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98화 (98/170)

98. 개구멍

이쪽 구울은 등이 굽었는데도 빨랐다. 손톱이 이전에 봤던 놈보다 더 길기도 했고.

그래도 하피보다 빠르진 않았다.

렘의 도끼보다 날카롭지도 않았고.

‘점과 점.’

선을 잇는다. 주변 모든 움직임을 육감의 영역에 넣는다.

다가오는 구울을 보며 해야 할 일은 하나뿐.

검을 뽑아 휘두르는 것.

치링.

검집에서 벗어난 칼날이 제 역할을 했다.

카아!

썩은 내를 풍기는 구울이 다가오는 걸음을 감으로 계산한 엔크리드의 검이 밑으로 떨어졌다.

딱. 쩍!

정수리 베기다.

왼발은 앞에 둔 자세에서 위에서 밑으로 내려친 검이 정확히 구울의 정수리를 쪼갰다.

이마까지 내리꽂힌 검을 다시 당겨 회수하는 것까지가 한 동작이다.

그걸 세 번 반복했다.

검 끝을 사선으로 하늘을 향한 채, 위에서 밑으로 내려친다.

순식간에 세 마리 구울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전부 정수리가 쪼개진 채였다.

그사이 옆에서 토레스가 단검을 하나 던졌다.

팽하고 날아간 단검이 구울의 머리통에 꽂혔다.

왼쪽으로 우회하려던 놈이다.

엔크리드의 발이 바빠졌다.

스텝을 밟고 다가오는 놈의 목덜미를 베고.

거리를 좁힌 구울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때리고.

한 손으로 든 검을 찔러 다른 놈의 머리통을 뚫었다.

처절함? 그딴 건 없었다.

열세 마리의 구울이 순식간에 죽었다.

그리고 놈들을 다 죽이며 엔크리드는 묘한 걸 느꼈다.

‘패턴이.’

구울이 마치 싸우는 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일정한 형태로 덤볐다.

그래서 더 상대하기 쉽기도 했지만.

만약 압도할 만한 실력이 없다면 순식간에 포위당해 죽을 수도 있을 터였다.

‘뭘까.’

이전 하수도에서 봤던 구울이나, 오면서 해치웠던 강가의 구울과는 또 다르다.

마물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식인귀, 그게 구울이다.

짐승보다 머리를 쓰지 않는 괴물인데.

‘이런 놈들이 전술을 쓸 수 있나?’

없다. 불가능하다. 콜로니라도 이뤘다면 모를까.

집단을 이끌 리더가 있는 마물 무리를 군체, 콜로니라고 부르는데.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육감의 영역에서 묘한 게 걸린 것뿐이니.

칼날에 묻은 구울의 피를 냇가에 씻어도 될까.

그리 생각하며 처리가 끝났다고 말하려 돌아선 순간이다.

핀이 성큼 다가왔다.

“뭐야, 너.”

핀이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질문에 많은 게 내포되어 있으나, 지금은 구울을 상대한 능력을 묻는 것일 터.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독립 소대를 책임진다고 말했는데, 그 소대가 극단적인 전투 소대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중대장의 의도 또한 그런 역할이라 예상하기도 했으니.

소대가 고작 아홉 명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나.

그런데도 유지될 수 있는 것.

대원 하나하나의 실력이 일반적인 기준을 뛰어넘는다는 거다.

변방 수비대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 위명에 가려질 법도 하지만.

엔크리드 개인의 감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상대가 안 돼.’

렘과 라그나, 아우딘, 작센.

이 넷의 실력은 지금도 넘보기 어렵다. 이리 구울을 썰어 대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멀었어.’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봤음에도.

그 넷은 아직 저 너머에 있는 느낌이다.

그에 반해 변방 수비대의 토레스는 어떤가.

잡을 만했다. 정작 목숨을 걸고 싸우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나, 질 거란 생각도 쉬이 들지 않으니.

“너 되게 잘 싸우는구나.”

“끝내주는군요.”

핀의 말을 새벽 나절에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받았다.

대원 몇이 다가와 엔크리드를 본다. 엔크리드는 이게 이만한 대우를 받을 일인가 싶었다.

이런 경우가 참 흔치 않았기에, 어색하기도 했다.

덕분에 뱉은 말이다.

“주둔지는 안 옮겨도 되겠군요.”

“그렇지.”

핀이 답했다.

이후 다시 주둔지로 돌아가기로 했고, 중간에 눈꼬리가 처진 대원이 냇가 방향을 알려 줬다.

임시 주둔지이자 식당으로 삼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봐, 나도 셋을 죽였는데.”

돌아가는 길, 옆에서 토레스가 중얼거렸으나,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엔크리드만은 그에 반응하긴 했다.

그가 툭 하고 토레스의 어깨를 쳤다.

“덕분에 쉬웠다.”

실상 토레스도 알긴 했다.

그가 한 일은 어디까지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혼자서도 다 잡았겠지.’

새삼 깨닫는 것.

‘실력을 숨겼어.’

아니, 토레스는 다시 생각했다.

엔크리드가 실력을 숨긴 게 아니라 대련과 실전의 온도가 다른 거다.

제대로 붙으면, 만약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어떨까.

‘질 것 같은데.’

특급 병사라는 등급 내에서도 변방 수비대는 나름대로 기준을 나눴다.

전투력만 치자면 토레스는 특급 중에서도 중간쯤이었는데.

엔크리드는 그보다 더 위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괜히 하이드 나이프를 알려 준 게 아까워졌다.

“야, 그거 연습하지 마라.”

전투가 끝나고 검을 회수한 엔크리드가 버릇처럼 얇은 돌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토레스가 말했다.

“기껏 알려 줄 땐 언제고?”

“……그냥 해 본 말이다.”

엔크리드야 토레스의 속내를 알 턱이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밑이라고 생각한 존재가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을 때의 기분.

가히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엔크리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에게는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재능의 부족함으로 다들 그를 두고 추월했고 지나쳤으며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런데도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손바닥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그게 엔크리드란 인간이었다.

“칼이나 씻으러 가자.”

구울의 피는 썩은 내를 풍긴다.

그 냄새가 좋을 리도 없고, 피는 기본적으로 기름기를 가졌으니.

그대로 두면 칼날을 상하게 한다는 거다.

“알았다.”

어째 힘이 빠진 토레스와 엔크리드는 사냥에서 제외됐다.

“식사는 우리가 준비할 테니, 빨래라도 하고 오시죠.”

그 덕에 냇가에서 땀에 전 옷을 빨 수 있었다.

말리는 게 문제이긴 하나.

보통 굴로 돌아가는 건 밤이 되어서라고 하니.

여기서 피운 모닥불에 종일 말리면 될 것이다.

안에 입은 가죽 갑옷을 벗어서 씻은 건 어제니까 두고.

행군 중에 또 땀이 났지만, 그렇다고 도시에 있을 때처럼 청결을 유지할 순 없을 것이다.

씻지 않으면 병에 걸린다는 건 상식이다.

특히나 군대 내에서는 청소와 청결이 기본이었다.

냇가의 물은 생각보다 맑았고, 오물을 가지고 하류로 흘러내려 가는 속도도 빨랐다.

핀이 물을 마셔도 된다고 해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한 모금 마신 뒤다.

꼬르륵하고 위장이 울었다.

“너도? 나도.”

토레스가 그걸 듣고 말했다.

둘은 자리를 수습하고 꽉 쥐어짠 옷가지를 챙겨 돌아갔다.

“주시죠.”

구울을 해치우기 전보다 배는 친절해진 대원이 긴 나뭇가지를 가져와 옷을 걸어 줬다.

모닥불 바로 옆에서 어디서 잡았는지, 뱀 껍질을 벗기는 대원이 보였다.

“횡재했죠?”

뱀 껍질을 벗기는 대원이 말한다.

입맛이 돌긴 했다.

보기에는 징그러워도 뱀 고기는 단백질이 가득한 영양분이었다.

아우딘도 말하지 않았나.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다 먹어 치우는 고기라고.

“그러게.”

답하고 옆에 앉았다.

토레스가 그 옆에 앉고, 핀은 맞은편에 앉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데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것도 재주지.’

사냥꾼이나 정찰대가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하는 걸 몇 번 본 적 있었다.

나무껍질과 잎으로 먼저 작은 불을 피운 뒤, 잘 타는 나무를 잘게 쪼개서 넣는 거다.

물론, 이것도 요령이 필요한 일이다.

엔크리드가 하면 번번이 실패다.

이쪽은 일상인지, 연기가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졌고.

곧 대원 중 하나가 격자로 쌓아 둔 장작 밑으로 그을린 숯 따위를 넣었다.

“장작을 태우면 연기가 많이 나거든요.”

그러니 처음 불을 피울 때 주의하고, 이후에도 장작을 넣을 때마다 연기가 나는 걸 조심하는 거다.

크로스 가드에서 보일 만한 연기는 아닐 것 같지만.

매사 조심하는 건 정찰대의 버릇일 터였다.

곧 대원 둘이 뱀 고기를 구웠고, 나머지는 육포 따위를 굽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커다란 냄비를 가져와 물을 끓였다.

그 안에 이런저런 열매 따위를 넣더니, 조금 뒤 건져 냈다.

“쟤는 별명이 요리사야.”

궁둥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 핀이 말했다. 그녀는 숫돌로 제 손도끼의 날을 가는 중이었는데.

그걸 보니 괜히 렘이 떠올랐다.

‘사고는 안 치고 있으려나.’

엔크리드가 대강 고개를 끄덕인 뒤, 얼마 안 있어 식사를 시작했다.

뱀 고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소금을 뿌려 간도 맞았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나 꼬리 부분이.

“전 돌아가면 식당을 차릴 겁니다.”

이 모든 요리에 관여한 병사가 말했다. 모닥불 불빛이 얼굴을 환하게 보이게 했다.

생각보다 앳된 얼굴인데 나이를 물어보니 스물둘이었다.

“자식이, 훌륭한 레인져가 될 생각을 해야지.”

“전 요리사가 더 좋다고요. 대장.”

핀의 말에 요리사란 별명의 대원이 말하고, 핀은 그 말에 파하하 웃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끈끈한 분위기가 오갔다.

엔크리드는 뱀 고기를 씹어 먹고 육포를 달궈 먹었다.

양념 육포를 조금 나눠 주자, 요리사란 별명의 병사가 눈을 빛냈다.

“아, 이거 뭐지, 왜 맛있어요? 어디서 구한 거죠?”

“도시에서. 돌아가면 알려 주지.”

엔크리드의 말에 요리사란 병사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꼭입니다.”

그리 든든히 먹은 뒤에는 반씩 나눠서 오침을 즐겼다.

“잘 쉬는 것도 레인져의 일이야, 실상 주변 정찰이 의미 없는 땅이기도 하니까. 이곳에서 최우선은 생존이야. 생존에 체력은 필수고.”

핀이 말했다.

쉬는 곳도 정해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를 파내서 만든 은신처였다.

누군가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쉬었고.

또 누군가는 모닥불 곁을 지켰다.

반씩 나눠서 휴식을 취한 뒤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갈 때쯤, 핀이 본론을 꺼냈다.

핀이 토레스와 엔크리드를 앞에 두고 선 채로 말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같이 상의해 보자고, 첫 번째는 개구멍.”

이어진 핀의 설명이다.

“뭐, 도시 내에 암거래하는 애들이 쓰는 루트라서 알 놈은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막진 않거든. 들어 보면 알겠지만, 이쪽 통로를 아는 놈들이 좀 있어서.”

쉽지만, 그만한 위험이 동반된다는 말이 덧붙었다.

“다음은?”

토레스가 물었고.

핀이 줄줄 이어 말했다.

두 번째는 야밤에 성벽을 타고 넘는 것.

세 번째는 새벽 나절에 움직이는 상단을 가장해, 몰래 숨어 들어간다는 거다.

“가장 빠른 건 첫 번째, 가장 안전한 건 두 번째, 가장 편한 건 세 번째.”

들어만 봐도 알겠다.

위험도는 세 번째, 첫 번째, 두 번째 순이라는 것.

하지만 핀이 말하는 걸 봐서는 큰 위험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혀 심각한 말투가 아니었다.

“실상 성벽 너머로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문제는 그다음이지, 고양이를 만나는 거.”

엔크리드도 그게 난감한 문제가 되리라고 봤다.

만약 억류된 상태라면? 이미 잡혔다면 어떤 표식도 남기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감옥까지 가 봐야 하나?

“도시 내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면 그대로 복귀다. 정찰대 전원도 본대로 돌아가고.”

“그럴 것 같더라.”

기다렸다는 듯 토레스가 말했고, 그 말을 핀이 받았다.

토레스는 본대에서 몇 개의 지침을 더 받고 온 듯했다.

“들어가는 건 우리 셋만 간다. 어디로 갈래?”

핀이 말했다.

“그건 그쪽이 선택해야겠지? 이쪽 상황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토레스의 말에 핀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동의하니, 핀이 개구멍으로 가잔 말을 뱉었다.

“어지간히 재수가 없지 않은 이상은 안 걸릴 테니까. 출발은 내일 아침이다.”

“밤이 아니라?”

토레스가 되물었다.

잠입은 전통적으로 밤이 아닌가.

“아침이 나아, 밤이 되면 오히려 더 경계하니까. 성벽을 넘는 것도 내일 밤이 더 낫고.”

엔크리드는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만 봤다.

그 뒤, 먹고 단련하고 돌을 소매에 넣었다가 빼는 연습을 종일 하니 하루가 끝났다.

다시금 굴에 들어가 잘 시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은 없고 오히려 지금 상황이 평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쪽에는 아즈펜의 정찰대가 없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간다.”

핀을 선두로 셋이 크로스 가드로 나아갔다.

크게 우회해서 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크로스 가드의 서쪽은 마물과 마수가 장벽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인데. 정찰대? 돌아다니긴 하지. 만나면 재수 없는 수준으로 끝나진 않을 거야.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저쪽에서도 여기에 정찰대를 안 보내는 거로 아니까.”

확실한 목적 없이는 아즈펜의 정찰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핀의 걸음은 빨랐다.

괜히 레인져가 아니었다.

특히나 마물과 마수의 흔적을 확인하고 피하는 솜씨는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특히나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발뒤꿈치부터 바닥을 지그시 눌러 밟는 걸음, 그게 엔크리드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는 좀 돌아가야겠다.”

덤불이 가득한 작은 둔덕을 헤집고 나가는 길도 있었다.

핀이 허리춤에 찬 도끼로 길을 냈고.

엔크리드도 검을 휘둘러 앞을 막는 덤불을 벴다.

‘칼날 점검을 안 했네.’

아침에 장비를 점검해야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작업을 빠뜨렸다.

훈련에 너무 열중한 탓이었다.

‘실수.’

대단한 실수는 아니다. 그게 지금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 삭삭 하고 덤불을 베자, 안에 빨간 열매 따위가 보였다.

“독이다. 먹지 마라.”

핀이 농담을 섞어 말했다.

“주의하죠.”

“나한테도 말 편하게 하지 그래?”

핀이 말했다.

“그러지.”

제안하면 굳이 거절하는 법이 없다. 굴에서 같이 지내자는 것만 빼면.

엔크리드를 보던 핀이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일 끝나면 나랑 잘래?”

“아니.”

“칫.”

“야, 옆에 나도 같이 걷고 있다.”

마지막의 토레스의 말이다.

“응. 알아.”

핀은 당당했다. 애초에 성격 자체가 대범한 덕이리라.

그리 도착한 곳 성벽이 보이는 작은 둔덕이다.

둔덕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성문이 있을 터였다.

저 멀리 성벽이 보였는데, 해자는 없었다.

“굳이 해자까지 필요하겠어? 어지간한 재주가 아니라면 마물과 마수를 피해서 여기까지 오는 것부터가 어림도 없는 일인데.”

그 말인즉슨 핀이 어지간한 레인져가 아니란 거다.

하긴, 이 정도가 아니라면 이쪽 지역의 책임자로 있진 않겠지.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구멍을 따라 들어갔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

그 앞에서 핀이 레인져의 구호를 뱉고 들어갔다.

전장의 꽃은 보병이라는 말과 같은 거다.

뒤를 슬쩍 본 핀이다.

엔크리드의 눈에 핀의 미소와 머리를 감싼 얇은 가죽 투구, 투구 틈에 삐져나온 주황색 머리칼 따위가 보였다.

그 뒤를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따라 들어갔다.

이후는 생각지도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멍청한 놈들.”

한참 들어가자 그들을 반긴 건, 긴 창을 앞세우고 방패를 든 부대였다.

꽤 널찍한, 셋이 나란히 설 정도의 넓이의 통로.

장창과 방패를 앞세운 부대가 머물기도 좋을 터였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끼-익.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뒤를 보니 숏보우로 무장한 부대가 보였다.

개구멍으로 들어와 반 시간을 걷기도 전이었다.

함정이었다.

방패와 장창부대가 전면.

뒤를 막은 건 시위에 걸린 화살 수십 발이다.

기사급이 아니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토레스의 좌절감 가득한 목소리와.

“꼭 잡고 싶었다. 살쾡이 같은 년아.”

적 지휘관의 말.

그걸 듣고 안색이 변한 핀이다.

“개새끼!”

핀의 말이 마지막이었다.

화살이 날고 장창이 오갔다. 엔크리드도 반항 비슷한 걸 했다.

왼손에 버클러를 들고 검을 휘둘렀으나.

어쩌겠나, 압도적으로 숫자에서 밀리고 좋은 위치를 뺏겼으니.

푸부부부북.

창날에 허벅지를 뚫리는 걸 시작으로 머리통까지 뚫리며 죽었다.

그걸 여실히 느끼자니, 괴로움이 치솟으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물론 그냥 죽진 않았다.

“지독한 새끼.”

그의 검과 휘슬 대거는 이런 상황에서도 길동무를 여럿 만들긴 했다.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날 일은 없겠지만.

통증과 함께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낄낄낄.

뱃사공의 웃음을 끝으로 엔크리드는 눈을 떴다.

새벽 나절, 죽음이 기다리는 하루의 시작, 오늘의 반복.

다시금 시작된 오늘이다.

정작 임무는 첩자의 생사 확인인데, 성벽을 넘기도 전부터 난관이었다.

‘성벽을 넘는 방법이 세 가지라 했던가.’

일단 개구멍은 막힌 길이라는 걸 알았고.

그럼, 나머지는?

엔크리드가 다시 시작된 오늘을 맞이하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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