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06화 (106/170)

106. 피하고 또 피해

레오나 로크프리드와 헤어졌을 때다.

보더 가드의 성벽 앞에서 매티스란 호위 무사는 주변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그건 분명 의도적이었다.

기세라는 거였다.

“살기는 기세가 됩니다. 육감이 열리면 할 수 있습니다. 쉽습니다. 아, 소대장한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군요.”

미친 작센 새끼.

하여간 말이 맵다. 혀를 대장간에서 주조한 건지.

말속에 칼이 있다.

그렇다고 엔크리드가 그걸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그저 미친 새끼라 말하고 넘어갈 뿐이다.

결론적으로 작센의 말이 맞기도 했으니까.

육감이 열렸고.

고양이를 잡는 의뢰에서 이미 기세 비슷한 걸 써 봤음에도 몸에 붙이기는 어려웠다.

그걸 이번에 다시금 익히긴 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나니 생각보다 쉽게 되기도 했고.

그래서 결국 써먹지 않았나.

토레스와 핀에게 조심 좀 하자고 말할 때, 엔크리드는 기세를 올려 말했다.

그리고 지금.

“옆으로 빠져, 나머지는 내가 유인한다.”

“뭐?”

핀이 반응하고.

“무슨 개소리야?”

토레스도 반응했다.

핀은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토레스라고 크게 다를 건 없으니, 서로 목숨 걸고 지켜 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씹, 레인져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둘은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

핀과 토레스의 눈이 반짝였다.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이었다.

그래, 너희 둘 다 참 괜찮은 인간이구나.

그건 알겠는데.

“좀 꺼져라. 방해된다.”

엔크리드는 매몰찼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도 없고.

다른 오늘에서 설명도 해 봤으나.

둘 다 진드기라도 된 것처럼 안 떨어졌다.

“……이게 왜 멋있냐.”

그러더니 핀이 중얼거리고.

“이 새끼가?”

토레스가 핏대를 세웠지만, 그래도 둘 다 말은 알아듣긴 했다.

엔크리드는 진심이었다.

“최대 가시거리에서 대기했다가 일이 끝나면 합류해. 생각이 있다. 다 살아남을 수 있어.”

숫제 명령조다. 몇 번 해 본 일, 설명보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게 더 낫다.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도 없었고.

곧.

“나중에 보자.”

토레스가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말하곤 먼저 옆으로 샜다.

그 뒤를 핀이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따라갔고.

엔크리드는 떠나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 따로 떨어졌음에도 장창을 든 적병 모두가 자신을 쫓아와야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엔크리드는 슬쩍 뒤를 한 번 보곤 외쳤다.

“로-저, 투구를 벗어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듣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말.

“로-저! 제 머리카락을 먼저 죽여 하늘로 보낸 이여!”

음유시인이 시를 짓듯, 엔크리드는 소리 높여 외쳤다.

일흔여덟 번의 오늘 중 로저가 어떤 인간인지 들은 적도 있었다.

핀과 사이가 나쁜 건 다른 이유긴 하지만.

그는 투구를 벗지 않는 지휘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었다.

그게 참 인상적이었다.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그의 머리 위에는 사막이 있었고.

그건 그의 치부였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불모지를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가!”

처음에는 이게 먹힐까 싶었다.

확인이야, 쉬웠다.

다른 오늘에서 로저에게 잡혔을 때, 우연히 놈의 투구를 벗겼고.

“대머리였나.”

이 한마디에 로저의 눈깔이 돌아가는 걸 봤다.

결론만 말하면 핀에 대한 원한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했기에.

‘좀 미안하긴 하다만.’

엔크리드는 괜히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제 존재를 보이니.

“저, 씨발 새끼가?”

로저의 눈깔이 돌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잡히면 정말 곱게는 못 죽을 터였다.

고문이 기본이 될 터.

그러니 잡히면 안 될 일이다.

엔크리드는 달렸고, 핀과 토레스가 빠지는 걸 보고서도 로저는 명령했다.

“저거 잡아 와!”

분노에 찬, 장창병 스물아홉 명이 내달렸다.

지금이야 흥분해서 저리 외쳐도 저 상태라면 금세 인원을 나눠 핀과 토레스의 목에도 창을 푹 쑤셔 넣고 싶어질 터.

‘슬슬.’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엔크리드를 중심으로 장창부대의 반대편, 마물의 하울링이 울렸다.

아우우우우우우!

듀얼문이 뜬 날이기에 주변이 밝았다.

달빛이 가시거리를 확보해 주기에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마물의 모습이 너무도 선연히 보였다.

두 다리로 땅을 차고 내달리는 늑대 대가리의 마물, 라이칸스로프다.

“후.”

그걸 본 엔크리드는 숨을 한 번 내뱉는 거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멈췄다.

여기서 승부수다. 장창과 라이칸 새끼들을 전부 묶어야 하니.

‘날 봐라.’

기세를 뿜는 법.

그건 전신에 상대를 죽이기 위한 마음을 담는 것.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베어 죽일 수 있다고 마음먹는 것.

츠르르릉.

검집에 꽂힌 그립을 잡고, 천천히 당긴다. 칼날이 달빛을 반사하며 모습을 드러내며.

엔크리드는 오른발을 반걸음쯤 내밀고 전신으로 말했다.

지금 다가오면 베겠다.

기세, 살기, 투기.

말로 표현하면 이 셋 중 하나가 분명한, 무형의 압력이 퍼져 나갔다.

달려드는 모든 장창부대도, 달려드는 라이칸스로프 놈들도 옆으로 빠진 토레스와 핀을 잊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

그 기세에 이끌려 늑대인간 무리와 장창부대가 달려들었고.

그 중심에는 엔크리드가 있었다.

그게 마치 자살 행위처럼 보이긴 했다.

* * *

로저는 슬슬 짜증이 나는 중이었다.

살쾡이 같은 년 하나 잡으면 끝날 일이 묘하게 꼬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놓쳐야 할까?

아니다. 잡아 죽이고 싶었다.

제 동생을 죽인 년 아닌가.

“시발, 쫓아.”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 엔크리드의 외침이 터졌다.

‘투구를 벗어라’부터, ‘불모지’까지.

두근, 심장이 뛴다. 분노가 차올라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저 시발 새끼가?”

그는 결심했고 각오했다.

저 개새끼를 잡으면 고이 죽이지 않기로.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리라.

순간 이성이 날아가 외치며 쫓으라 하고.

로저 본인도 내달리던 때.

아우우우!

마물의 하울링이 터졌다.

로저는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늑대인간 무리를 보는 순간,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씹.’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

‘저 개자식.’

제 머리털을 두고 시라도 읊듯이 조롱한 놈 때문이다.

저 새끼의 조롱 때문에 순간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개 같은.”

로저는 늑대인간을 보고서 욕설 한마디를 뱉는 거로 마음을 추스르고자 했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그럼 어쩔까?

고민은 짧았다.

‘죄다 죽여 버린다.’

렛샤인가 뭔가 하는 년이 애지중지하든 뭐든, 마물 따위야.

진형을 갖추고 싸우면 콜로니를 이룬 라이칸스로프 무리라고 해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하려던 때다. 마음먹고 입을 열려던 때.

그 순간.

쫓던 놈이 후- 하고 숨을 내뱉더니 멈춰서 검을 쥐었다.

검을 쥐었고, 몸으로 말했다. 기세로 말했다. 살기로 말했다.

‘다가오면 벤다.’

로저의 눈에 주변 배경이 지워지고,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놈 하나만 남았다.

그의 눈에도 이랬으니, 다른 병사에게는 어땠겠나.

진형이고 뭐고 간에, 기세에 말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멈추란 말이 없었기에 전면에 선 창병은 하던 대로 했다. 적이 보이면 싸우는 것, 그게 그가 하던 일이니.

그렇게.

붕!

힘껏 창을 찌르고.

아우!

파칵!

그 창날을 막 다가선 늑대인간의 손톱이 쳐 냈다.

늑대의 울음과 손톱과 창대가 만드는 불협화음.

그 소리에 로저의 머리에 차가운 한줄기 이성이 돌아왔다.

‘아차.’

진형도 제대로 짜지 않고 덤볐다.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아니, 적이 자신의 약점을 놀린 탓도 있다.

거기에 기세, 그 기세도 문제였고.

꼬이고 꼬인 탓에.

난전의 시작이었다.

* * *

훅.

엔크리드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건 늑대인간이었다.

놈의 손톱이 목을 노렸다. 크게 휘두른 팔 동작을 보며 엔크리드는 뒤로 물러났다.

“후.”

호흡을 고른다. 숨을 헐떡이면서 버틸 순 없다.

지금부터는 낭떠러진 사이에 있는 외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심은 물론이고.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길이 됐다.

그럼 필요한 건 무엇인가.

‘대담함과.’

야수의 심장이 뛴다.

두근.

달려든 늑대인간 무리도 옆으로 파고드는 장창부대도.

사방에 적뿐이고 휩싸인 상태지만.

마음 졸일 이유가 되진 않는다. 하물며 자신이 만든 전쟁터 아닌가.

‘그럼, 다음은?’

감각의 날을 세운다. 오감을 넘어 육감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뒤에서 날아오는 발톱이나 창날도 피해야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왼발을 앞으로 빼며 검을 옆으로 휘저었다.

힘 있는 칼질은 아니지만.

티디딩!

바로 옆에서 달려들던 늑대의 발톱을 막기에는 충분했고.

왼발을 축으로 옆으로 도는 북방식 패싱 스텝을 밟았다.

본래라면 여기에서 중검식 내려치기로 제 등을 찌른 놈의 팔이나 무기를 부수는 게 순서지만.

‘다시 앞으로.’

그 대신 몸을 구부리듯 숙였다.

붕!

머리 위로 늑대의 발톱이 스친다.

어느새 엔크리드는 눈을 반만 떴다.

시선도 흐릿했다.

누가 가까이에서 본다면 육지에 올라온 생선 눈깔 같다고 할 터였다.

‘집중.’

한 명에게 집중하는 대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엔크리드가 택한 방식이다.

‘더 넓게.’

집중력의 칼날을 세워 퍼트린다. 몸을 중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범위까지.

전투의 승패는 판단, 거리, 시간, 위치에 따라 판명 난다.

순간에 판단하고.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발이 움직이는 시간과 적의 무기가 도달하는 시간.

자신의 검이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시간을 가늠하며.

현재 선 곳과 앞으로 설 곳의 위치를 인지한다.

그것으로 엔크리드는 이곳에서 홀로 춤을 췄다.

따당.

가끔 늑대인간의 손톱과 그의 칼날이 만나기도 했고.

창날이 갬비슨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기도 했다.

목 바로 앞을 스치는 손톱도 있었고.

발등을 밟으려는 적도 있었다.

엔크리드는 누구도 베지 않았다.

바짝 붙어서 발등이 밟힐 뻔할 때도 어깨로 툭 상대를 밀었을 뿐이다.

그 결과가.

“끄억!”

병사의 단말마로 이어졌을 뿐.

밀린 병사의 목덜미를 늑대인간이 콱 깨물었다.

파바박 하고 피가 튀며 마물의 얼굴에 핏자국을 남겼다.

꼭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시 피하고 또 피한다.

크르릉!

늑대인간이 어깨를 물어뜯으려 할 때도 주저앉아 피했고.

딱!

마물의 이빨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며 놈을 뒤로 밀어냈을 뿐이다.

그게.

퍼퍼퍼벅!

끄게에엥!

엔크리드를 노렸던 늑대인간의 뱃가죽에 창이 꽂히는 결과가 됐을 뿐.

공격이 아니라 회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며 전장의 중심이 아닌 외곽을 돌며 슬금슬금 빠져나가니.

늑대인간은 당장 장창을 든 인간 무리를 죽여야 했고.

장창부대는 당장 늑대인간 무리를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그리 멀리 가지 않은 토레스와 핀의 눈에도 보였다.

“……저거.”

“미쳤어, 미친 거야.”

토레스와 핀이 번갈아 떠들었다.

둘은 상황도 잊은 채 발을 멈췄고, 눈은 한 명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바빴다.

엔크리드는 피하고 또 피했다.

가끔 창대에 맞고 손톱이 그의 몸을 할퀴긴 했지만.

가까스로 피하긴 했다. 치명상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앙에서 기세를 끌어올리고 몇 마디 말로 그가 만들어 낸 걸 보라.

마물 무리와 정예병의 싸움이 난전이 됐다.

“인간 쪽이 이길 것 같은데.”

그래도 정예는 정예.

진형이 무너지긴 했으나, 부대원은 서넛씩 뭉쳐 서로의 뒤를 봐줬다.

그거로 뛰어오며 소실한 체력 일부를 회복하고.

방패로 막고 찌르는 그룹을 만들어 대항했다.

그게 주효했다.

그러자, 로저가 움직였다.

그는 혼자 늑대인간 서너 마리를 상대하면서 한 마리의 머리통에 창을 꽂아 죽였다.

장창 대신 단창을 들고 날뛰는데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저거, 그냥 놔두면.”

놈이 그대로 엔크리드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핀은 안 봐도 저놈의 눈에 독기가 가득하리란 걸 알았다.

머리털로 놀리면 광분하곤 했으니.

“미친 새끼.”

“도우러 가야겠다.”

핀의 중얼거림에 토레스가 결심하듯 외쳤고.

그사이 로저라는 적 지휘관이 무섭게 돌진하더니, 엔크리드를 향해 단창을 찔러 넣었다.

“아.”

핀이 그걸 보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눈에는 엔크리드의 옆구리 푹하고 뚫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씹. 아니야, 피했다.”

토레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착각이었다.

창대를 옆구리에 낀 거다. 피하다 말고 팔뚝과 옆구리로 상대의 무기를 잡은 거였다.

가까스로 피한 거로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이기도 했고.

적어도 토레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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