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97화 (97/170)

97. 쟤는 정말 아파?

야영지에 도착한 건 밤이 다 돼서였다.

달빛 덕분에 그리 어둡지 않은 날이었다.

자갈길에서 어느새 주변이 풀밭으로 변했다.

겨울이 끝나가는 중이라는 걸 증명하듯 슬슬 풀색이 보이는 땅이었다.

물론 밤인지라 그게 보랏빛처럼 반짝일 뿐이지만.

‘달이 밝아.’

엔크리드는 머리 위에 뜬 달을 보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른팔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반나절 이상을 걸었는데, 오는 내내 토레스의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했더니.

전완근 쪽이 저려서 뻐근했다.

몇 번 손을 쥐었다가 펴 본 엔크리드는 내일이면 괜찮아지리라는 걸 알았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혹사해 봤기에 자연스레 근육의 회복 정도를 아는 거다.

아니, 내일까지 갈 것도 없이 조금만 쉬면 괜찮을지도.

“종일 돌만 가지고 놀고. 이상한 작자네, 진짜.”

도착하자마자 핀이 한 말이다. 가는 내내 힐끗힐끗 보던 시선을 엔크리드도 느꼈다.

“손이 심심해서, 버릇입니다.”

엔크리드는 대충 답하고 야영지를 살폈다.

여느 야영지처럼 불을 피우고 천막을 세운 곳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야영지가 아니라 굴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곳곳에 구멍을 뚫어 만든 굴이 여러 개 보였으니.

“마음에 드는 구멍에 찾아서 들어가고 위장막으로 가리면 됩니다. 아늑하게 자려면 온열 가죽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귀해서 나눠 드릴 건 없고요.”

대원 중 하나가 넓은 천을 하나 가져와 말했다.

얼추 보면 여기에 구멍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땅과 비슷한 황톳빛이었다.

‘온열 가죽이라.’

엔크리드의 배낭에 하나 있긴 했다.

‘에스터는 잘 있으려나.’

놔두고 가려니 한참 하악질을 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그렇다고 데려갈 순 없기에 두고 왔다.

“추우니까 둘이 굴 하나를 써. 그쪽은 신입이니까 나랑 같이 자면 되겠네.”

핀이 말했다.

그쪽이라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건 엔크리드였고.

엔크리드의 배낭에는 온열 가죽도 있고, 굴 크기가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았다.

체구가 작은 둘이라면 모를까.

가령 에스터 정도라면 데리고 잘만 하겠지.

하지만 아우딘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엔크리드의 몸뚱이도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즉, 불편할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여자다. 더 불편할 것이다.

‘이걸 누가 알면 또 난리가 날 테고.’

부대 내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를 보자니,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토레스가 빤히 쳐다보는 게 보였다.

“괜찮습니다. 전 준비한 게 있어서.”

핀이 실망한 눈치였다.

“난? 난 혼자 자라고?”

토레스가 그 틈에 손을 들어 말했다.

“변방 수비대의 소대장이란 친구가 맨몸으로 왔어? 부대원 하나 붙여 주지.”

“난 왜 부대원이지?”

“굴이 좁아.”

토레스가 그 말에 엔크리드를 한 번 보곤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체구가 더 작은 듯했다.

“뭐지.”

어쨌든 핀잔만 들은 토레스다.

핀이 대강 부대를 정리하고 제 굴로 지정한 곳에서 이것저것 꺼내는 걸 보는데, 토레스가 엔크리드 옆으로 다가왔다.

“나 왜 기분이 나쁜 것 같냐?”

그걸 왜 여기서 묻나.

“피곤해서?”

“이게 피곤해서일까? 응? 중대장도 사로잡은 마성의 분대장, 아니 이제 소대장이지. 마성의 소대장께서는 정말 그리 생각하시나?”

“응.”

“나쁜 새끼.”

토레스가 장난스레 말하고 돌아섰다.

굴은 그리 좁지 않았다.

지면에서 비스듬히 뚫려 있었고, 안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천을 덧대어 깔아 두기도 했다.

그 위를 위장막으로 덮으며 들어가니 의외로 아늑한 느낌도 들었다.

다시 나와 온열 가죽을 꺼내 두르고 들어가 보니, 지낼 만했다.

“준비가 철저하시네. 드시렵니까?”

정찰대원 중 하나가 다가와 육포를 건넸다.

“아니, 내 건 따로 있어서.”

일전에 얻어먹은 육포가 어찌나 입에 쫙 달라붙던지.

그게 어디 물건인지 찾아 결국 몇 점 더 얻어 온 참이었다.

“어머니의 비법이지.”

수수하게 웃으며 말하던 병사다.

그 병사의 모친이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여관 뒤쪽에 있는 곳인데, 음식 맛이 훌륭했다.

주력으로 파는 건 아무 고기나 양념을 발라 구워 주는 건데, 양념 맛이 훌륭했다.

꼬치구이 식당으로 주변에서 평도 좋았다.

‘돌아가면 더 받아 와야겠는데.’

어지간하면 그쪽 육포를 주기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기에 크라이스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해 두고 오긴 했다.

어쨌든 육포를 배낭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매콤함이 섞인 달짝지근한 양념이 입안을 휘돌았다. 어떤 비법이 들어 있는지 부드럽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요리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걸 먹을 때면 신기할 따름이다.

엔크리드가 가진 보잘것없는 재주는 오롯이 검을 휘두르는 것뿐.

용병질을 할 때부터 이런저런 잡기를 익히긴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롯이 검이었고, 기사를 꿈꿨을 뿐이다.

육포 몇 개를 씹어 삼키고 누우니 졸음이 몰려왔다.

마수와 마물의 땅.

잠드는 와중에 엔리의 경고가 떠올랐으나, 아무 일도 없이 크로스 가드의 앞마당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혹 밤중에 죽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으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첫날인지라 불침번도 빼 줬다.

동이 트기 전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곧 밖으로 나와 상의를 벗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그 차가움이 정신을 일깨우고.

일깨운 정신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엔크리드는 하의만 입은 채로 고립의 기법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발끝을 세운 뒤, 무릎을 복부까지 끌어올려 차듯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후 다양한 동작을 수행하니.

“……뭐 하는 겁니까?”

마지막 불침번이 야영 굴 사이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보고 있다가 물었다.

“아침 훈련.”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고?”

“크로스 가드 앞마당.”

“그걸 알면서?”

이쪽에 있는 정찰대 중 엔크리드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황당할 만했다.

그리 몸을 혹사하는 수준으로 구른 엔크리드가 곧 검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하자.

핀도 깨서 그걸 봤다. 다른 대원 전부도.

토레스만 빼고 전원 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쟤는 정말 아파?”

핀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곁으로 다가온 토레스가 모포 대신 들고 온 두꺼운 망토를 걸친 채 말했다.

“저 친구는 저게 일상이라.”

“저걸 매일 한다고?”

말하며 핀은 엔크리드의 몸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 아닌가.

아직 기억에 선명했다.

조각 같은 근육과 우람한 다리와 그사이 묵직한 그것.

‘아, 그건 단련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

묵직한 그것보다는 기억을 더듬어 엔크리드의 몸을 떠올렸다.

그 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이 땅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로 몸을 혹사하니, 자연히 다들 육체 단련 정도가 남달랐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저렇게 말이다.

다만, 안다고 쉬이 할 수 있을까?

“오후에 마물이라도 만나면 싸울 힘은 있고?”

하는 짓거리를 보니 근육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물으니.

“저거 하고도 나랑 대련만 열 번을 넘게 했지, 그리고 어제 행군을 한 거고.”

토레스는 말하며 자신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체력을 소모했다고 은근히 말을 흘렸지만.

핀의 눈은 엔크리드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왜인가.

검을 휘두르는 저 동작 한 번에 영혼을 태우는 느낌이 들어서.

“미친 사람 같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토레스가 듣기에 핀의 말투에 악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탄과 호감만 가득할 뿐.

‘뭘 했다고.’

토레스는 새삼 마성의 소대장의 위용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이제까지 한 거라고 목욕하고 걷고 자고 일어나 아침에 훈련한 게 전부인데.

이 험한 땅에서 정찰대를 이끄는 지휘관급의 병사가 넘어간 것 같지 않나.

‘이렇게 중대장도 꼬신 건가.’

아니, 사실 중요한 건 육체의 조건일까.

강가에서 남긴 인상 때문인가.

토레스의 잡생각은 금방 끊겼다.

다들 엔크리드를 신기하게 보는 것도 잠시니까.

“배 채우러 가자.”

해가 뜨는 시점이다. 핀의 정찰대는 함부로 불을 피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육포와 마른 과일로 끼니를 때우지도 않았다.

야영지로 삼은 곳에서부터 동쪽으로 반나절이면 크로스 가드고.

북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숲이 나왔다.

그곳이 그들의 식당이었다.

“배 안 채울 거야? 운 좋으면 토끼라도 잡을지 모른다.”

핀을 포함한 정찰대는 총 여덟.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의 끼니야 사냥꾼 식으로 때우면 그만이었다.

현지 조달 말이다.

그중 둘이 더 합류한 것뿐이니, 식사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안쪽에 냇가도 있으니, 거기서 씻어도 되고.”

핀이 엔크리드를 보며 말했다.

“옷도 빨아도 됩니까?”

엔크리드가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며 물었다.

독립 소대장이 되었으니, 둘은 동급이라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병사 등급제와 별개로 레인져 호칭을 단 정찰 소대장은 중대장과 소대장의 중간 계급이라 봐야 했다.

토레스와 비슷하단 소리다.

변방 수비대 소대장의 직급이 남다른 것과 같았다.

“시간 날 때 씻고 먹고 개인 정비를 하는 건 병사의 의무지.”

어찌 보면 지원군이라고 둘만 오는 것도 어색한 일인데, 그 둘이 소대장급이라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핀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그녀는 일선에서 뛰는 레인져일 뿐이니.

곧 북서쪽 숲에 도달한 그들은 냇가를 주둔지로 삼고 마른 나뭇가지 따위를 모았다.

그 와중에 마수 두 마리를 만났는데, 엔크리드는 구경만 했다.

“키에엑!”

마수는 동물의 변형체다.

어떤 형태로든 마물화가 된 동물이다.

그러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었다.

사슴 마수다.

피부는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곳곳에 껍질이 벗겨졌고 피부는 푸르스름했다.

마수 특유의 홍채와 구별이 되지 않는 초점 없는 까만 눈이 빤히 엔크리드를 바라보는 순간.

픽, 픽, 픽.

뒤쪽에서 들린 소리다.

정찰대원 셋이 동시에 숏보우를 들어 화살을 쐈고, 두 발은 사슴 마수의 이마에, 한 발은 목에 꽂혔다.

머리통이 꿰뚫리면 죽는 건 마수나 마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사슴 마수는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무릎부터 꺾이며 바닥에 머리를 박은 사슴 곁으로 대원 셋이 다가가 발끝으로 툭툭 차 보더니, 죽은 걸 확인하곤 화살을 회수했다.

그러더니 한 명이 혀를 찼다.

“칫, 부러졌네.”

사슴 마수가 쓰러지며 목에 꽂힌 화살대가 부러진 거다.

‘익숙해 보이네.’

정찰대원과 근접 전투를 배제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어떨까.

무조건 이긴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근접에서 정면 승부라면 필승이지만.

‘다대일이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괜히 마수와 마물의 땅에서 살아남은 부대가 아니란 거다.

“상급 병사라면서요? 사냥 경험은 있습니까?”

“조금.”

엔리를 통해 배운 것도 있고, 그 외 용병질이나 대륙을 떠돌며 배운 것도 있다.

물론 사냥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대신 다른 쪽에 능숙했지.

그런 와중이다.

가장 먼저 앞서 나아갔던 정찰대원 중 하나가 돌아왔다.

“에이씨. 구울입니다. 주둔지 옮길까요?”

“몇 마리였는데?”

“열 마리까지 세다가 뒤에 더 오길래 빠지고 돌아왔습니다.”

구울의 출현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기껏 불을 피우고 이런저런 대비를 해 둔 주둔지다.

구울 열 마리는 정찰대원에게는 부담스러운 적이다.

특히나 이쪽 구울은 발이 빠르니.

화살 몇 발로 제지할 숫자가 아니라면 근접전에 돌입해야 했다.

대강 훑어보니 숏보우를 든 병사는 셋.

그럼 구울 무리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피하는 게 상책이란 소리다.

“지랄맞네.”

핀조차 짜증을 내는 사이, 엔크리드가 나섰다.

“어느 쪽?”

그가 묻는다.

어색할 법도 한 물음이나, 그의 눈이 조금 전 구울을 보고 온 병사에게 향했다.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구울 말이다.”

토레스가 나서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토레스는 엔크리드의 실력을 대강 가늠했다.

무엇보다 그의 특기는 중검술.

자신이 단검을 주로 다루는 것과 비교하면, 마물 사냥에 특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일전의 인면견과 하피를 잡는 것도 보지 않았나.

“이쪽 구울은 얌전한 편이 아니야.”

엔크리드의 의도를 읽은 핀이 걱정스레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될걸.”

토레스가 덧붙이며 엔크리드 곁에 섰다.

“난 보조만 해도 되겠지?”

토레스의 물음에.

“발만 묶어 줘.”

엔크리드가 답한다.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엔크리드는 제 능력을 증명하고자 했다.

핀과 남은 정찰대원 몇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들에게도 전투는 일상이었다.

다만, 날쌘 몸놀림의 구울 열 마리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다.

손톱에서 솟는 독에 당하면 그거로 이미 전력 손실이지 않나.

“이봐.”

핀이 말리려고 말했으나, 엔크리드는 이미 코를 씰룩이는 중이었다.

‘썩은 내.’

후각을 예민하게 만드니 구울이 오는 쪽이 대강 어느 방향인지 알 듯했다.

이렇게 하면 사냥도 할 만하려나?

냄새와 귀로 사냥감을 찾으면 될 듯한데.

어쨌든.

지금은 구울을 벨 때였다.

엔크리드가 땅을 박찼다.

“어, 야!”

그 뒤를 핀과 토레스, 정찰대원이 우르르 쫓았다.

엔크리드의 태도와 행동.

그 모든 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 죽든 살든, 돕든 말든.

일단 가서 보고 싶었다.

과연 아침부터 제 몸을 자랑하던 저 작자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당연하게도 엔크리드는 제 할 일을 했고.

그걸 본 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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