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31화 (131/170)

131. 전장의 향방을 바꾼 건 한 번의 대련이었다.

렘은 신이 났고.

라그나는 자극을 받아 의욕을 불태웠다.

아우딘은 엔크리드와의 대련에서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주를 향한 기도는 언제나 물음이었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주는 침묵을 무기로 삼으니.

그 침묵 안에서 답을 찾는 건 우리의 몫이리라.

다만, 가끔 아주 가끔은 신이 답을 준다고 믿었다.

그분께서 육성으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무언가 다른 것을 통해서 표현하시니.

그날의 대련을 통해, 아우딘은 엔크리드에게서 그 답을 들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저리 노력한다고 저 남자가 무엇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의 노력은 결실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한 인간의 노력은 자신이 가진 오래된 화두에까지 닿는 데 금방이었다.

‘약자를 보호하라 했음에도 왜 그들을 지키지 않으십니까? 왜 노력이란 대가를 그들에게 베풀지 않으시나이까.’

강과 약, 선과 악.

오래된 화두들.

왜 자신이 ‘악’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득세하고.

‘선’이라 생각한 이들은 고통받는가.

선한 약자와 선한 강자가 무너지는 걸 보았고.

신이 만든 터전이자 요람이라는 신전에서 악이 득세하는 것도 보았다.

그걸 왜 신은 보고만 있는가.

어째서 징치하지 않는가.

이단 심문관이란 이들은 왜 힘없는 이들만 수레 위에 가시로 묶는가.

그걸 신은 왜 또 보고만 있는가.

그 와중에 강물을 마셔서 없애겠다는 식의 무모한 노력으로 살아가는 남자가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 오롯이 선 채로, 날마다 아침에 해가 뜨듯 그리 변하지 않은 채로.

신이 있다면 답을 전해 줘야 할 것이다.

저리 자신을 불태우고 사는 이를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신의 개입이 있었을까.

모른다. 아우딘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없었다고 해도 상관없으니.

엔크리드를 알고, 함께 지내 온 나날, 아우딘도 배운 게 있었다.

‘질문은 내 안에.’

‘답’도 자신 안에 있었다.

그는 대련을 통해 자신의 질문에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후련함이 가슴을 채웠다.

이 기분 그대로 적병 몇의 머리통을 으깨도 괜찮을 정도로.

이로써 엔크리드와의 대련에 아우딘까지 나서게 한 셈이었다.

렘도 나서게 했고, 라그나도 나서게 했으니.

이전에도 몰랐고, 이후에도 아무도 모르겠지만, 지금 전장의 향방을 바꾼 건 엔크리드의 어떤 치열함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와의 대련이 소대원 전부의 마음을 흔들어 전장에 내놨으니.

‘주여, 오늘 그대의 곁에 머물 이들을 보내나니.’

살생은 죄가 될 수 있으나.

또한, 죄라 할 수 없기도 했다.

모든 종교는 시대를 반영하는 법이었고.

그건 아우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은 살생을 꺼리지 않았다.

즉 필요하다면, 할 수 있었다. 힘을 아끼지 않고 주의 곁에 주를 모실 이들을 보낼 수 있었다.

아우딘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군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행운의 여신께 동전을 받은 자들은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아우딘은 자애와 자비를 보였다.

안개 때문에 고작 눈앞이 보일 뿐이다.

적군 중 하나가 아우딘을 보고 비웃었다.

“우리 쪽 거인을 보고 흉내라도 내는 거냐?”

어찌 보면, 그리 보일 법도 했다. 아우딘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불쾌하거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상대를 신의 곁으로 보내 용서를 빌 기회를 주면 될 일인데, 화내서 뭐 하리.

이 순간, 한 인간의 불쾌함이 끼어들 이유는 없으리라.

“전 굳이 다른 존재를 가장하진 않습니다. 형제님.”

“시발, 형제는 무슨.”

서너 걸음을 두고 적군과 대치한 상태다. 아우딘은 천천히 숫자를 셌다.

“다섯.”

그 숫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뭐라는 거야! 죽엇!”

거인의 등장으로 시작된 전장이다. 열기가 병사에게도 닿았다.

앞서서 대거리한 아즈펜의 병사가 창을 찔러 넣었다.

툭.

아우딘은 그 창날을 손등으로 밀었다. 부드럽게 바깥으로.

손등을 따라 창날이 힘의 방향성을 잃었다.

적병은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다가 균형을 잡았다.

“넷.”

아우딘은 마저 숫자를 셌다.

“이 개새끼가?”

상대가 부린 손짓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병사는 손짓했다. 그는 분대를 이끄는 위치였다.

곧 그의 분대가 아우딘을 포위했다.

창은 보병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들의 창날이 전부 아우딘을 겨눴다.

열 명이 겹겹이 한 명을 노리는 판이다.

“셋.”

아우딘은 그걸 보고서 숫자를 셌다.

“단단히 미친놈이구나.”

말하면서도 분대장은 기분이 개 같았다. 등 뒤가 찌릿했고, 배가 살살 아렸다.

아까 그건 뭐였지?

무슨 창날을 맨손으로 툭 쳐 낸단 말인가?

손에 뭘 꼈나? 얇고 흰 장갑을 끼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전투용 건틀렛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나저나 손이 심하게 큰데?

“둘.”

생각하는 사이, 숫자가 줄었다.

분대장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퉤, 죽여.”

명령이 떨어지고.

“하나.”

아우딘의 입에서도 마지막 숫자가 나왔다.

이건 그러니까 마지막 배려 같은 거였다.

행운의 여신의 동전을 주운 놈이라면 물러나라는 자비이자, 자애.

‘오늘만큼은.’

전신(戰神)의 부름을 받기로 했으니.

전신의 사도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정도는 아니다.

아우딘은 적군 쪽에서 거인과 비슷한 그런 상대가 나오길 바랐다.

기왕 전신의 이름을 팔기로 했다면, 제대로 싸우고 싶다는 투쟁심은 그에게 당연한 거였으니.

“그럼.”

날아오는 창날 사이, 무덤덤한 한마디.

‘하나’, 떨어진 말과 동시다. 아우딘은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애병이라고는 할 순 없었다.

애병은 신전을 떠나며 두고 왔다.

이건 그러니까 그저 대용품이었다.

기름 먹인 나무 몽둥이였다. 징을 박아 넣지도 않았고, 쇠로 만든 것도 아니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붕.

창을 찔러 넣은 적군의 눈에는 아우딘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뒤로 허리를 꺾어 반쯤 눕다시피 창을 피한 것뿐.

세 명이 동시에 창을 내질렀는데 전부 가슴팍을 노렸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유연성을 보여 준 아우딘이 발바닥으로 땅을 밀며 일어났다.

그러며 가볍게 몽둥이를 한 번 붕.

떠더덕!

반원을 그리며 휘두른 몽둥이질 한 번에 창대 세 개가 우측으로 와르르 밀려났다.

“어어어!”

창을 든 병사 셋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 자세가 무너지는 사이, 아우딘이 다시 한 걸음 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적병의 머리 위로 몽둥이가 떨어졌다.

퍽!

한 방에 머리통이 하나.

붕, 퍽! 붕, 퍽!

한 방에 하나씩, 셋의 머리통이 터졌다. 순식간이었다. 아우딘은 덩치와 별개로 다람쥐같이 재빨랐다.

“……어?”

그다음도 비슷했다. 창이 날아오든, 쓰로잉 나이프가 날아오든, 대강 피하거나 잡아채서 도로 던져 준다.

이후, 다가가 몽둥이로 머리통을 때리면.

퍽 하고 호박 터지듯 머리통이 터졌다.

아니, 호박보다 머리통이 더 부드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나우릴리아의 병사가 혀를 내둘렀다.

“괴물이잖아.”

피하고 때린다. 그럼 이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저렇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퍽-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터진다.

처음에는 몽둥이 두 개로만.

이후 상대가 화살을 쏘고 덤비기 시작하자, 발도 쓰기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무슨 돌격하는 기병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다가가는 족족 튕겨 나간다.

“하하하하!”

그러면서 아군의 괴물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전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그리고 또 저리 외친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 같았다.

물론 저걸 보는 나우릴리아 병사에게는 안도감이 들긴 했다. 저 미친놈이 아군이니.

“전원 돌겨어어억!”

상황을 파악하는 건 지휘부가 빨랐다. 바뀐 흐름에 따라 전군이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아우딘은 그대로 적병 한가운데에서 날뛰었다.

“이놈, 어딜!”

그 와중에 그레이 독에서 난다긴다하는 재주꾼이 몇 덤비긴 했다.

다만.

“어서 오십시오! 형제님!”

아우딘은 몽둥이를 속임수로 슬쩍 내밀었다가 거둔 뒤, 왼발을 축으로 허리를 틀며 발을 뻗었다.

통나무와 같은 허벅지와 일체를 이루는 발차기다.

뻑!

우지지직!

가벼운 중단 차기가 상대의 몸을 반으로 접는다.

무슨 발차기가 이런 위력인가.

발에 뭐 쇠로 만든 각반이라도 달아 두고 다니는 건가.

그 한 방에 인간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접힌 뒤엔 내장 파열로 죽었다. 얼굴 실핏줄이 다 터지고 눈깔이 빨개졌다.

얻어맞은 상대는 한쪽으로 날아가 적병 무리 서넛을 넘어뜨렸다.

“시발, 뭔데.”

적병이 보기에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아우딘은 개미굴처럼 싸웠다. 다가오는 모든 걸 잡아먹는 그런 개미굴이었다.

* * *

요정 중대장은 다가오는 상대를 직시했다.

상대도 요정이었다.

이런 곳에서 동족을 만나 싸우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예전처럼 숲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요정이 몇이나 된다고.

폐쇄적인 사회는 무릇 도태되고.

도태되면 잊힌다. 신도, 요정도 전부 잊힌 채로 살다가 결국 침략의 손길에 집을 내주게 되겠지.

선대의 요정 중 누군가의 선택은 후대의 삶을 바꿨다.

그중 제 나이들을 크로나와 교환하는 이들도 있었다.

용병 또는 다른 대가를 받기로 하고 군부에 몸을 담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니까 요정 중대장, 시나르는 상대나 자신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크로나가 목적이든,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든.

어쨌든, 적으로 마주한 순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바늘검이냐?”

잎새검은 나이들.

끝이 뾰족한 찌르기 전용검인 바늘검은 니들.

요정족의 전용 무기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마주한 두 개의 무기라.

“동족이 있었군.”

아즈펜의 요정은 눈매가 날카로운 남성이었다.

머리칼은 짧았고, 입매는 고집스러워 보였다.

뭐, 요정 대부분은 고집쟁이인 편이다. 그건 요정인 시나르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으니까.

상대의 검 끝이 붉었다. 그 끝에 묻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둘을 두고 원을 그리듯 물러난 부대다.

한쪽은 중대장이고.

다른 쪽은 군대에서 준비한 비장의 칼이었다.

“도망가면 쫓아가서 죽이진 않으마.”

남성이 말했다. 붉게 물든 그의 니들을 보며 시나르도 자신의 검을 뽑았다.

티리링.

나이들이다. 잎새검.

“내가 먼저 할 말이었는데.”

곧 둘이 검과 검을 나눴다.

승부는 길지 않았다. 니들을 든 요정보다 시나르가 몇 수는 위였다.

재능, 실력, 경험, 노련함.

그 어느 하나도 남자 요정은 시나르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몇 번의 검격 끝에 잎새검의 칼날이 남자 요정의 목을 스쳤다.

서걱!

손에 남은 느낌을 통해 시나르는 상대의 죽음을 확신했다.

제 목을 움켜쥔 요정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걸 본 시나르는 꽤 불쾌했다.

‘개자식들이네?’

이건 미끼였다.

진짜는 이다음이었다.

이 작자와 싸우는 사이 자신을 노리는 살기가 셋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미끼를 통해 시선을 끌고 뒤를 치는 수법.

지휘관 암살을 이런 식으로 해 온 거다.

이들의 목적은 너무도 뻔했다.

여기서 변수라면, 죽기 직전까지 이놈의 아군이 오지 않은 것뿐이다.

그렇기에 눈을 부릅뜨며 죽은 거고.

‘추잡스럽긴.’

물론 전장에서 추잡함이란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성공한다면 말이다.

운 나쁘게도 적군은 추잡함을 보여 줄 기회를 잃었다.

살기가 있었으나 지워졌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하나는 적이 지레 포기하고 도망갔거나.

또 다른 하나는 외력이 개입했거나.

답은 후자였다.

제 검을 슥슥 시체의 옷에 닦는 남자가 보였다.

갈색의 눈 안에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

눈동자와 비슷한 적갈빛의 머리칼.

적당히 기른 머리칼에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아니, 요정 중대장, 시나르는 저 작자가 피 칠갑을 한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깔끔했다.

아, 창부랑 어울릴 때는 옷차림이 엉망이긴 했지.

그런 것도 본 적이 있긴 했다. 막 여성과 일을 치르고 나오는 모습이었다.

“여긴?”

“할 일이 없어서.”

중대장의 말에 작센이 답했다.

작센이라고 뭐 다를까.

엔크리드를 보고 있자니, 그의 성장이 못내 기꺼웠다. 곁에 있으면 그걸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했다.

입이 근질거렸다. 덩달아 손도 근질거렸다.

어딘가에선 이런 걸 풀고도 싶었다. 마침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놈들이 나선 듯했으니.

안개를 뚫고 나선 작센은 그대로 요정 중대장의 뒤를 따랐고.

암살자 셋의 멱을 땄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요정이었고 일반인 기준으로 보자면 실력이 뛰어나다 할 수 있지만, 작센 개인의 심정으로는 뭐, 그저 그랬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상대라기보다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싸우는 형태이니.

어찌 보면 작센이 가장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네 대장은 그냥 두고?”

요정의 물음에 작센은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이런 곳에서 죽을 거면 죽어도 진즉에 죽었을 겁니다.”

극찬이었다.

엔크리드를 믿는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

이제는 지켜보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다음에는.’

걸음이 아니라 다른 걸 가르쳐 봐야 할 터였다.

감각을 갈고닦으면 그다음 훈련이 뭐였던가.

육감의 문을 열었다면.

‘잘 보고 반응하고.’

여전히 시간과 공을 들여야 몸에 익는 것들.

이런 걸 제대로 가르친 적이 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후.”

작센은 생각하는 와중 자신이 왜 이리 진지한가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안 가르쳐 줘도 되는 건데.

요정 중대장이 그걸 보고 말했다.

“이번 대대장은 머저리가 아니다. 흐름을 보고 싸울 줄 알지.”

부대가 움직이지 않아서 한숨을 쉰다고 생각했던가.

그런 건 아닌데.

워낙 속내를 잘 감추는 작센이다.

요정 중대장은 그의 한숨을 오해하지 않았다. 저 미치광이 소대가 이런 일에 관심이나 있을까.

다만, 눈앞에 작센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암살자 셋을 죽임으로 실력을 선보이며.

중대장의 말은 흐름이 바뀐다는 얘기였다.

그녀의 말은 작센이 아니라 주변 병사의 귀에 꽂혔다.

기세가 변할 것이고, 그건 아군의 승리를 불러올 것이라는 말이다.

“전군 대형 갖춰.”

그녀의 말에 호위대로 따라왔으면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한 다섯 명의 중대원이 그녀의 뒤에 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뿔 나팔이 울리고 전령이 뛰었다.

그녀의 말대로.

마커스는 흐름을 탈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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