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여드레의 아침
발라프 식 지압법.
피, 땀, 눈물의 본래 이름이었다.
“그 발라프란 사람은 무투술과 지압 외에 또 뭘 만들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둔기술도 개발했지만, 그건 실상 형편없어 지금은 명맥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 외에도 성서 해독 등의 많은 문서를 편찬하셨습니다.”
발라프, 아우딘이 믿는 신전에서는 꽤 유명한 위인이었다.
전설의 영역, 그러니까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대부분은 모르는 이름이지만.
그가 모시는 신과 관계된 이들에게는 꽤 익숙한 이름이란 거다.
물론 이제는 엔크리드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꾹꾹 눌러 대는 아우딘의 손길.
처음에야 검은 강의 뱃사공과 함께 뱃놀이하러 갈 뻔했지만.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참다 보니 견딜 만했다.
“본래 처음에 가장 큰 통증 부위를 누르고.”
그렇게 말하며 아우딘은 또 한 번 생긋 웃었다.
“점점 더 낮은 통증을 주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음.”
“뭉친 근육이 풀리는 겁니다.”
몸이 노곤해진다. 두툼한 곰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근육이 올올이 풀어졌다.
이거 제대로 배워 두면 쓸 만하려나.
괴력의 심장으로 덜덜 떨리며 부하가 걸린 근육에 쥐가 난 듯했는데 그게 풀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통증도 가라앉는다.
“오늘은 이만 푹 쉬셔야 합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괴력의 심장이라, 제대로 익히긴 했는데.
무작정 써 버리면 몸에 부하가 걸린다는 거다.
엔크리드는 새삼 기사의 대단함을 엿보게 됐다.
그들은 이런 기예 없이도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난 이들.
껍데기는 인간이지만, 거인의 힘을 쓰고 프록의 운동 능력을 보여 주며 요정의 예민함 또한 갖췄다.
그런 이들이 기사다.
그리고 엔크리드의 빛바랜 꿈엔, 지금 서광이 슬며시 들이치는 중이었고.
“내가 검 두 자루 쓰는 걸 왜 아무도 안 말리는 거냐.”
노곤해지자, 불현듯 나온 말이다.
이게 옳은 길이지, 아니면 그른 길인지.
한마디 할 법도 한데, 다들 말이 없었다.
하물며 라그나는 자신에게 검과 방패를 쓰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형제님.”
아우딘은 사제일 때의 버릇인지, 툭하면 되묻는 질문을 던졌다.
“모르니까 물어보지.”
엎드려 있는 탓에 엔크리드의 목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아우딘은 그 위에서 웃으며 답했다.
“지켜본바, 소대장 형제님이 고집불통이기 때문이지요. 그만 주무시지요.”
고집불통? 내가?
엔크리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말이었다.
자신처럼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걸까?
미치광이 소대에 섞여서 이들을 통제 아닌 통제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자신까지 미친놈이었다면 이 부대가 어떻게 되겠나.
하지만 아우딘의 손이 목 언저리를 누르자, 엔크리드는 정신이 서서히 멀어지는 걸 느꼈다.
기절이나 죽음 그따위 감각은 아니고, 노곤함을 필두로 서서히 잠드는 그런 느낌.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입을 열고 떠드는 대신, 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엔크리드는 잠이 들었다.
아우딘은 제 소대장이 잠든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 고집쟁이인 사람은 자기가 고집을 부리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영 인정하는 기색이 아니다.
“재밌는 사람입니다. 형제님은.”
아우딘이 읊조리고 천막 밖을 향해 말했다.
“언제까지 보실 겁니까?”
천막 바로 앞, 작센의 목소리가 아우딘에게 답했다.
“소대장 본 거다. 너 본 거 아니고.”
아우딘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곤 나가고.
남은 작센은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하여간 참 신기한 사람이라.
자연스레 저 작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싶은 고민이 들게 한다.
돕고 싶게 한다. 가르치게 만든다.
그게 자신이 가진 비기의 일종이라도.
“내 건 필요 없겠지.”
작센이 중얼거리고 자리를 떠났다.
냐-아.
홀로 남은 엔크리드의 품으로 작고 검은 표범이 쏙 들어갔다.
잠결에 에스터를 안은 엔크리드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대로 꿈을 꿨는데.
얼굴도 안 보이는 이들이 나와선 엔크리드에게 거듭 물었다.
“그게 맞냐?”
“네가 가는 길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너 미친놈이지?”
“고집불통, 안 될 줄 알면서, 무슨 짓이냐?”
개꿈이었다. 엔크리드는 그 모든 질문을 한마디의 답으로 일축했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
의문 대신, 궁리할 것이고.
궁리의 끝에서 원하는 것을 취하리라.
그게 자신이 걷는 길이다. 하물며 지금은 제가 걷는 길에 이정표까지 보이는 판에.
그러니,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이란 걸 가질 때였다.
잠에서 깬 엔크리드는 눈을 뜬 채로 중얼거렸다.
“왜 두 개를 쓰는지 말은 해 줘야겠네.”
자신은 고집쟁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타당한 이유를 말할 것이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 봤다.
하루 푹 잤으니, 다시 몸을 써도 될 것이다.
밖으로 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고립의 기법, 검술 단련,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여기에 최근에 배운 괴력의 심장을 더한다.
계속 발동한 채로 두면 몸이 망가지니, 적당한 만큼만.
다시 훈련을 시작하니, 아우딘이 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님.”
해가 슬며시 뜨며 주변의 색을 파랑에서 노랑으로 바꾸는 시점이었다.
새벽의 찬 기운이 서서히 온난하게 변한다. 그리고 기온이 변하기 전에 이미 전신에서 김을 폴폴 풍기는 엔크리드가 막사 앞 자갈밭에 홀로 서 있었다.
주변 불침번 몇몇이 지나쳤으나, 딱히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전투 영웅 취급을 했으나.
단련하는 중에 말을 걸면 그 누구도 상냥하게 받아 주지 않는다.
물론 그건 평소에도 마찬가지다.
괜히 미치광이 소대로 부르는 게 아니었다.
주변 병사 무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이들은 존중받을 만했으므로 존중하기도 했다.
“응.”
물론 엔크리드는 그딴 일에 신경 쓰는 대신 자기 일에 집중했다.
아우딘 다음으로 렘이 나왔다.
“소대장아, 소대장아. 나 나왔수다.”
“그러냐.”
막사 바로 앞에서 단련하고 있는데 자신이 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하여간 그렇게 옆에서 쭈그려 앉은 채로 렘이 지켜보고.
작센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음은 크라이스였다.
“으함, 오늘도 뭐 돌아간다는 말은 없나 보네요. 이거 안 좋은데.”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며 홀로 중얼거리는 왕눈이다.
그 뒤에 나온 소대원, 라그나다.
“소대장.”
그가 다가온다. 이제 사람이 다 모였기에 엔크리드도 손을 멈췄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자신은 고집쟁이가 아니니까.
“꼭 검 두 개를 써야 하는 겁니까?”
마침 다가온 라그나가 물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럴 생각인데.”
이제 왜냐고 물으면 답을 할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엔크리드가 빤히 라그나를 바라봤다.
자, 물어봐야지?
라그나는 묻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았고, 어쩔 수 없었기에 엔크리드는 알아서 먼저 말했다.
“이검류, 두 개의 검을 쥐는 게 더 좋았다.”
기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 동경했기 때문이다.
검이 좋았던 이유, 손에 쥐는 순간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았다.
검 두 개를 쥐는 순간, 깨달은 것.
우연히 왼손을 단련하게 된 순간, 양손에 검을 쥘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엔크리드는 작은 벼락을 맞았다.
깨달음의 순간이다.
‘검 두 개를 써도 된다면.’
그게 몸에 착 감기는 기분이다.
“안 물어봤습니다.”
그래, 묻진 않았지.
“아니, 누가 물어봤수?”
옆에서 렘이 낄낄 웃었다.
최근 저 야만인 자식은 계속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아무도 안 묻긴 했지.
“그렇군요.”
왕눈이는 영혼을 어디 잠깐 출장을 보냈는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아우딘은 “네, 형제님” 하고 답했고.
작센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숫돌을 꺼내 제 단검을 가는 중이다.
스르릉, 팅.
하는 소리만 아침 햇살을 반길 뿐.
“하!”
“하아!”
어떤 미치광이 소대장 때문인지, 시간이 남자 주변에 훈련을 거듭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었다.
엔크리드는 기합과 단검을 가는 소리 사이에서 다시 중얼거렸다.
“두 개 쓰는 게 더 좋아서.”
“안 물어봤다니까.”
고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걸 말하는 순간 뭔가 자신이 고집쟁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검 두 개를 몸에 붙이는 법. 그게 더 급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라그나가 물었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온전히 정리했다. 그냥 고집쟁이를 하기로.
일단 검 두 개를 몸에 붙이는 거, 이게 급했으니.
“응.”
“지금부터 소대장에게는 애인이 둘 있는 겁니다.”
라그나가 말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소대원들의 설명하는 능력은 최악이었다.
말재간이 없다곤 못 하겠는데, 뭔가 자기가 아는 걸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이 말도 하루를 묵히고 하는 말이니.
엔크리드는 어젯밤에, 막사에서 생각에 몰두했던 라그나를 떠올렸다.
이 말을 하려고 그리 고민했나?
엔크리드는 답했다.
“그러지.”
애인 둘쯤이야.
“둘 다 끌어안고 자는 겁니다. 먹을 때도 잘 때도 쌀 때도 뭘 해도 검을 끌어안아 제 품 안에 두고 움직이는 겁니다.”
이게 무슨 훈련인지는 묻지 않았다.
천재가 하루를 고심해서 꺼낸 방법.
엔크리드는 믿고 따랐다.
“그러지.”
같은 답이 두 번 나왔다. 라그나는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였다.
상기된 볼이 소년의 그것과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게 할 말의 끝이었다.
그 뒤, 엔크리드는 라그나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고립의 기법을 갈고 닦고.
발라프 식 지압법에 당하며 배우고.
무투를 단련하고 검을 단련하고.
괴력의 심장의 가용 시간을 늘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더 하며.
검을 품에 안았다.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애인 둘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했다.
먹을 때도 잘 때도 쌀 때도 무엇을 해도.
“캬아.”
그게 퍽 거슬렸는지, 가끔 잘 때 에스터가 칭얼대긴 했으나.
엔크리드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이레가 지났다.
전투는 없으나, 본대 소식만 가끔 오가는 사이다.
크라이스가 닷새쯤에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안 좋은데요.”
“왜?”
“본대 싸움이 길어져요.”
“그게 왜 안 좋은 거냐?”
본래 아즈펜의 전력은 만만치 않다.
나우릴리아가 내부적인 문제로 제대로 전력을 투입하지 못한다고 해도.
강국의 반열에 오른 나우릴리아의 공세를 견뎌 내는 건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크라이스는 이전에 배운 경험이 있기에, 길게 말하는 대신 쉽게 말했다.
“시작하자마자 상대 뒤통수에 손바닥을 올렸는데도 밀어붙이질 못하잖아요. 하물며 대외적으로는 이쪽이 더 유리한데.”
“그래서?”
크라이스의 눈이 좌우로 길어졌다.
정말 생각도 안 하고 계속 그렇게 물을 작정이냐, 그런 눈빛으로 보였다.
아니, 왜 눈으로 말을 하는 게 들리는 것 같지?
그래도 뻔뻔하게, 자신은 고집쟁이니까.
엔크리드는 무던하게 크라이스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그럼, 아군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볼 때는 방법이 하나거든요.”
“하나?”
이 인간이 진짜?
크라이스는 눈으로는 이리 말하고 입은 의무에 충실했다.
“적의 뒤통수를 진짜 후려 보는 거죠. 그것도 잽싸게 후리고 빠지는 뭐 그런 짓을 할 것 같은데요.”
이건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사이프러스 사단의 4연대 4대대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지.
보더 가드 상비군의 일이 남았다는 것.
곧 전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자연스레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그렇군.”
기대, 그딴 게 있었다.
과연 아즈펜은 후방에 뭘 뒀을까.
이게 닷새째의 일이었고.
이레가 지난 8일째의 아침.
“기습이다!”
적군이 쳐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