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무르익은 심장 (1)
마커스 대대장의 지휘 아래, 보병대는 막사를 새로 지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전진한 위치.
엔크리드는 그 위치가 애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막사를 구축하고 진지 위치를 정하는 건 지휘관의 책임 아닌가.
무엇보다 마커스란 작자가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지도 않을 것 같고.
자신을 향해 전투의 최고 수훈자라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냐-
그리 진지를 옮기자, 에스터가 투정을 부렸다.
냐아, 냐아.
연신 투정이다.
‘생각해 보면 얘도 좀 이상하지 않나.’
영물이긴 한데, 뭔가 묘하게 이상한 동물이다. 막 사람 같기도 하고.
에스터가 주둥이를 열어 말하는 게 언제부턴가 귀에 딱 꽂히는 그런 느낌이니.
그러니까 얘가 뭐라고 말하면 그게 사람 말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은.
“귀찮다.”
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투정을 부리기에 품에 안았다.
처음 전장에서 봤을 때는 작디작았던 표범이었고.
다시 봤을 때, 그러니까 미치 휴리어를 찌르고 콧수염 검사에게서 자신을 구했을 때는 조금 컸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는 크질 않았다.
품에 안을 정도, 딱 여기서 멈췄다.
그런데 이런 표범이 내 목덜미를 물어 끌고 달렸다. 무척이나 빠르게.
그건 무슨 힘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너도 괴력의 표범이네.”
엔크리드가 품에 안은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캬!
그리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나 보다.
에스터가 엔크리드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나진 않았다. 자국만 남았지.
만약 진심이었다면.
‘손가락이 뎅겅 했겠지.’
괜히 에스터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자세히 주둥이를 보고 있자니, 에스터가 눈을 흘겼다.
자꾸 이러니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가시죠.”
밖에서 크라이스가 불렀다.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는 건 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숙영지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보급로도 확인해야 하며.
경계 지역을 새로 정하고 정찰대의 루트를 다시 짜야 하고, 바꿀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기어코 진지를 새로 구축한다니.
“근데 소대장, 싸움은 내가 제일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어째 환호는 소대장만 받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우?”
아니, 착각은 아니다.
묘하게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미치광이 소대 만세, 엔크리드 만세.
새삼 그 순간, 그러니까 겨우 이틀 전의 정오를 떠올리니, 가슴 어림이 간질간질했다.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음.”
엔크리드가 말을 아끼자, 곁에 붙은 아우딘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미친 형제님. 겨우 거인 하나 때려잡으니 그렇지요.”
“거인 하나?”
“형제님, 전 적병 수십을 때렸지요.”
때리기만 한 건 아니다. 때려죽였지, 무척 화끈하게.
엔크리드도 그걸 봤다.
그 무식한 몽둥이질을.
적병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안도를.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가까이서 지켜본 일부 아군은 아우딘을 보며 묘한 공포심을 느꼈다고도 했다.
벤젠스를 통해 직접 들은 얘기다.
“그, 네 소대원 중에 있잖아. 종교에 심취한 그 친구, 왜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거냐? 약간 이쪽이 이상한 거냐?”
벤젠스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톡 치며 했던 말이다.
엔크리드는 아니라고 말하며 아우딘 대신 적절한 변명을 남겼다.
너무 신실해,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게 너무 기뻐서 그런다고.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
라고 벤젠스가 중얼거렸지만.
엔크리드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살인을 사랑하는 미친 종교쟁이라고 하는 것보다야 백 배는 나은 것 아닌가.
“살검에 취한 용병 열 명, 놔뒀다면 치명적이었겠지. 음, 그랬을 거다.”
라그나도 끼어들자,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쪽에서 물끄러미 셋을 지켜보던 작센의 한마디가 그들의 귀에 꽂히니.
“멍청이들.”
세 명의 시선이 돌아갔다.
살벌한 공기가 오간다. 아찔한 압박감이 주위를 짓눌렀다.
언제 누구라도 먼저 손을 쓰면 한바탕 소란이 일 듯했다.
그러니까 본래의 미치광이 소대와 같았다.
엔크리드가 없을 때는 서로 간을 보기도 하고 적당히 선을 지키기도 했던 이들의 입이 거침없이 열렸다.
크라이스는 그러려니 했다. 아찔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아, 물론 엔크리드가 없었다면 곤란하긴 했겠지만.
지금은 함께 움직이고 있지 않나.
옆에서 보는 앤드류는 고민했다.
‘나서야 하나?’
자신이 분대장 아닌가.
소대장이 나서기 전에 분위기를 정리해 볼까?
앤드류는 고민만 했다. 이렇게 나서다가 그동안 얻어맞은 기억이 그의 발을 붙들었으니.
마침 맥이 소매를 붙들곤 고개를 젓는다.
앤드류의 마음을 읽은 듯한 고갯짓이다.
엔크리드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기온이 달라진 하늘이다.
푸르렀다. 구름도 없는 하늘이다. 봄이었다. 날이 참 좋았다.
그러니.
“그만.”
싸움을 말리기 좋은 날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전처럼 몸을 비집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대신 검을 휘둘렀다.
치리링.
오른손으로 하나.
이어서.
티리리링!
왼손으로 하나.
오른손으로 뽑은 검은 위에서 밑으로, 정수리 베기의 형태로 내리긋고.
왼손으로 뽑은 검은 크게 휘둘러 중단 수평 베기다.
스텝은 왼발을 앞으로 밀고 오른발이 따라오게.
이건 그러니까, 며칠이나 고민하던 발검이었다.
발렌 식 용병검에서 나온 기술 중 하나를 변형한 거였다.
본래는 이중 발검이란 기술로 첫 번째 발검을 속임수로 삼는 걸, 두 개의 검을 다룸으로써 두 번의 칼질에 다 의미가 있도록 만들었다.
오른손에 든 검은 렘을 노렸고.
왼손에 든 검은 작센을 벴다.
퉁!
둘의 반응이 극명히 갈렸다. 렘은 도끼를 꺼내 막고, 작센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피했다.
검 하나는 막혀 멈췄고.
다른 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엔크리드는 허공을 가른 검을 갈무리하며 당겼다.
“무슨 짓?”
작센이 묻고.
“한번 해보자는 거요? 재밌겠네.”
렘은 콧김을 뿜었다. 퍽 즐거워 보이는 음성과 함께다.
갑자기 몸을 틀어내고 움직인 탓에, 품에 들어 있던 에스터가 팍 하고 가슴을 때렸다.
“가서 하자.”
엔크리드가 검을 든 채로 말했다.
이대로 싸우긴 우습지 않나.
에스터를 넣어 둔 바람에 가슴이 불룩한 채였으니.
도끼를 거둔 렘이 그럽시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라 할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검을 거둬 넣고, 다시 에스터를 달래고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만약 짐이라도 나르라고 했다면 그 짜증 때문에 더 사나워졌으리라.
엔크리드를 포함한 소대원 전원의 짐은 다른 병사에 비해 무척 가벼웠다.
“이번 전투의 영웅 아닌가, 마차를 내어줘도 부족하지.”
마커스 대대장은 화끈했다. 맨몸, 자신의 무장만 챙겨 걸으라 했다.
그 외 다른 부대는 각자의 짐을 더해 천막에 필요한 부속품을 짊어졌다.
자연히 걸음이 느려지기 마련이었으나, 마커스는 급할 게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엔크리드와 소대원이 일궈낸 소란에 주변 병사의 시선이 몰렸으나,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들이 다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엔크리드는 걸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강 그렸다.
이대로 적의 후방을 후려치려나?
그런 생각을 흘리며 크라이스에게 말하니.
왕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럴 겁니다.”
“왜?”
승기를 잡았다면 적의 후방을 치는 게 이득 아닌가?
“적의 진지를 차지하고 버티는 게, 전장을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갸웃.
왜 싸우지 않는다는 건가.
그게 왜 이득인가.
뒤를 잡았으면 쳐야 이득이지.
엔크리드가 크라이스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만약 이대로 적의 뒤를 치면 아군의 위치와 무력 정도를 전부 알려 주게 될 거고, 적군은 그에 대응할 겁니다. 적어도 이 정도 병력을 상대할 수준은 보내겠죠. 거인과 요정 암살, 용병 무리를 써서 준비한 수단도 막혔다면 그들이 꺼낼 수단이 뭐가 남았을 것 같습니까? 하물며 그레이 독이라는 독립 중대도 반파된 판에.”
뭐가 남았나, 질문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자니, 묘한 기분이 들 뿐.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피할 단어는 아니니.
“기사.”
“최소한 스콰이어급, 아니면 머릿수를 늘려서 들어올 겁니다. 뭐, 높은 확률로 소수 정예를 보내리라 생각하긴 합니다.”
말하는 크라이스의 눈이 빛났다.
이후 그는 엔크리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떠들었다.
“진입하기 어려운 지형의 이점도 이쪽이 차지했고, 이미 소수 특수 전력으로 상대했다가 깨진 탓에 본대 사기에도 영향을 줬을 테니까,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 주려고 할 겁니다. 물론 기사 또는 그와 비슷한 전력이 오는 게 무서워서 뒤를 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득의 문제입니다. 전장을 크게 보면, 그러니까 지휘관의 눈으로 보면 이득과 손해의 싸움입니다. 한쪽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쪽에서 크게 이득을 보면? 전투에서는 패해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대로 적의 뒤를 치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게 답입니다. 굳이 이쪽 병력을 소모하지 않고 뒤에 있다는 것만 인지하도록 두는 겁니다. 그럼, 적군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머리통이 복잡하긴 할 겁니다. 그리 복잡한 채로 본대가 밀고 나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싸울 필요도 없는 거죠. 하물며 본대를 맞이해야 할 아즈펜은 이쪽으로 병력을 돌릴 여력 따윈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입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건. 애매한 곳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도 같은 이유죠. 굳이 적의 뒤를 치겠다고 더 다가갈 필요도 없는 거니까. 만약 적군이 수작을 부린다? 그럼, 바로 내빼면 됩니다. 뒤로 물러났다가 하루 이틀 뒤, 다시 같은 장소를 점령하는 겁니다. 지금의 진지 구축은 그걸 위한 포석인 겁니다.”
엔크리드는 솔직함을 장기로 삼았다. 이제껏 분대원을 그리 대하기도 했다.
“짧고 굵게.”
반 정도는 알아들었고, 나머지 반은 제대로 머릿속에 박히지 않았다.
눈을 빛내던 크라이스가 숨을 몇 번 골랐다.
그래, 너 숨도 안 쉬고 입을 털더라.
숨을 고른 크라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어를 고심해서 고를 필요는 없었다.
“누가 뒤에서 뒤통수를 때릴 것처럼 손을 들고 있는데, 앞에서는 누가 대장의 양팔을 붙들고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개 같은데.”
“네, 상대가 그런 처지입니다.”
앞에서 제 손목을 쥔 걸 뿌리치고 뒤를 막으면 어떻게 되나.
앞뒤에 있는 놈이 동시에 손을 휘두르면 재빨리 앞도 막고 뒤도 막으면 된다지만.
그냥 버티고만 있으면, 이건 존재만으로 꺼림칙하게 만드는 상황이 되는 거다.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크라이스는 눈만 크고 소박한 야망을 지닌 일반 병사 같지 않았다.
귀부인 살롱을 차리는 게 꿈인 놈이면서 머리가 뭐 이렇게 잘 돌아가나 싶었다.
사실은 무슨 전략가의 숨겨 둔 아들 그런 건 아닐까.
또는 숨겨 둔 제자나.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서 적의 지휘관의 머릿속을 예측하고.
아군의 지휘관과 본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걸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예상이죠. 추측이고, 상대가 ‘아 씨 나 몰라 저거부터 죽이고 만다.’ 그러면 뭐 기사고 뭐고 간에 여길 치러 오겠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크라이스는 입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눈으로는 반대로 말했다.
묘한 놈이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싸울 일은 없다는 거네.
그걸 아는 거로 됐다.
그렇다고 이곳에 있는 게 무료하진 않을 테니.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는 건 다른 부대의 일이었다.
그들이 천막을 세우고 불을 피우고 솥을 올리는 사이.
엔크리드의 미치광이 소대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 자리를 잡자마자다.
“렘.”
엔크리드가 렘을 불렀다.
누가 먼저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암묵적으로 첫 번째는 렘이다.
안 그러면 저 그냥 미친 야만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적당히 달군 바위 위에 궁둥이를 걸친 채 앉은 라그나가 시선을 돌리고.
작센, 아우딘, 앤드류, 맥까지 전부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시작하자.”
엔크리드가 말하고 렘이 삐죽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지, 이게 내 소대장이지.
그런 웃음이다.
렘은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 드는 마음이.
이 작자가 여기서 죽지 않길 바랐다.
“미리 말해 두겠수. 죽을 수도 있수다.”
“얼마든지.”
죽음은 엔크리드에게 장애가 아니다.
그는 다시 오늘을 반복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찢고 구르고 바래고 사라진 꿈이 눈앞에 있다.
엔크리드는 눈을 빛냈다. 여전히 열정적이며 열망이 가득한 눈.
그 앞, 렘도 비슷한 눈을 보였다.
언제 이런 인간을 본 적이 있던가.
없다.
이 인간은, 이 대륙인은.
그야말로 미친 새끼였다.
렘은 낄낄 웃었다.
“좋수다. 합시다. 어디 한번 죽어 봅시다.”
렘이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것, 그러니까 거인을 상대로 보인 렘이 보였던 것을 배울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짜릿한 희열을 느끼면서도 되레 차분해졌다.
흥분과 평정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런 묘한 상태다.
이건 야수의 심장이 제대로 무르익었다는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