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아는 만큼 보인다.
휘슬 대거가 열 자루, 품이 넓은 가죽 갑옷은 안쪽에 얇은 천을 대서 까끌까끌하지 않았다.
갑옷, 괜찮았다.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전 것처럼 무슨 주문을 막는 갑옷은 아니지만, 물리적인 공격을 막는 거라면 이쪽도 충분할 것이다.
날 더우면 이 또한 입기에는 괴롭겠지만.
필요하다면 입어야지, 어쩌겠는가.
가죽 사이로 수없이 두들겨 얇게 만든 쇠사슬을 격자 모양으로 넣어 뒀는데, 무게는 있지만, 방어력만큼은 월등할 것 같았다.
“내 역작이지.”
대장장이가 그리 말할 법도 했다.
반값만 받겠다고 했지만, 갑옷 자체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가죽을 수선하는 비용이며, 일일이 얇은 사슬을 만드는 비용까지.
갑옷 하나 만드는 데 근 1년이 걸렸다고 하니.
“잘 쓰라고.”
검붉은 얼굴의 대장장이.
그의 선물이었다.
이런 걸 그냥 받을 수 없어서 크라이스를 달달 볶아서 값은 치렀다.
대장장이는 묵묵히 크로나 주머니를 받았다.
어쨌든 그렇게 받은 갑옷과 발목에 찰 만한 단검 두 자루.
허리춤 뒤에 가드 소드 한 자루, 쓰로잉 나이프 여덟 자루를 허벅지와 옆구리 따위에 다시 챙겼고.
휘슬 대거집은 가슴팍에 엑스자로 찼다.
뽑을 때 불편하지 않은 각도야,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예전부터 자주 쓰던 각도다.
다니다 보면 아무렇게나 쓸 나이프도 한 자루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것도 챙겼다.
숏소드도 한 자루 챙길까?
검이 부러지면 보조 장비로 적당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걸 챙기다 보니 한 짐이다.
노숙을 대비한 두꺼운 모포도 있어야 하고 냄비도 하나쯤은 필요할 것 같은데.
냄비는 크라이스에게 가져가라고 하면 되긴 하겠지만, 그 외에도 준비할 게 꽤 많았다.
밤을 지새우게 해 줄 숯과 두툼한 천, 나무로 만든 스푼과 포크, 구리가 섞인 얇은 철판도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뭘 구워 먹기 딱 좋을 테니.
여행길에 나서려면 배낭도 메야 하는데, 무게가 상당할 판이었다.
검 쓰는 게 미숙한 엔크리드를 여태껏 살아남게 한 일등 공신을 꼽자면 이런 준비성이리라.
한 번 몸에 밴 버릇이 어디 가진 않았다.
하물며 고작 넷, 물론 그 넷의 면면이 다 만만치 않은 무력의 소유자이긴 했다.
프록이야 홀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니까.
엔크리드는 어떤 이유로든 여행길의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기에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이게 마음이 편했으니.
“그걸 다 챙기나?”
옆에서 루아가르네가 핀잔 같은 걸 날렸다. 핀잔이 아니라 그냥 감탄일지도 모르겠지만, 엔크리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마음 편한 게 가장 우선 아닌가.
“네, 더 가져갈 수 없어서 아쉽군요.”
건틀렛에, 정강이 보호대까지.
꼼꼼한 무장이었다. 나이프도 하나하나 날을 세우고 양 지방으로 만든 기름으로 칼날도 부지런히 닦았다.
칼날에 반들반들 윤이 났다.
“대낮에 햇빛을 반사하는 걸 노리는 건가?”
“날카롭군요.”
옆에서 구경하며 한마디씩 하는 프록에게, 엔크리드는 거듭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만담이라도 나누는 것 같았다.
“나 왜 내 자리 뺏긴 기분이 드는 거요?”
옆에서 렘이 헛소리를 뱉었다.
그건 무시했다.
“왜 내 말에는 대답 안 하지?”
렘의 말투가 불퉁해졌다.
이건 놔두면 안 되겠군.
거듭 투덜대고 놔두면 행패라도 부릴 것 같아,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했다.”
“언제?”
“무응답으로.”
뭐냐, 이 미친 소리는? 렘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엔크리드는 무난히 렘의 반응을 받아 삼켰다. 무시했단 소리다.
“씁.”
렘도 그냥 넘어갔다. 말로 싸우면 자신이 진다.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었다.
임무가 있든 없든 일상이다.
엔크리드는 하던 대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미친 듯이 훈련에 몰입, 저녁에는 출정을 준비한다. 장비 관리는 물론이고 갖가지 도구를 챙기는 과정이다. 그런 엔크리드의 모습에 프록은 반쯤 질려 버렸다.
‘독한 놈인 건가.’
아니면 둔한 놈인 건가.
이 모든 걸 그냥 했다. 훈련도 준비도 하나같이 만만찮은 짓인데.
고민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아니, 가끔 고립의 기법이란 명목하에 몸을 굴릴 때는 괴로움이 엿보이기도 하나.
괴로움 뒤에 묘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면.
‘그냥 변태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기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좌절과 절망은커녕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석 달을 지켜본 결과, 행동에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고로 저건 이상한, 아니 정말 이상한 놈이란 거다.
꾸륵.
이러니 흥미가 생기지.
외모도 탁월해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어디서 이런 놈이 떨어졌을까.
“내 거다.”
루아가르네는 연무장 한쪽에 그늘을 지붕 삼아 쭈그려 앉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 옆에 언제 왔는지 요정 중대장이 다가와서 말했다.
요정의 그림자가 그늘을 살짝 넘어 불룩하게 보였다.
“누가 뭐랬나.”
루아가르네는 무심히 받아쳤다.
“캬아.”
반대편 그늘, 덩그러니 앉은 에스터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저건 툭하면 저러네.
상관없는 일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루아가르네는 프록, 프록에게 중요한 건 욕구와 욕망, 흥미와 자극.
그 자극이 눈앞에 있으니, 누가 심장 어림을 툭 쳐도 한칼에 죽이진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심장을 건드렸으니, 반쯤은 죽이겠지만.
* * *
엔크리드는 훈련 사이사이, 제 할 일도 잊지 않았다.
“출정 나가겠다고? 인원은 넷? 프록도?”
대대장에게 보고했더니, 되묻긴 했으나 금세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별일이군.”
그런 말이 덧붙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떤가, 기사가 될 수 없다고 함에.”
떠나려는 엔크리드의 뒤로 대대장이 물었고.
엔크리드는 군례를 보이기 전, 무심히 답했다.
“네, 선물은 감사했습니다.”
그의 마음 씀씀이에 악의가 보이는가.
아니, 아니다.
설사 악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자신에게는 좋은 계기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라 했던가?
엔크리드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 끝내 이루지 못했던 걸 쫓아 여기까지 왔으니 찢기고 찢긴 꿈을 엮는 과정일 뿐이었다.
“감사?”
“네.”
“그렇군.”
무료한 대화 사이, 군례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오니.
요정 중대장이 졸졸 따라왔다. 근래 자주 얼굴을 마주하는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할 일이 없나.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니.
“새삼 반했나?”
이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엔크리드는 아니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그리 돌아와선 다시 개인 정비에 몰두했다.
“나가고 싶어서 신이 났구만, 신이 났어.”
렘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몸이 근질거리면 한판 붙을까?”
엔크리드는 능숙하게 그 시비를 받아넘겼다.
“좋수다!”
시원한 대련, 호쾌한 타격.
깡! 깡!
전보다 만족스러운 게 있다면 렘의 얼굴에 전과 다른 감정이 엿보인다는 거다.
그건 어떤 만족감과 같았다.
괴력의 심장을 발동해 검을 휘둘러 도끼 위를 때리자, 렘은 기가 막히게 발을 놀려 힘을 흘렸다.
처음이었다. 렘이 유검식 비슷한 기술을 쓴 건.
“흘리기?”
“왜? 난 뭐 이런 거 쓰면 안 되는 거요?”
“아니.”
그건 아니지.
결과는 묵직한 도끼 일격에 괴력의 심장이 풀리며 패배.
이후 아우딘과도 붙었고, 라그나와도 붙었다. 작센이 다시 한가해졌는지 얼굴을 비추길래 그와도 붙으니.
“훈련 부족입니다.”
훈련이 늘었다.
그가 선뜻 훈련을 도왔다는 소리다.
동체 시력과 반사 능력의 단련, 결국 회피의 감을 위한 것.
“아직 멀었습니다.”
결과는 아직 미흡하지만, 그래도 반복이다.
요는 이거였다.
개인 정비가 얼추 끝났으니, 떠나기 전날까지 또다시 무식할 정도로 훈련에 매진했다는 것.
“가진 게 늘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정리해야 하는 겁니다.”
라그나가 중간에 답지 않게 잔소리를 했다.
엔크리드는 들을 만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지.”
훈련 사이사이 명상하는 시간을 늘렸다.
루아가르네는 기분이 내키면 채찍도 휘두르고 이런저런 자세도 봐 줬지만, 대체로 구경꾼의 태도였다.
엔크리드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차곡차곡 쌓기 바빴다.
‘기본기.’
검술의 기본기와 단련의 기본기.
그건 정중환쾌유 중 북방식 중검의 기본기와 고립의 기법이다.
이걸 받쳐 주는 건 칼날의 감각.
육감의 문을 열어젖혀 보이는 한 치 앞의 미래.
이 또한 홀로 발동하는 건 아니다.
한 점의 집중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난 천재가 아니다.’
오롯이 오늘이라는 우물에 빠진 개구리.
우물 위로 올라서서 내일을 향해 내달리는 하루살이.
그러하기에, 발악하고.
그러하기에, 기어서라도 나아가니.
엔크리드는 변하지 않았다.
너무도 한결같았다.
빛바랜 꿈을 좇아 방황하는 행자, 행자는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리 자신의 것을 갈고닦고 마음을 다잡아 또다시 갈고닦아.
박자를 깨우치며 중검식에 힘이 더해지고.
괴력의 심장에 조금은 익숙해지고.
그리 떠나기 전날이었다.
“요새 마수 무리가 아주 난리라고 하던데요, 전에는 열 명 단위로 뭉쳐서 다니던 행상들이 이제 스무 명 이상이 아니면 잘 안 다닌다는데요? 이거 이대로 나가도 되나, 뭐, 되겠죠.”
뭔가 불안하다가 말았는데?
프록에 핀, 엔크리드의 얼굴을 둘러보던 크라이스가 말을 묘하게 틀어서 뱉어 냈다.
크라이스의 말을 듣다가 평소처럼 대련을 나섰을 때다.
상대는 렘, 그와 거리를 두고 섰다. 검을 뽑아 겨누자, 렘도 도끼들 들고 손목을 휙휙 돌렸다.
이게 몇 번째 대련이더라.
근래 자주도 붙었다.
“오늘은 날 더 즐겁게 해 주는 거요.”
뭐 때문인지 꽁해 있던 놈이다.
반쯤은 렘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겸 나선 참이었다.
이럴 거면 따라나설 것이지.
굳이 남아서 왜 꽁해 있는 건지.
이제는 반쯤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한복판.
엔크리드는 기온의 변화를 느꼈다.
미묘한 바람의 방향도 느꼈다.
공기가 달라지는 것도 한순간, 서로의 간격을 가늠하는 것도 한순간.
그 순간, 찰나, 틈이 쪼개진다.
그와 동시에 반복되는 오늘을 통해 배운 것들이 올올이 떠올라 몸에 안착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힌 것들.
점과 점을 잇는 선.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는 원, 검의 영역.
리듬, 또는 템포라 불리는 공격, 방어, 카운터의 타이밍.
상대의 손짓, 호흡을 따라 보이는 한 치 앞의 미래.
엔크리드는 손을 조금 내렸다. 본능이었고, 미래가 보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검 끝이 조금 더 앞으로 기울어졌다.
햇살 사이로 도끼 두 자루가 멈췄다.
렘의 코끝이 보였다. 눈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도 보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잊고 상대를 마주함에, 가장 합리적이고 빠른 길을 찾게 됐다.
영역이 맞닿는 지점, 자신이 유리한 템포와 타이밍.
리듬을 탄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햇살을 가르는 검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도끼도 움직였다.
도끼를 쥔 사람도 같이 움직였다.
희끄무레한 형체, 뭐 그런 게 보였다.
엔크리드의 눈에 그건 악령 같기도 했고 유령 같기도 했다.
어쨌든 악령의 도끼가 날아왔다.
서걱!
목이 잘리는 환상, 환상이 닿기 직전 엔크리드의 검도 위에서 떨어졌다.
벼락같은, 중검식의 무게감을 싣고 가속한 칼질이었다.
훙.
벤 건? 없다.
목은? 목도 멀쩡했다. 도끼에 잘린 건 환영이었다.
“……거, 음, 사람 진지하게 하는 재주도 익히셨수?”
“피했지?”
말하며 돌아서니, 렘의 볼에 핏자국이 보였다.
손에 감은 없었으나, 벴다.
겨우 볼에 생채기 정도지만.
찌르르.
전신에 감동 비슷한 게 울렸다. 짐승의 울음이 몸 안에서부터 퍼져 진동을 만들어 내는 그런 기분.
생각해 보면 처음이었다.
렘과 라그나, 아우딘, 작센.
그 누구도 자신의 검에 생채기조차 난 적이 없었으니.
“옳지.”
지켜보던 루아가르네가 벌떡 일어나 입을 열며 손바닥을 퉁 쳤다.
매끈한 손바닥이 맞닿는 소리는 둔탁했다. 소리와는 별개로 굉장히 기꺼운 모양새였다.
“음, 지금, 그러니까.”
엔크리드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색다른 경험이었나, 아니, 이런 적이 있었다. 경험했었다.
‘콧수염.’
그를 처음 상대했을 때도, 미치 휴리어에게 푹 빠져 한 점의 집중을 발휘했을 때도.
집중력이 뭔가 한계를 깨는 경험.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더 농후했다.
배운 게 더 많았고.
익힌 게 더 많았기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 했던가.
그렇게 보였다. 아는 만큼이.