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감각과 몸의 협응으로
경계병을 죽인 렘은 몸을 돌렸다.
엔크리드와 라그나는 나설 기회도 없었다.
여기서 적군을 기다릴 것도 아니니.
“싱겁구만.”
렘이 손에서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도끼날에 묻은 피가 후두둑 바닥으로 뿌려졌다.
그걸 본 엔크리드가 몸을 돌렸다.
“라그나.”
부름에 라그나가 제 소대장의 뒤를 졸졸 쫓았다.
크라이스가 신신당부한 요소였다. 라그나를 혼자 두지 말 것.
놔두면 길을 잃고 미아가 될 게 뻔해 내린 조치다.
“너, 야만인. 적당히 나서라.”
소대장의 뒤를 쫓으며 라그나가 한마디 던졌다.
라그나가 생각하기엔 엔크리드가 나서려 했는데 그럴 기회조차 없는 거로 보였으니.
야만인이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함을 모르니, 야단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하게도 렘은 얌전히 알았다고 하지 않았다.
“응? 뭐라고? 목에 입을 하나 더 달고 싶다고? 목울대를 갈라 달라고?”
“그만.”
엔크리드는 평온한 마음으로 둘을 말렸다. 이제 시작이었음에야.
산등성이를 도로 타고 올라간다. 내려오는 것에 비해 몇 배는 힘들어야 맞지만.
이 정도야 그동안 고립의 기법으로 구른 거에 비하면, 그러니까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그건 렘과 라그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끼와 검을 쓰는 미치광이 소대원 중 이 정도로 체력이 떨어질 이들은 없었다.
“자자, 핀, 가죠.”
크라이스는 싸움할 때가 아니라는 듯, 재촉하듯 말했다.
핀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뗐다. 다시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길이다.
핀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엔크리드가, 다시 엔크리드의 뒤를 라그나와 크라이스가 따랐는데.
크라이스도 나름 체력만은 좋은지라,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
맥만이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심 놀랄 따름이었다.
‘빨라.’
주저함이 없는 걸음이다. 체력의 손실 따위를 무시한 강행군으로 보이나, 다들 힘이 부족해 보이진 않았다.
맥은 제 앞가림만 하면 될 일이라 판단했다.
“호흡을 천천히 길게 하십시오.”
이 행군, 아니 기습? 타격 임무? 뭐라 부르든 이건 짧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체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맥이 말했고,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짧은 한마디가 돌아온다. 의도를 전부 말해 주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소리였다.
그 말에 맥은 새삼 감회가 새롭긴 했다. 언제 이렇게 자랐던가.
이번 전장이 마무리되면, 끝내 도시로 돌아가면, 이제는 제 자리를 찾으러 갈 때가 된 건 아닌지.
“힘들겠지. 그런데 음, 모르겠네. 기대돼.”
입을 연 앤드류의 시선의 끝이 제 소대장의 등에 닿아 있었다. 맥은 앤드류에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심 기대되는 바다.
과연 저 소대장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진정 자신의 꿈이라는 그 뭔가를 쥘 것인가.
그도 귀가 있고 눈치가 있었다. 소대장이 바라는 건 현재의 그가 쥘 수 없는 무언가였다.
앤드류의 꿈 또한 가당찮다는 소리를 들어도 무방한 수준.
그를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있으나, 앤드류가 과연 제 가문을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포기는 없다.”
앤드류가 중얼거린다.
어렸던, 핏덩이에 불과하던, 제 실력을 믿고 나불대던.
그런 꼬맹이는 이제 없었다.
소대장의 등을 보고 변한 남자가 있을 뿐.
“포기란 없지요.”
맥이 괜히 뿌듯하단 음성으로 답했다.
엔크리드의 의도는 아니겠으나, 앤드류는 변했고.
그 변화는 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가문을 살리는 것 따위,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리라.
맥은 돌아가서 할 일을 정리하며 걸음을 뗐다.
호흡은 천천히 길게, 쓸데없는 움직임을 줄이며 움직여야 했다.
앤드류가 옆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호흡을 조절하며 걸었다.
맥과 앤드류가 속삭이는 사이, 엔크리드는 걸으며 소대원의 호흡을 들었다.
“듣고 또 듣는 겁니다.”
보는 것으로 동체 시력의 발달을 꾀한다면, 청각 또한 마찬가지다.
소리를 분간하고 파악하는 속도를 높임으로 이 또한 발전하는 법이다.
자갈이 튀는 소리, 산등성이를 밟는 걸음, 거기에 소대원의 호흡.
‘얕고 길다.’
맥과 앤드류다. 둘 다 미래를 대비하는 중이다.
렘은 어떤가. 거칠다. 박자도 없다. 어떨 때는 빠르고 어떨 때는 느리다. 분간하기 어렵다.
성격과 꼭 맞다.
아우딘은 호흡이 너무 길어, 언제가 끝이고 시작인지 알기 어려웠다.
라그나는 평범했다.
작센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그럼 자신은 어떤가.
가장 비슷한 호흡이라면 라그나와 닮았다.
평범하다. 평범하게 숨을 쉬고 몸에 익은 걸음을 옮겨도 무방했다.
“전부터 궁금한 건데, 어디서 레인져 훈련받은 거 아니지?”
핀이 뒤로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엔크리드는 평소와 같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는 레인져 보고 어깨너머로 배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핀을 보고 배운 거니.
근데 언제고 이런 질문과 이런 답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엔리 때와 같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원에 관해선 어디서 배웠냐 물었고, 비슷한 답을 던졌었다.
그 친구, 도시로는 잘 돌아갔나 모르겠다.
포로로 잡은 군대를 후송하는 부대와 합류에 갔으니 별일은 없겠지.
엔크리드는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듣고 보고 느낀다.
감각을 세분화해서 단련하며 걸었다.
앞으로 쭉 뻗은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우측이 적군, 좌측이 아군 진지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군 진지도 움직였을 테고.
엔크리드는 주어진 일만 하면 그만이었다.
걸으며 단련을 거듭하다, 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돌진은 뭐냐?”
“어떻게 한 거냐고 묻는 거면 소대장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이 들 것만 같수.”
렘의 반응이 어째 시큰둥했다. 말투에 나무라는 투가 역력했다.
왜?
엔크리드는 곧 그 이유를 알았다.
‘고민도 없이 물었다.’
물으면 답이 나오니, 반사적으로 묻게 된 거다.
최근에 명령하는 버릇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대하는 재주가 나름 뛰어나고.
홀로 전진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돌아서는 법 없이 기어서라도 나아가는 기개와 별개로.
‘부족해, 궁리를 잊었다.’
실수도 한다. 그게 사람이다. 다만,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엔크리드는 전환이 빨랐다.
실수를 인정했고 인지했으며 수정했다.
엔크리드는 렘의 말에 대꾸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했다.
묻지 않아도 알았어야 했다는 말이니.
답은 이미 배운 바에 있다. 질주, 돌진, 필요한 건 무엇인가.
힘, 근력, 허벅지 근육.
괴력의 심장이다. 전신 근육에 힘을 배가시켜 뛰쳐나가면 어찌 되는가.
물론 훈련이 필요하고 단련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
다만, 길이 보이기에 기쁠 뿐.
아, 이거구나.
엔크리드의 얼굴에 희열의 미소가 스치자, 그걸 본 렘이 피식 웃었다.
아니, 뻔히 보이는 걸 왜 묻고 지랄이슈?
그런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핀을 선두로 한 이들은 부지런히 걸었다.
걸으며 핀은 새삼 놀랐다.
하나같이 다 괴물 같아서.
그 누구도 걸음이 뒤처지지 않는다. 이게 쉽나? 아닌데, 안 쉬운데.
레인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지 않나.
‘얘는 곱상한 얼굴이랑은 또 다르네.’
특히나 왕눈이란 별명의 소대원이 인상적이었다. 이쪽은 전투원이 아니라고 들었는데도 걸음에는 뒤처짐이 없다.
물론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체력을 믿고 우직하게 따라오는 것에 가깝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 산등성이를 타고 넘으며 짧은 수풀이 난 땅을 보고 멈췄다.
“이 정도면 후면으로 온 것 같은데.”
소수로 움직이는 게 좋은 건 무엇인가.
가장 손에 꼽을 수 있는 건 기동력이라.
이들은 그걸 십분 살렸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이번에는 아우딘과 작센이 따라나섰다.
“아, 왜.”
렘의 입술이 삐죽 나오긴 했으나, 본래 돌아가며 나서기로 한 거다. 수틀리면 회피 기동으로 빠져야 하니, 후방을 봐줄 이들이 필요했다.
크라이스의 호위도 필요했고.
엔크리드는 내리막을 걸으며 에스터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같이 데려왔는데, 산길에 오르자마자 톡 하고 품에서 내려오더니 사라져 버렸다.
어디서 사냥이나 하고 있으려나.
모른다.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니리라.
엔크리드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서 적의 경계병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운이 없었다.
삐이익!
거수자를 발견하자마자 적병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재빠른 반응이었다. 그러곤 제 손에 들린 창을 앞으로 겨눈 채 외쳤다.
“누구냐? 거기 멈춰.”
엔크리드는 말없이 다가갔다. 경계병 중 하나가 허리춤을 손으로 훑었다. 단검을 던지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허리춤을 훑은 손에 쓰로잉 나이프 하나가 거꾸로 들렸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반응하라.
감각에 몸을 움직일 것, 요는 반응 속도를 높이는 거다.
이게 회피의 감이란 기술이었다.
훅.
단검이 날아왔다. 날아오는 단검에 맞춰, 자세를 낮추며 앞으로 돌진했다.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하고 피하는 것과는 달랐다.
집중력이 아닌, 반응 속도로.
무던하고 태연하게.
그게 핵심이기에, 그렇게 했다.
괴력의 심장을 발동하지 않은 채, 전장을 향해 달려가던 기사의 걸음을 흉내 낸다.
팍팍 하고 땅을 차고 나아가니, 적병이 창을 내질렀다.
쭉 하고 뻗은 창날 끝이 가슴 부근을 찔렀다.
보고 반응하고 피하며 쳐 낸다.
모든 걸 한 호흡 안에 넣고, 연결 동작으로 묶었다.
엔크리드는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몸을 틀어 창날 끝을 피하고 창대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탁- 하고 창대를 밀치자, 창을 든 적병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엇!”
놀란 놈의 눈이 가까워졌다.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덕이었다.
언젠가 한번 렘이 보여 준 것처럼.
엔크리드는 달려 나가 창대를 쳐 내곤 적의 품 안에 안겼다.
이후의 싸움이 싱거운 건 당연했다.
푹!
엔크리드가 단검을 꺼내 적병의 목덜미를 찔렀다가 뽑았다.
비스듬히 열린 목덜미에서 피가 푸왁 치솟고.
엔크리드는 단검을 거둔 채, 나름 만족했다.
‘된다.’
오늘을 반복하지 않은 채, 익힌 기술이라 해야 했다.
‘회피의 감’, 몸의 협응력을 올리는 기예다.
이 훈련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몸의 반응 속도가 달라진다는 것.
그럼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
‘한 점의 집중’이 없어도, 상대적으로 적보다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그건 곧 공격의 선점이요, 공간의 선점을 가져올 시작이니.
싸움이 싱거운 건 당연했다.
상대가 형편없는 실력이고, 엔크리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해도.
‘돼.’
그 자체가 기쁨이라.
작센은 엔크리드가 보인 걸 보고 흡족했다.
그렇지, 저렇게 하는 거였다.
기초지만 깔끔하다.
안 좋게 말하면 무식하게 단련한 거고.
좋게 말하면 우직하게 걸은 덕이리라.
그게 이 훈련의 핵심이긴 했다.
우직하고 또 우직하게.
엔크리드에게 퍽 잘 어울리는 기술 아닌가.
감각에 맞춰 몸의 협응력을 기르는 훈련은 반복할수록 반응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다.
‘꿈이 기사라 했던가?’
허무맹랑한 꿈이라 해서 쫓지 말란 건 없는 법이었다.
자신의 경우에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자신이 바라던 것, 감 속에 숨겼던 목표를 말했다면 비웃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은 이어지나, 작센의 손은 어느 순간보다 충실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어느샌가 적병의 뒤를 잡고 놈의 목에 단검을 대고 그었다.
푸슉.
엔크리드처럼 피가 분수처럼 솟게 할 필요는 없다.
“끅!”
목이 베인 적병이 창은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으로는 제 목을 그러쥐었다.
손으로 상처 부위를 누른다?
불필요한 행위였다. 이미 목에 있는 큰 핏줄을 벴다.
무수한 경험으로 작센은 저 부근의 핏줄을 베인 인간이 죽는 걸 봐 왔다.
곧 목을 쥔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줄줄 샜다.
툭 하고 오금을 차고 바닥에 쓰러뜨려 주자, 창을 놓친 적병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서서히 죽어 갔다.
소리를 지를 힘도, 호루라기를 부를 힘도 없을 터였다.
“그만 가죠.”
순식간에 두 명의 경계병을 처리했다. 호루라기 소리에 적 부대 안쪽에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다시 빠져야 할 때였다.
“그러지.”
만족을 보인 엔크리드가 답하고 몸을 돌렸다.
다시 산을 타고 움직일 때였다.
그들은 또 움직였다.
부지런히 걸었다.
빠지는 것도 유령과 같이 빨랐다.
호루라기에 반응해 다가온 아즈펜 부대가 본 건, 산을 타고 오르는 등판뿐이다.
“쫓아!”
분노한 아즈펜의 후방 지휘군이 외치고, 적병이 곧 엔크리드 일행의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 사라진 소수 정예를 어찌 쫓을까.
그들보다 발도 빠르고, 똑같이 소수로 쫓으면 역공을 가하는 상대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크라이스에게는 이게 당연한 결과였다.
왜 아니겠나.
적군이 소수 정예로 타격을 가한다면.
이쪽도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거니까.
물론 미치광이 소대 같은 이들쯤은 되어야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속보로.”
그 뒤로 엔크리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크라이스는 제 소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대장이 자신의 의도를 다 읽었을까? 그게 새삼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