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견뎌야 했다.
“꼭 검 두 자루를 써야 하는 거요?”
대련이 끝난 뒤다. 렘이 물었다.
땀을 흠뻑 흘린 뒤였다. 물론 렘은 아니고 엔크리드만 몸이 젖었다.
“응.”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엔크리드다. 렘의 입이 열리다 말았다.
정확히는 엔크리드의 표정을 보고 이후에 나올 말을 삼켰다.
가령.
“이검류가 얼마나 병신같은 짓인지 설명해 드릴까?”
“검이 두 개가 되면 막 내 공격이 두 배, 이럴 줄 알았수?”
“헛짓거리하지 말고 얌전히 검은 하나만 드는 거요. 내 말 들으슈, 도끼로 그 파랭이 검을 쪼개 놓기 전에.”
이와 같은 말들을 말이다.
렘은 혀를 조절해 얌전히 입천장에 대며 생각했다.
뭐, 도끼도 선물 받았고.
엔크리드가 가져다준 도끼, 생각보다 품질이 좋다. 은은한 푸른빛은 양질의 철을 제대로 제련했다는 증거다.
발레리산 강철이 분명했다.
강도와 제련 상태를 보면, 이번에 받은 도끼는 꽤 오래 쓸 수 있을 듯했다.
퍽 마음에 드는 물건이란 거다.
그러니까.
‘놔두자.’
물론 도끼는 핑계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엔크리드의 표정을 보고 잔소리를 포기했다.
가끔 저런 얼굴을 할 때.
그러니까.
무슨 기사가 꿈이라느니, 오늘은 검을 휘두르기 좋은 날이라느니, 전장이건 뭐건 남는 시간에 훈련이나 하겠다느니.
그런 말을 중얼거릴 때마다 엔크리드의 얼굴에는 고집이 드러났다.
아니, 각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덤덤하긴 한데.
어쨌든 그 덤덤함을 필두로, 엔크리드에게는 어떻게 손댈 수 없는 선이 보였다.
자신에게도 그런 게 있을 터다.
이제껏 그런 선을 엔크리드만은 지켜 줬다.
‘하다가 스스로 손이 꼬이고 정체되고 말리고 그러면 뭐.’
그때 가서 관두겠지.
엔크리드를 향해 최근에 늦깎이 천재라느니, 나이 서른에 각성했다는 둥 말이 많았다.
‘그게 내 덕인가? 그래, 내 덕도 좀 있겠지.’
하지만 근본적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 보면 엔크리드 자신이, 스스로, 홀로 한 일이라고 해야 맞을 터다.
적어도 렘은 그렇게 생각했다.
엔크리드는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좌절하지 않았으며.
절망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기어서라도 앞으로.
새삼 그 말이 떠올랐다.
이런 것들 때문에 지켜보게 되는 건가?
아니면 자신과는 다르기에 지켜보게 되는 걸까.
자신은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난 방랑자이기에.
재능과 더불어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버렸다.’
돌아섰고 외면했다.
반면에 자신의 소대장은, 이 덤덤한 고집불통 소대장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건 그저 검.
날이 잘 선 검 한 자루,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걸었다.
그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 길을 걸을 자격이 무엇인지는 따지지도 않았으며.
힘든 길을 걷는다고 칭얼대는 법도 없었다.
스스로 택한 길이고, 스스로 정한 길이기에 그저 즐겁다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렘의 심경은 복잡했다.
하루 만에 괴력의 심장을 배운 것?
그거야 뭐, 놀라긴 해도 넘어갈 수 있다.
세상에는 천재란 게 존재하니까.
이런 짓을 제 소대장이 해서 신기하긴 하지만.
‘내가 직접 다 이끌어 줘, 시현해 줘, 상태도 봐 줘.’
이 정도면 흉내 정도는 내줘야 맞다.
다만, 그 삶의 태도만큼은 참 흉내 내기 어렵다.
생각의 끝, 입천장에 붙여 둔 혀를 움직여 말했다.
“난 소대장이 좋은 것 같수다.”
“……식사에 누가 약을 탔나?”
“패는 맛이 좋단 말이우.”
“어, 그래. 너답다.”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잠시 그런 소대장을 보고 있자니, 평소에는 삐죽대고 게으름이나 피우는 길치 새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련 끝?”
“난 널 존나 싫어하는 것 같다.”
렘이 온 마음을 담아 말했다. 이 말에는 어떤 오해가 생겨서 안 되기에 정말 진심으로, 진정으로.
엔크리드가 하듯 그리 말하자.
“어, 나도.”
라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포시 미소까지 띠며.
그도 무척 동감한다는 투였다.
라그나는 평소에도 곱상한 편인 얼굴인데, 미소를 짓자 더 짓이겨 버리고 싶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언제 나왔는지, 한쪽에서 팔짱을 낀 음흉한 들고양이 놈도 말을 보탰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내는 놈이 잘도 입을 놀렸다.
“형제님. 세상 만물, 모든 것은 주의 품 안에 있는 법입니다. 물론 주님은 인간이 가진 개인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 주시지요. 네, 저 또한 인간임에 주의 종이라 하여 어찌 마음을 숨기겠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
덩치 큰 종교쟁이 놈이 상의를 벗어젖히며 말했다.
그게 퍽 아니꼬웠다.
겉만 번드르르하지, 너 존나 싫다고 말하는 거랑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런 걸 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저리 말을 보태긴 했는데도.
렘은 괜히, 정말 괜히 기분이 좋긴 했다.
엔크리드란 인간을 보고 있자면 그리됐다.
그 신나는 기분 그대로.
그러니까 약간은 들뜬 채로 렘은 배려와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
“막둥아!”
앤드류는 렘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으나, 곧 당당하게 일어났다.
‘내 마음의 적을 크게 키우는 건 곧 내가 상대를 크게 보고 있음이요. 상대를 크게 본다는 건 시작하기도 전에 지겠다는 거다.’
다잡은 마음 그대로 앤드류가 검을 뽑았다.
스릉.
“새끼, 눈치는 빨라서 좋아.”
렘이 바닥을 즈려밟으며 앤드류의 앞으로 다가왔다.
날이 시퍼런 도끼가 어깨를 중심으로 진자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흔들리는 도끼날이 꽤 섬뜩했다.
“……중간에 살려 달라고 하면 개입하겠습니다.”
뒤에서 맥이 말했다.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집안을 일으키게 도와준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번번이 같이 렘과 맞서 주는 것까지.
그런데 맥, 왜 말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거야?
음? 그 정도로 물러나면 급한 순간에 돕기는 힘들지 않나?
너무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잘할 수 있습니다. 가드너 님, 당신은 가드너 가문을 일으킬 유일한 영웅이십니다.”
그걸 왜 그렇게 멀어진 채로 말하는 건데.
그리고, 왜 갑자기 가드너라고 부르는 건데.
평소에는 앤드류라고 하면서 가끔 말도 놓고 그러지 않았나? 그랬던 것 같은데.
맥은 그리 멀어지며 결국, 엔크리드의 근처까지 가서야 멈췄다.
이 소대의 미치광이들을 피하고 싶다면 유일한 안식처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저곳이리라.
앤드류는 안식처로 향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더불어.
이 미친 야만인과 붙으면 붙을수록 실력이 늘었다는 건 확실하니.
오늘이 아닌 내일을 위해.
제 소대장을 보며 배운 대로.
“붙어 보자, 오만한 야만인.”
“응? 팔 하나 잘라도 된다고?”
칙칙한 회색 눈이 진의를 담는다.
“지랄.”
앤드류는 발악했다. 발악만이 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엔크리드는 주저앉은 채로 봤다.
렘을 상대로 전력을 다했었다.
두 개의 검으로, 최선을 다했다.
괴력의 심장은 실제 제 양팔에 믿을 수 없는 힘을 줬다.
비약적인 근력의 향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검류라 할 순 없었다.
검 하나를 다룰 때보다 렘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단련의 부족, 그런 걸 느꼈다.
‘익숙해지지가 않네.’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굳은살이 가득한 제 손바닥을 봤다.
새삼 제 재능을 탓하는 건 아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을 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쉴 겁니까?”
눈앞에 답이 있었다.
라그나가 묻는다. 전에 없는 의욕을 보이며.
왜일까.
왜 자신한테만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절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그걸 너무도 잘 알기에 렘에게 걷어차여 멍 자국이 남을 게 분명한 허벅지에 손을 얹고 일어났다.
“아니.”
끄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라그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뽑았다.
“두 개로 할 겁니까?”
“응.”
라그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검 두 자루를 동시에 쓴다고 하면 렘도 라그나도 말릴 줄 알았는데.
둘이 아니라면 작센과 아우딘이라도.
하물며 이 정도로 어설프게 검을 쓰면 앤드류나 맥, 크라이스라도 뭐라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아무도 뭐라고 입을 열지 않는다.
참 희한한 일이다.
그래도 더 묻진 않았다.
대신 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을 더 바짝 조여서.
두 개의 검을 쓰는 가장 유용한 방식, 고민이 답이기에 고민했고 궁리했다.
그동안 놀고만 있진 않았다.
괴력의 심장을 몸에 붙이면서, 두 개의 검을 다루는 것도 함께 단련했다.
그런데도 어설프다.
깎아도 깎아도 대체 뭔지 모르겠는 그런 조각상 같았다.
그래서 엔크리드의 손은 바빴고, 어설펐으며, 난잡했다.
라그나는 그런 엔크리드의 검을 일일이 쳐 내고 렘과 비슷한 형태로 싸움을 끝냈다.
그러니까 압도적으로 승기를 취해 제압했단 거다.
“음.”
그러곤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후우, 후우, 하악.”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엔크리드는 오른손을 허벅지에, 왼손에 든 검은 바닥에 꽂고서 땀을 뚝뚝 흘렸다.
반쯤 허리를 숙이고 머리는 바닥을 향한 채다.
이마에 맺힌 땀이 코끝을 타고 흘러 바닥에 뚝.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무지막지한 단련?
그런 것치고는.
사지가 발발 떨렸다.
괴력의 심장, 일순간 근육의 한계를 깨기에 생기는 부작용이다.
라그나가 입을 다문 사이에 아우딘이 끼어들었다.
“무리했습니다. 소대장 형제님.”
슬쩍 고개를 들어 아우딘을 보니.
아우딘이 평소와 같은 미소, 고립의 기법을 할 때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뭐지? 저 표정은 보통 악마의 속내를 숨길 때의 표정인데.
“쉬셔야 한단 소리지요.”
“쉬라고?”
“고립의 기법도 하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
뭘까, 보통은 훈련을 더 못 시켜서, 더 못 괴롭혀서 안달이 나 있는 인간이었는데.
“전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죠.”
라그나가 혼자 생각에 잠긴 채 말하고.
엔크리드는 일어나려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아우딘이 그를 부축했다.
“들어가시죠.”
“오늘 우리 근무나 임무 없던가.”
“있어도 소대장 형제님은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런가.
엔크리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긴 했다.
괴력의 심장, 좋은 무기다. 좋은 기예고.
한순간 근력을 늘려 준다는 건, 곧 프록 같은 괴물과도 검을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 되기도 하고.
실력이 된다면 렘처럼 거인의 일격을 받아 낼 수도 있었다.
거인의 앞을 막아선 렘의 등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살짝 부러울 정도로.
그걸 봤으니, 괴력의 심장을 포기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우딘은 엔크리드를 부축했고.
“좀 씻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로도 엔크리드는 제 장비를 잘 여몄다.
“아니, 매일 뭐 그렇게 싸움만 합니까?”
괜히 옆에서 크라이스가 핀잔을 줬다.
그러면서도 바삐 손을 놀려 엔크리드를 도왔다.
“씻고 오세요, 제가 정비해 둘 테니.”
“내 걸?”
“제가 군대 흑빵만 몇 년째 먹은 줄 알고요? 장비 정비로 번 크로나가 얼만 줄 알고요? 어지간한 대장장이보다 제가 나을걸요?”
생각해 보면 그랬다. 가끔 여자도, 담배도, 그 외의 팔 것도 딱히 없을 때, 크라이스는 뭘 했나.
툭하면 다른 부대의 막사를 순회했다.
그의 장비 정비는 타 부대 병사와 쉽게 친해지는 수단이자, 부수적인 수입을 버는 재주였다.
제 무기를 애인처럼 다루는 놈들은 제외하면, 생각보다 무기 정비는 귀찮은 일임이 분명했다.
엔크리드 또한 제 무기가 소중했다. 검도 갑옷도, 다만, 크라이스는 믿을 만했다.
실제 씻고 오는 사이, 크라이스는 검에 광까지 내놨다.
“달빛 밝은 밤에 뽑으면 내가 있는 곳을 알리는 좋은 신호가 되겠다.”
“칭찬이죠?”
“응.”
“대장은 가끔 보면 칭찬도 참 뭐랄까, 대장답게 하는 것 같습니다.”
크라이스가 말했고.
엔크리드가 그게 뭐냐고 되묻기도 전에 아우딘이 다가왔다.
물기를 닦고 막 침상에 앉은 참이었는데, 아우딘의 덩치가 그림자를 만들어 가리자, 놀란 크라이스가 냉큼 뒤로 물러났다.
“뭐야, 아, 아우딘? 뭡니까?”
“소대장 형제님께 볼일이 있습니다.”
생긋생긋.
미소다. 곰의 미소, 덩치 큰 맹수의 미소, 또는 뭘 계획한 악마의 미소.
안 좋은데?
엔크리드는 생각했고.
곧 아우딘의 손이 엔크리드의 몸에 닿았다.
“무리하게 근육을 혹사하면 뭉치기 마련입니다. 그 뭉친 부위를 푸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번에 가르칠 기술이 되겠군요.”
가르침, 배움이란 말이 나오자, 수비적이었던 엔크리드의 태도가 변했다.
“뭔데?”
생긋.
이름 대신 미소.
역시 불길했고 불길함은 적중했다.
“끕, 끄으으으. 끄르르.”
아우딘의 손가락이 몸 여기저기를 누르고 비틀기 시작하자.
엔크리드는 격통을 느꼈다.
눈앞이 까매졌다.
검은 강의 뱃사공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죽음의 강에 발을 담갔다가 돌아온 듯했다.
그럴 만한 통증이 몸 전신을 후비고 누렸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법입니다. 제가 배울 때는 이걸 흔히 피, 땀, 눈물이라 했었지요.”
그게 기술 이름이냐? 절대 아닐 것 같은데?
다만, 지금은 물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짜릿한 통증이 다시금 전신을 치달림에도 말이 나올 틈도 없었다.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통증의 시간이 도래했다.
물론 그게 엔크리드의 몸을 망가뜨리는 종류는 절대 아니었기에.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