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이 또한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몸에 붙었다.

아무리 둔재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의 실력자가 1:1로 붙어서 계속 가르치니, 실력이 늘었다.

천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약함이라도 엔크리드에게는 희열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으로 상대를 그리십시오. 그 뒤에 검을 휘두릅니다.”

챙!

수십 번의 오늘을 통해 계속 배웠다.

사선 베기, 검을 붙이는 바인드, 감아치기, 꺾어 베기, 상단 수평 베기, 곁눈 치기, 정수리 베기, 되치기, 하프 소드 파이팅, 받아넘기기, 흘리기, 연속 치기, 파고들기, 대고 긋기.

시간이 지날수록 독설이 줄었다.

“생각보다 괜찮군요. 검 붙이는 기술 어디서 배웠습니까?”

“이전 교관 중 하나가 바인드 하나는 죽도록 가르치더군.”

“훌륭합니다.”

라그나는 그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다른 기술을 배울 때도 이 방식을 차용했다.

“이전 교습소에서 상단 수평 베기가 계속 엉망이라고 했는데,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는데.”

“……가르치는 건 전데 이미 배울 걸 정해 두고 오신 것 같군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어깨를 으쓱하면 라그나가 짧은 테스트를 했다.

그러곤 곧 엔크리드의 말대로 했다.

“그렇게 하죠.”

라그나는 절대 모르겠지만, 오늘을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이 가르친 뒤, 이 정도면 됐다고 넘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엔크리드는 다음 진도를 나갔다.

내리쬐는 햇볕을 지붕 삼아 땀을 흠뻑 흘리는 오늘의 반복.

누군가에게는 지겨워 구역질이 나올 수 있는 일이, 엔크리드에게는 아니었다.

그렇게 이백 번의 오늘이 지나갈 때쯤.

“음?”

눈을 뜨니 검은 강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뱃사공이 보인다. 눈을 가린 뱃사공.

그의 입이 열리는 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미친놈이냐? 제 발로 계속 죽어? 이 아둔한 놈이.”

사공의 말투는 평이했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꿈에서 깼다.

다시, 익숙한 오늘이었다.

엔크리드는 눈만 뜨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몽정이라도 했수? 뭐 하슈?”

옆에서 렘이 강아지가 뱉을 만한 소리를 했다.

무시한 채,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미친놈이란 소리가 하고 싶었던 거라고 해 두자.’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리 물을 수도 없지 않나.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는 붙잡아도 의미가 없다.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주술 좀 알아?”

그 말에 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주술?”

“알면 아는 대로 좀 알려 줘.”

매번 안개가 낄 때마다 렘은 주술에 관련된 말을 뱉었다.

분명히 아는 게 있을 터였다.

그동안은 검술의 기초를 단련하느라 정신없이 보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훈련이 몸에 붙었다는 거다.

라그나가 보면 매번 놀랄 정도로 실력도 늘었고.

아직 실력을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확실한 건 엔크리드 자신도 전보다 나아졌다고 느낀다는 거다.

“주술이 주술이지 뭐겠수.”

“아는 대로 읊어 봐, 재밌을 것 같은데.”

평소의 엔크리드는 이리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없다. 렘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궁금한 거유? 좋수다. 음, 간단히 말해 주겠수다. 마법과 주술의 다른 점이 뭔지 아슈?”

“마법이 더 흔하지.”

드물지만 마법사는 간간이 보인다.

하지만 주술이라니,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 엔크리드도 본 적이 없다. 그만큼 드물다.

“틀린 말은 아닌데.”

렘이 말하며 잠자리를 정리했다. 모포를 대강 툭툭 말아서 한쪽에 밀어두고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엔크리드가 따라 나왔다.

똑같은 오늘이다.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오늘이든, 엔크리드에게는 즐거운 오늘이 될 뿐이다.

뒤를 따라 나오니 렘이 마저 말했다.

“주술은 매개가 필요하우. 마법도 매개체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거 아는데, 주술은 제물이나 매개가 어어어어엄청 중요하우. 그게 없으면 시작이 안 되거든.”

“네 부족도 그런 거 썼냐?”

렘은 서부 개척지대 출신이다.

그쪽이 개척지대가 된 건 중앙 대륙 제국이 전쟁에 승리해서다.

그전 서부는 이민족의 땅이었다.

이것도 이미 백 년이 넘은 이야기였다.

지금은 서부 개척지대로 굳어졌고, 서부 이민족은 하나의 인종으로 편입됐다.

지금도 얕잡아 부를 때는 야만인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쨌든 주술은 서부에서 비롯됐다.

그건 상식이었다.

“몇 번 구경은 해 봤지. 근데 진짜 주술사는 사실 몇 안 되는 거 아시우? 대륙에 떠도는 놈들은 다 사술쟁이우, 사술쟁이.”

렘이 그렇다면 그렇다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할 일을 하러 갔다.

“어디 가슈?”

“훈련.”

라그나를 만나 다시 기본기를 갈고 닦는다.

반복되는 오늘이 이백오십 일이 지날 때쯤, 라그나가 말했다.

“원래 기본기가 이렇게 탄탄했습니까?”

금발을 쓸어넘긴 라그나의 붉은 동공이 커진 게 보였다.

“거기에 애초에 롱소드를 주력으로 삼은 거 같군요.”

응, 그 말이 맞을걸.

계속 이 검으로 훈련했으니까.

어색하지만 손에 익은 검이다. 엔크리드의 손길을 타는 건 처음인데, 이미 이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으니.

반복된 오늘을 통해 얻은 익숙함이다.

“실전이 필요한 시점이군요.”

훈련이 끝난 뒤 라그나가 말했다.

엔크리드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슈? 모이라는데.”

렘이 둘을 불렀다. 엔크리드는 돌아가는 길에 크라이스를 통해 빵을 구해 씹었다.

물에 적셔서 딱딱한 빵을 꾸역꾸역 씹어 넘기고 육포도 구해 먹었다.

장비를 점검했고 다시 전장에 섰다.

라그나와 바꾼 롱소드가 허리에서 흔들거리자, 렘이 물었다.

“쓰던 검 비싸게 줬다고 하지 않았수?”

“이쪽이 더 손에 익어서.”

“하루아침에 무기 바꾸고 골로 간 놈 많이 봤수다.”

이건 악담일까, 걱정일까.

“네 걱정이나 해라.”

후 하고 숨을 내뱉고 마음을 다잡았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준다고 해서 거기에만 의지할 순 없다.

기왕 하는 실전이라면 ‘내일’을 위한 일이 되는 게 좋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 생각했다.

‘주술은 매개가 필요하고.’

그 매개는 너무도 중요하다.

렘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키다리 풀밭에 적이 머문 이유가 매복이 아니라 은폐였다면?

저들이 숨기고 싶은 게 있었다면?

그걸 엔크리드는 미리 봤다.

깃대와 깃발.

막사 하나에 불을 지르니, 침입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막사의 불을 끄기 바쁘지 않았던가.

곧 적군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옆 3분대 소속 병사가 창을 든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대형이 왜 저래?”

깃대를 토대로 뭉친 대형이니, 전술적 가치는 없다.

그렇다면 오롯이 주술적 가치만 있겠지.

적군의 위로 불쑥 솟은 깃대와 깃발이 여섯 개.

주술의 매개다.

“엇!”

안개가 퍼지며 눈 앞을 가린다.

자, 그럼 주술의 안개 속을 유영해 볼까나.

엔크리드의 귀가 씰룩였다.

작센에게서 얻은 예민한 청각이 눈을 대신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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